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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시간 춤추고 '권총' 꺼내든 남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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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시간 춤추고 '권총' 꺼내든 남녀, 왜?

[김용언의 '잠 도둑'] 호레이스 맥코이의 <그들은 말을 쏘았다>

호레이스 맥코이의 하드보일드 중편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아미티지 트레일의 <스카페이스>와 함께 한 권의 책에 실려 있다. 서점에서 이 책을 찾을 때는 <스카페이스>(정탄 옮김, 끌림 펴냄)로만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가 요망된다. 장담하건대, 그렇게 주의를 기울여 찾아 일독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1935년 할리우드, 대공황 한복판.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같은 위대한 영화감독을 꿈꾸는 로버트와 마거릿 설리반 같은 배우의 삶을 동경하는 글로리아가 우연히 만나 의기투합한다. 글로리아는 텍사스, 로버트는 아칸소에서 왔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돈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 돈도 없고 엑스트라 일자리 경쟁도 치열한 마당에, 두 사람은 상금 1000달러의 유혹에 넘어가 댄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댄스 마라톤의 규칙은 간단했다. 1시간 50분 동안 춤을 추고, 10분간 휴식을 취하되 휴식 중 원하면 잠을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10분 동안 면도와 목욕, 혹은 발 마사지 등 필요한 일까지 다 해야 했다. 첫 주가 가장 힘들었다.(…) 결국 144개의 팀이 참가했던 경기에서 첫 주 만에 61팀이 탈락했다.(…) 생존의 관건은 10분간의 휴식을 얼마나 완벽하게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면도를 하면서 샌드위치 먹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거나 발을 마사지하면서 음식 먹기, 춤을 추면서 신문 보기, 파트너 중에서 한 명이 춤을 출 때 그 어깨에 기대어 잠자는 방법 따위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의 배경인 댄스 마라톤 대회는 매우 뛰어난 비유다. 실제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미국 전역에서 유행했던 이 어이없는 대회의 성격은 처음엔 비교적 가벼운 게임이거나, 혹은 자선을 목적으로 한 이벤트였을지도 모르겠으나 1930년대만큼은 좀 달랐다. 처절한 가난에 시달리던 이들은 히치하이킹을 해서라도 꾸역꾸역 전국의 댄스 마라톤 대회를 쫓아다녔다. 상금 1000달러를 못 타더라도, 탈락할 때까지 무료 숙식이 제공되기 때문에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참가하는 로버트와 글로리아 같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특별한 시공간에만 가능했을 법한 이 협소한 사건은, 놀랍게도 대공황 시절에 존재했을 법한 극도의 무력감과 양극화가 지루할 정도로 오래 지속되는 현재 한국 곳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우주의 보편성을 띠고 있다.

▲ <스카페이스>(아미티지 트레일 지음, 정탄 옮김, 끌림 펴냄). ⓒ끌림

댄스 마라톤 대회에서는 무시무시한 생존 경쟁이 벌어진다. 라디오와 오케스트라가 번갈아 꽥꽥거리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음악들을 쏟아내어 귀를 마비시키고, 그 와중에 진행자와 심판은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야 하는 참가자들이 잠을 이기지 못하고 고꾸라지면 "계속, 계속 움직여"라고 명령하거나 그들을 플로어에서 끌어내거나 인정사정없이 뺨을 때리고 혹은 코밑에 암모니아를 갖다대고 그도 아니면 얼음수조에 처넣어서 잠을 깨운다. 임신 4개월인 한 참가자는 뱃속의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800시간 가까이 춤을 춘다. 다시 말해 임신이나 생리 같은 신체적 한계는 뜻하지 않은 장애물 취급을 받는다.

그 와중에 지역 상점들은 맘에 드는 참가자들에게 상점 이름을 크게 써 붙인 새 옷과 구두를 지급한다. "데이지 꽃처럼 생생"하다고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인 흥정과 함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반미치광이가 되어가는 참가자들은 살아있는 광고판이 되어야한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댄스홀 관객석에 앉아 마치 투우 경기를 보는 것처럼 자신의 흥분을 즉각적으로 발산하고, 몇 푼 동전을 던져주면서 참가자들이 끊임없이 목숨을 담보로 생존과의 내기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1930년대 댄스 마라톤의 실제 모습은 이 기록영상에 담겨있다. ☞바로가기 혹은 1969년 시드니 폴락 감독이 제인 폰다를 기용하여 만든 동명의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도 구해볼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 속에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1000달러에 전의를 불태우며 기를 쓰고 경쟁의 규칙에 순종한다. "일주일에 삼십 달러를 벌어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과 차와 라디오를 사야 하는, 늘 수금원에게 쫓겨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영화 찍을 몽상(그 비참한 삶이 바로 자신의 삶인데도, 자신이 마치 그런 상황에 속하지 않았다는 판타지에 머무르려 한다)에만 잠겨 있던 로버트조차 "내가 이토록 성공하려고 몸부림치는지 몰랐어"라고 고백할 정도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예외다.

글로리아는 고향에서는 이모부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고, 도망친 인근 마을에선 굶어죽지 않으려고 차라리 도둑으로 잡혀 철창 신세를 지려 했지만 경찰들이 오히려 그녀를 동정하여 놓아주자 "시청 모퉁이에서 핫도그 가게를 하는 시리아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으며, 그 남자에게 매춘을 강요당하자 죽지 않을 만큼만 독약을 먹어버렸다. 그리고 병원에서 본 잡지에서 배우들의 화보를 본 다음 무작정 할리우드에 왔지만, 이 초라한 시골 아가씨의 꿈을 이뤄줄 거물급들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사는 데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왜 죽는 데는 관심이 없는지 몰라. 왜 그 잘난 과학자 양반들은 더 오래 사는 방법에만 목을 매고 기분 좋게 죽는 방법은 알아내려고 하지 않는 걸까? 이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 그러니까 죽고는 싶은데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말이야."

글로리아는 "내가 계속 실패자로 남아 있는 한, 난 누구든 성공한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질투할 거"라고 했다. 그녀가 사막 위에 세워진 신기루 같은 공간 할리우드에 머무는 한,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만 오아시스처럼 반짝이는 그 공간에서 그녀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고 패배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 "사는 건 지겹고, 죽는 건 무서워." 글로리아는 대회 내내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댄스 마라톤이 마침내 끝났을 때, 원하던 상금은 아니라도 어쨌든 당장 며칠 동안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돈을 쥐었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무도회장에서 아무 의미 없는 동작을 몇 백 시간 되풀이하고 그녀가 지쳐 나가떨어지는가 아닌가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수많은 이들의 눈초리 속에서, 글로리아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딱 이래왔음을 깨닫는다. "전문가 한 분이 날 놀리고 있으니까. 신이 날 놀리고 있잖아…." 그리고 글로리아는 결심한다. 더 이상 신이 나를 구경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앞으로 어쩔 거야?" 이윽고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딱히 할 건 없어. 내일 맥스웰 씨를 만나러 갈까 생각 중이야. 어쩌면 그 사람한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한테 분명 관심을 보였거든."
"언제나 내일이구나." 그녀가 말했다. "큰 기회는 언제나 내일 찾아오지."
(…) "너는 뭘 할 거야?" 내가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이놈의 어지러운 회전목마에서 내려야지." 그녀가 대답했다. "구역질나는 짓거리는 이제 끝이야."
"짓거리라니?"
"사는 거."


로버트는 글로리아가 간절히 원하는 대로, 그녀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이것은 스포일러가 아니다. 소설 첫 장에서부터 이 사실은 밝혀진다. 그리고 글로리아는 죽는 바로 그 순간,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얼마 전까지 생면부지의 타인이었고, 몸을 밀착한 채 며칠 내내 춤을 출 때는 서로를 증오하다시피 했던 로버트와 글로리아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가장 친밀해졌다. 그들은 서로의 유일한 친구였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폭력과 실현 불가능한 꿈과 일찌감치 생존의 대열에서 밀려난 처지를 깨닫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삶과 타협하기를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퍽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인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려다가 살인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김재성 옮김, 뮤진트리 펴냄)가 지적하듯, 1930년대 처음 등장한 하드보일드 소설은 19세기까지 미국 소설을 철저하게 지배해왔던 '여성적' 감상성이 터프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남성적' 비정함으로 간단하게 대치되어버린 종류의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실패한 감정적 유대 맺기를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 같은 잃어버린 감상성을 간절하게 희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듯한 위로, 사랑과 연민 같은 감정들.

<그들은 말을 쏘았다>가 등장하기 1년 전인 1934년, 대표적인 범죄소설 작가 제임스 M. 케인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이만식 옮김, 민음사 펴냄)를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돈을 쥔 자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던 두 남녀가 살인을 통해 자유와 새로운 사랑도 얻겠다는 정념에 휘말리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호레이스 맥코이는 이같은 구조를 더한층 밀어붙여, 대공황이라는 토대가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고 믿어지는 통념)을 얼마나 끔찍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 그 안에서 아무리 이전투구를 벌이더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생의 덫이 존재한다는 것을 폭로했다. "그녀를 위해서였"다는 로버트의 자백은 아무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엄청 친절한 놈이지?"라는 비웃음만 당할 뿐이다. 로버트와 글로리아가 나누었던 공감은 타인에겐 이해받지 못한다.

한 순간의 진정한 공감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고, 미국은 그 이후 5년이 지나서야 대공황의 터널을 벗어난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다시금 활황기를 맞이하며 세계 유일무이의 강대국으로 자리를 굳힌다. 누군가의 목숨을 통해서야만 유지되는 끔찍한 자본주의의 규칙이 제 궤도에 오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말을 쏘았다.

참고로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 Horses, Don't They?)'라는 제목의 뜻은 소설의 가장 마지막 줄에 비로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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