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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사랑' 몰두하다 놓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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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사랑' 몰두하다 놓친 건…

[親Book]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한참 아래 후배가 얼마 전부터 밥을 산다고 벼르더니, 기어이 이번 주말엔 만나잔다. 몸살 기운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어 주춤했다. 뭣보다 준 것 없이 얻어먹으려니 적잖이 부담되었다. 섬세한 성격답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기까지 꽤 여러 번의 메시지가 오갔다. 언젠가 가본 곳인데 맛도 좋고 유명한 족발집이라 정했단다. 제법 많은 사람이 번호표를 뽑아들고 기다리는 풍경에 놀라고 있을 즈음, 후배가 연신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안부를 물어왔다. 아마도 기다리는 시간 지루하지 않게 해주려는 마음 씀씀이였을 터이다.

좀 뻔뻔하단 생각이 들었다. 늘 누군가의 배려에 기대 살았다. 불만 가득했던 20대, 만날 때마다 밥을 사주시며 불안을 덮어주던 어른이 계셨다. 투정을 받아주고, 결핍을 채워준 이들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말로는 언젠가 꼭 갚겠다고 했다. 정말 마음은 그러고 싶었다. 하나, 그뿐이다. 지금도 '나중에'만 되뇌고 있다. 아니다. 되레 '받은 건 셈하지 않고', 상처만 두고두고 기억하며 엄살 피운다. 이즈음 되면 덧정 없을 법도 한데 그저 감싼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가끔 나도 괜찮은 사람인 듯 착각에 빠진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이병률 지음, 달 펴냄). ⓒ달

후배를 만나러 가는 길,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이병률 지음, 달 펴냄)를 꺼내 들었다. 몇주 전 사뒀지만, 책장 저편에 미뤄두었더랬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앓이하는 지병이 있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도 뒤숭숭한 늦가을에 사랑, 사람 그리고 여행에 관한 책을 읽는 건 지독한 고문일 게 뻔했다. 하여, 답도 없는 '청승'을 건드리지 말자고 단호하게 결심했었다.

"신이 어떠한 장난을 친대도 사랑을 피할 길은 없다. 그냥도 오고, 닥치기도 하는 것이고, 누구 말대로 교통사고처럼도 오는 것이다. 사랑은, 신이 보내는 신호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게 한다. 그것도 신이 하는 일이다. 죽도록 죽을 것 같아도 사랑은 남아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하더라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자.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끝이다."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형광펜을 찾아 줄을 그었다. 요란하고 드러내길 좋아하는 내 사랑을 생각했다. "그냥도 오고, 교통사고처럼" 예상치 못한 사이, 신의 장난처럼 시작되고 사라진 사랑. 죽을 듯해도 살게 하는 사랑. 이제야 '옆에 없는 사람처럼' 고요하게 사랑하는 방법도 있다는 걸 배운다.

"오래전부터 난 참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목숨이 걸어지지 않는, 일종의 그런 운명 같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할 것 같지 않으며 사랑이 와도 바람만큼만 느끼는 것 같다."

저자의 독백이 마음에 닿았다. 그래, 운명인지도 모른다. 무엇에도 전부를 걸지 못하는 나, 이래서 사랑도, 사람도 안되는 듯하다. 자조 섞인 웃음이 툭 내뱉어졌다. '전부를 걸지 못하면서', '살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좋을 한 사람'을 찾느라, 마음 분주했다. 기다림이 절실할수록 속으로 숨어들었다. 내 안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은 누군가에게 선뜻 자리 내주지 못하면서, 쉴 곳 없다고 투정만 부렸다.

'신의 장난 같은 사랑'에 몰두하다, 너무도 조용해서 알아채지 못한, 또 다른 사랑을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때 되면 모과차를 담가 보내주는 일도, 임부의 몸으로 유기농 매실을 만들었다며 묵직한 병을 들고 나온 친구도, 만날 때마다 책을 몇 권씩 사주신 분도, 맛있는 게 있으면 혼자 먹기 미안하다던 친구도, 분명한 실수에도 눈 질끈 감아준 선배도, 은행잎을 책갈피 하라고 건네주는 이도, 도울 일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라던 사람도, 밥 사주면서도 연신 고맙다 말하던 후배도, 싱거운 농담에도 맞장구 쳐주는 일도, 모두 당연한 거라 여겼다. 허술한 삶을 풍요롭게 채워주고 있다는 걸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가' 보다. 생각 끝에 나 역시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나 같은 속물은, 어찌 살아가란 말인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게 가장 두려울 것 같았다"고 저자는 말했다. 하여, 실명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했다. 나는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한 채 삶이 끝나 버릴까 봐 겁난다. 언제나 '나중'을 말하지만, 정작 '다음'은 오지 않을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바람 불어도 괜찮다. 얼마 남지 않은 잎이 지고, 눈이 내려도 견딜 수 있을 듯하다. 이 괜찮음이 당신들의 고요한 사랑과 배려 때문이라고 언제쯤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이병률의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다 보면, 사소하게 스쳐 지난 인연과 소리 없이 거친 삶을 덮어준 이들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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