난관에 부딪혔을 때 나는 항상 머리를 굴린다. 어떤 꼼수를 써서 이 긴 책을 멋있게 읽어낼 수 있을까. 저자의 뇌리에 들어있는 열쇳말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그 열쇳말은 대개 인터뷰에서 제공된다. 다행스럽게도 <주간 경향>이 저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수확은 좋았다. <주간 경향>이 기대 이상의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75학번으로 1981년 군 제대 후 삼성그룹에 입사해 CJ제일제당에서 근무했고, 1995년 미국에서 벤처 사업을 시작하여 증권정보 인터넷 기업인 팍스넷을 만들었다 한다. 팍스넷, 내가 2000년을 전후하여 주식 투자를 할 때 많이 들어 본 기업이다.
다만 대표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또 그는 증권가 등에서 미네르바의 '범인상'에 일치한다고 지목되면서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유명세를 치른 모양이다. 안철수 전 후보와 함께 브이소사이어티를 만들었고, 그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이력이다.
"이권 집단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 <혁신하라 한국 경제>(박창기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그는 <주간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가 처음 생겼을 때는 (이권 집단의 발호) 현상이 없다가 이권 집단이 생기면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망한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역사다. 그래서 감히 역사의 일반법칙이라고 생각했다."
친근감이 확 생긴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그러니까 1984년 가을 친구들과 토론을 하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왕조 교체는 혁명적 성격을 갖는 것 같다고, 고려 초기와 조선 초기는 그 개혁적인 성격으로 닮은 점이 많다. 반면 고려 후기와 조선 후기는 이권 집단의 발호라는 공통적인 암세포를 가지고 있었다.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 시대 때도 그랬다.
저자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G3, 즉 이권 추종 집단에 속한다고 과감하게 단정 짓는 것도 흥미롭다. 그는 현대차 노조에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설 의지가 없다고 보고 있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70퍼센트 동의한다. 100퍼센트 동의하지 못한 이유는 집단이라는 것은 그 성향이 유동적이어서 단정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나도 현대차 노조에 대해 과거와 달리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이 지나치게 당사자 운동에 매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수구 세력보다는 낫고, 또 진정성 있었던 과거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프레시안> 칼럼(8월 31일자, ☞바로 가기 : '주4일 근무제는 서민경제의 혁명이다')에서 주35시간 근무제를 유도하는 방편으로, 기업 부담 사회 보험료 할증-할인 방식을 제시했던 것도 사실은 대기업 노사 양측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대기업 노사 양측은 당사자 이익에 깊이 몰두해 있기 때문에 근로 시간을 충분히 줄여서 20대, 30대 후배들에게 좋을 일자리를 마련해 줄 생각이 별로 없다. 그래서 노사 양측에 기업 부담 사회 보험료라는 패널티를 주어서 근로 시간 단축을 강제하자는 것이 나의 구상이었다.
"수출도 중요하다"
저자는 또 진보 진영이 흔히 제시하는 해법이 내수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틀렸다고 말한다. 내수는 이권을 줄이는 개혁을 하되, 수출 부문에는 창조적 렌트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창조적 렌트란 독보적인 제품을 만들어 타 기업의 시장 잠식을 허용하지 않는데 따른 이권, 즉 좋은 의미의 이권으로 해석된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진보와 보수 모두 다 내수 활성화를 외친다. 따라서 내수 활성화 주장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수출도 존중하면서 내수 활성화를 주장하느냐, 아니면 수출을 폄훼하면서 내수 활성화를 주장하느냐인데, 저자는 아마도 진보 진영 학자들이 후자에 경도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저자로 하여금 진보 진영이 수출을 폄훼하면서 내수 활성화를 주장한다는 인상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그의 책 288쪽에서 김상조의 책, <종횡무진 한국 경제>(오마이북 펴냄)에 대해 언급한다. 김상조가 그의 책에서 삼성전자 같은 전기전자 업종의 부가 가치 유발 계수가 1995년 0.653에서 2009년 0.501로 떨어진 것을 거론하며 "1000원짜리 전기 전자 제품에 대한 최종 수요가 발생하면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경제 활동의 결과 최종적으로 국내의 부가 가치로 남는 것은 501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수입 소재 부품 완제품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다는 말인데, 이래서야 국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김상조가 거론한 이런 데이터들이 수출의 중요성을 깎아내리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저자 말이 맞다. 김상조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대다수 연구자들이 부가 가치 유발 계수 등의 산출 근거가 되는 산업 연관표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
산업 연관표로는 경제의 동태적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
대다수 학자들의 산업 연관표 해석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산업 연관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총수입과 총산출이 같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업 연관표가 경제의 동태적인 움직임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업의 단년도 재무제표를 보고 그들의 성장을 확인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기업의 성장을 확인하려면 전년도 재무제표와 비교해야 하듯이 산업 연관표도 그 자체만으로는 경제의 동태적 움직임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전기전자기업과 도소매업 중 어떤 산업의 부가 가치율(=매출액 대비 부가 가치액) 비율이 높을까? 2010년 산업 연관표에 따르면 놀랍게도 전기전자 기업의 부가가치율은 21.5퍼센트에 그친 반면, 도소매업은 56.2퍼센트에 이른다.
이쯤 되면 전기전자 기업을 대표적인 저부가 가치 산업으로 불러야 옳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산업을 대표적인 고부가 가치 산업이라 부른다. 왜 그럴까. 전기전자 기업이 저부가 가치 산업으로 표시되는 것은 산업 연관표가 경제의 동태적인 움직임을 나타내지 못하고, 연말 한 시점의 단면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전기전자 기업을 고부가 가치 산업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의 놀라운 성장 속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전기전자 기업의 부가 가치율이 낮아도 총부가 가치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산업의 시장 창출 능력과 시장 확장 능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시장 창출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 세계의 거대한 인구가 3~4년 혹은 2~3년에 한 번씩 휴대전화를 갈아치우게 하는 능력이다. 전기전자 기업에는 이런 거대한 시장 창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고부가 가치 산업이라 불리는 것이다.
내수 경제를 위축시킨 4대 요인
내수에 대해서 저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우리나라의 내수 경제가 어려워진 결정적인 이유로 업종 간 임금 격차를 들었다. 그것이 지난 20년간 지나치게 벌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1990년대 이후 내수 경제를 위축시킨 4대 요인으로 급진적인 개방과 중국의 내수 시장 잠식, 고용 없는 성장, 취약한 사회 안전망을 들고 있다. 급진적인 개방은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내수를 희생하는 정책이다. 저자처럼 수출이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와 별개로 급진적인 개방이 내수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의 선진국 시장 잠식 속도도 놀랍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무역 통계에 따르면 1992년과 2004년 사이 중국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5퍼센트에서 13.8퍼센트로 급등했다. 반면 같은 시기 일본은 18.1퍼센트에서 8.7퍼센트로 급락했다. 중국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이 무서운 속도로 세계 시장을 잠식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 제조업의 황토바람에 한국 중소 제조업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고용 없는 성장이 내수 시장을 위축시킨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것은 좋은 일자리보다 나쁜 일자리만 생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안전망 구축 속도까지 더디면 서민 경제는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서민 경제가 위축되면 이와 연동하여 서비스업도 위축된다. 서비스업의 대부분은 서민 경제에 수요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업 피용자 보수와 영업 잉여 비율 변화
물론 서비스업의 낮은 임금이 서비스업을 더욱더 어렵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비스업 부가 가치 분배 과정에서 기업주들이 임금 지불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임금을 올리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들이 부가 가치 자체의 총량이 늘지 않아서 임금을 올리지 않았는지는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도소매업의 총부가 가치 대비 피용자 보수 비율은 1980년대에는 24퍼센트였으나, 1990년대에는 39퍼센트로 높아졌고, 2000년대에는 47퍼센트로 높아졌다. 반면에 영업 잉여 비율은 1980년대에 72퍼센트였으나, 1990년대에는 56퍼센트로 낮아졌고, 2000년대에는 55퍼센트로 1990년대와 비슷했다. 물론 시기별로 종사자 중 피용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에, 위의 수치들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1990년대 이후 서비스업 임금 정체 현상이 기업주들의 탐욕의 결과라는 결론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서민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음식 숙박업의 경우는 또 어떨까. 역시 같은 자료에 따르면 음식 숙박업의 총부가 가치 대비 피용자 보수 비율은 1980년대에는 56퍼센트였으나, 1990년대에는 60퍼센트로 높아졌고, 2000년대에는 67퍼센트로 높아졌다. 반면에 영업 잉여 비율은 1980년대에 37퍼센트였으나, 1990년대에는 31퍼센트로 낮아졌고, 2000년대 34퍼센트로 1990년대보다 약간 높아졌다. 음식 숙박업에서도 임금의 정체 현상이 기업주들의 탐욕의 결과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물론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내수 경제 위축 요인, 즉 급진적인 개방, 중국의 내수 시장 잠식, 고용 없는 성장, 취약한 사회 안전망의 부작용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최저 임금 인상 요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1990년대와 비교해 볼 때 2000년대 도소매업과 음식 숙박업의 총부가 가치 대비 영업 잉여 비율이 비슷하거나 더 높아졌다는 것은 기업주들의 최저 임금 인상 여력이 꾸준히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비스업 생산성과 임금에 관한 오해
서비스업 생산성과 임금에 관한 저자의 인식은 독특하다. 그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임금이 낮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임금이 낮기 때문에 생산성이 낮은 것으로 측정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의 질, 즉, '실제 서비스 생산성'은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 스위스나 뉴욕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저자가 오해를 한 것이다. 노동의 질과 생산성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돈을 많이 벌면 생산성이 높은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A 지역에서 1년에 1000시간을 일해서 4000만 원을 벌고, B 지역에서 2000시간을 일해 2000만 원을 벌었다고 하자. 이 때 생산성은 냉정하게 나에게 전자가 후자보다 두 배 더 크다고 말해준다.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은 생산성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자는 또 식당의 음식 가격과 택시 요금을 인상하여 종업원과 택시 기사들의 임금을 올리면 '노동 생산성'은 바로 증가한다고 말한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설명이다. 노동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부가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임금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식당의 음식 가격과 택시 요금을 인상하면 식당과 택시의 부가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임금이라는 것은 부가 가치 배분 과정에서 피용자에게 나누어 주는 분배 몫일뿐이다.
주택 건설을 통한 경기 부양, 현실성이 낮다
내수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 그는 가장 부족한 재화가 쾌적한 주택이라고 주장한다. 약 30~40퍼센트에 이르는 무주택자들이 싸고 질 좋은 주택을 간절히 구매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저가의 고품격 주택을 대량 공급하면 내수 경기가 부양된다는 것이다. 파격적인 주장이다. 진보 진영의 대다수 학자들은 주택 보급률이 100퍼센트기 때문에 주택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양쪽 다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먼저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어섰기 때문에 더 이상의 주택 공급이 필요 없다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이런 주장은 두 가지의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이런 주장을 하게 되면 공공 임대 주택 건설을 많이 하라는 주장이 설 자리가 없다. 둘째, 이런 주장을 하게 되면 서울에 거주하는 가구 중 10퍼센트(36만 가구, 100만 명)는 영원히 반지하나 옥탑에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통계 지표 중 가장 오해가 많은 것이 주택 보급률이다. 이것은 주택의 양만을 나타내는 지표일 뿐 주택의 질을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지표를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요즘 전세가가 폭등하는 주요 원인도 고급 주택에 거주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즉 주택의 질 문제가 전세가 폭등의 주요 원인이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임대인의 탐욕 때문에 전세가가 폭등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게 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2006년 이전에는 임대인들이 엄청나게 착했고, 요즘에 갑자기 임대인들이 탐욕스러워졌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오해가 광범하게 퍼져 있는 상황에서 주택 건설을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신선하게 들린다. 그러나 LH공사나 SH공사가 빚더미에 앉아 있고, 또 이들이 부동산 경기 침체로 분양 주택 매각을 통한 임대 주택 재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주택 건설을 통해 경기 부양을 하자는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즉 주택 건설을 통한 경기 부양이 적절한지의 여부를 떠나, 그것을 실현할 재원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1987년식 처방,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또 저자의 주장 중에 인상적인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의 역사를 내수 경제 활성화에 성공한 역사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그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이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소득이 높아진 노동자들이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즉 노동자 대투쟁 이후 마이카 시대가 열려 자동차 생산량이 급증하고 이에 부응하여 전국에 도로, 다리, 터널이 건설되었으며, 주택 수요가 많아져 분당, 일산, 평촌 등에 신도시가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결과로 장기간 호황이 이어졌으며 빈부격차도 줄고 중산층 비중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근로자 임금을 상당 부분 현실화시켜, 자동차 수요와 주택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려 놓았고, 그 결과 건설 투자 확대로 성장률도 상당히 높아졌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의 변화를 그대로 2010년대에 옮겨오자는 주장에는 회의적이다.
나의 주요 관심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끌었던 대기업 노조가 아니다. 20여 년을 공부벌레로 살고도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길거리를 배회하는 20대, 30대 청년층이 나의 주요 관심사다. 이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처럼 임금을 인상하면 이들은 구제할 수 있을까?
나는 1987년식 처방은 그 때는 유효했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본다. 2년 전 나는 민주노총의 물가 토론회에 참석해 물가 인상에 따른 서민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임금 인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재분배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고맙게도 민주노총 간부들은 내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적절한 임금 인상은 필요하다. 특히 최저 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임금 인상이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재분배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대기업 노조가 부자 증세와 소득 재분배에 적극 협조해 준다면 그들의 임금 인상에 동의해 줄 생각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자 증세와 소득 재분배에 무관심하다면 나도 그들의 임금 인상에 관심을 가져 줄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저자와 달리 내수 활성화의 최우선 과제가 임금 인상이 아니라 소득 재분배라고 보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여러 편의 서평을 쓰고 싶은 책
나는 지금까지 박창기의 책, <혁신하라 한국 경제> 중에서 나의 주요 관심사인 '수출과 내수' 부분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저자의 장점은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할 말은 목에 칼이 들어 와도 하는 스타일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좀 더 정책 전문가들과 교류하고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간단치 않은 쟁점을 지나치게 가볍게 다룬 부분도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책은 두고두고 여러 편의 서평을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저자의 시각이 신선하고, 또 경험과 상상력이 풍부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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