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을 왜 샀나요? 사놓고 내버려 둔 이유는요? '프레시안 books'는 '사놓고 읽지 않은(못한) 책'이란 주제로 열두 명의 필자에게 글을 청했습니다. 책등만 닳도록 봐 온 책에 대한 필자들의 추억과 항변은 각각의 '자서전'이나 '독서론'이 되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이 더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
한동안 책꽂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장정일 삼국지>(장정일 지음, 김영사 펴냄)를 이제는 미련 없이 내다 버리기로 했다. 기증하지도 않을 것이다. 반드시 내손으로 버릴 것이다.
아마 작년 아니면 재작년 어느 날 새벽이었을 것이다. 트위터에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잡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잡담은 돌고 돌아서 책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어느 영화 잡지의 여기자가 트위터에 자신은 <삼국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을 올리면서 나의 '힐링캠프'는 시작되었다. 나는 바로 나 역시 <삼국지>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다는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바로 뇌과학자 친구가 비슷한 내용의 글로 응답했다. 이어서 어느 가수도 맞장구를 치는 글을 올렸다. 그 여기자는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삼국지>를 성토하는 것은 처음 본다면서 상기된 글을 올렸다. 그 날 새벽 이들의 글을 통해서 나의 오래된 '삼국지 트라우마'가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키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이 마땅히 읽어야할 책들이 있었다. <이솝 우화집>(이솝 지음, 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이나 <탈무드>(이동민 옮김, 인디북 펴냄)가 바로 그런 종류의 책들이었다.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고 싶었던 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큰 고통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따위 책들을 도대체 왜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재미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혜로운 책이라고 권했지만 나는 이들 책 속에서 지혜로움보다는 교활함이 더 많이 보여서 안타까웠고 싫었다. 결말에 대한 나의 솔직한 심정을 엄마, 아빠나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의견을 묻기도 했지만 별다른 호응도 성과도 없었다. 나는 입을 닫고 어른들에게 더 이상 진지한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솝 우화집>이나 <탈무드>를 읽은 척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독서 대회 같은 데 나가려면 이런 책들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책의 내용이나 결말은 사실 좀 뻔했기 때문에 읽지 않고도 둘러댈 수 있었다. 내 생각과 조금 다른 결론을 내리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티를 내지 않고도 그럭저럭 순간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국지>는 좀 당혹스러웠다. 처음 만났던 <삼국지>는 분명 어린이용 축약본이었을 터인데도 일단 내용이 복잡해 보였다. 더 심각한 것은 겨우 몇 쪽만 넘겼을 뿐인데도 정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 책을 읽으면 지혜를 얻기는커녕 눈만 버리겠다 싶었다.
물론 초등학교 아이가 이런 식의 표현을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뜻을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삼국지>는 읽지 않고 읽은 척 넘겨짚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그래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주변에서 주워들은 사람 이름 몇 명 외우면서 읽은 척 슬그머니 넘어갈 수 있었다.
▲ <삼국지>(장정일 지음, 김영사 펴냄). ⓒ김영사 |
청소년기 남자들 사이에서 <삼국지>에 대해서 영웅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그 상황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큰마음을 먹고 친하게 지내던 몇몇 선생님과 친구들한테 나는 <삼국지>를 좋아하지도 않고 읽어보지도 않았고 읽을 생각도 없다고 은밀하고 진지하게 고백을 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나는 <삼국지>도 읽지 않은 엉터리 문학청년으로 몰렸다. 거의 예외 없이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상을 지혜롭게 잘 살아가려면 지금이라도 <삼국지>를 제대로 읽으라고 충고를 했다. 믿었던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나는 좌절했다. 자괴감이 깊어지는 만큼 <삼국지>를 둘러싼 나의 이중생활은 더욱 더 교활해져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국지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겼다. <삼국지>가 떠오를 때마다 모두들 나를 비웃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삼국지>를 털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꾹 참고 읽어버리기로 결심을 했다. 첫 시도의 상대는 언제부터인가 집에 굴러다니고 있던 박종화의 <삼국지>(나관중 지음, 박종화 옮김, 달궁 펴냄)였다. 하지만 내 기억에 스무 쪽을 채 넘기지 못하고 책 읽기를 멈추고 말았던 것 같았다.
이번에는 단순한 재미의 문제도 가치관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삼국지>를 읽어야 하는 상황과 그런 짓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분노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증폭되곤 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몇 장은 화를 못 참고 찢어버리기도 했다. 시간을 두고 이어진 몇 차례의 박종화 <삼국지> 독서 도전은 늘 허무하게 상기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마감을 했다.
세월이 좀 흐른 후, 이문열의 <삼국지>(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민음사 펴냄)에 도전했다. 내키지 않는 작가의 책이었지만 오로지 <삼국지>를 읽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읽기 시작했다. 낡은 박종화의 <삼국지> 보다는 더 잘 읽힐 줄 알았다. 하지만 <삼국지>에 대한 좌절과 이문열 작가에 대한 혐오만 더 키운 채, 첫 번째 책 스무 쪽을 넘기지 못하고 싱겁게 실패하고 말았다. <삼국지>에 대한 편견만 더 키운 꼴이 되었다. 절친한 고등학교 친구는 이 무렵 다시 이문열의 <삼국지>를 들먹거리면서 불쌍한 나를 계몽시키겠다는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고 나는 그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다짐을 하면서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삼국지> 읽기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었고 '삼국지 트라우마'는 커져만 갔다.
또 세월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읽지 않은 삼국지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황석영의 <삼국지>(나관중 지음, 왕훙시 그림, 황석영 옮김, 창비 펴냄)를 읽었는데 감동 그 자체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던 내가 생각났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읽었던 황석영 <삼국지> 전집 중 몇 권을 들고 온 것이었다. 일단 몇 권을 빌려주겠다고 내가 다 읽고 나면 나머지도 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받아는 뒀지만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겼고 황석영의 <삼국지> 몇 권만 덩그러니 내 책꽂이에 남게 되었다. 오다가다 자꾸 마주치다보니 다시 도전해 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번에는 무작위로 한 권을 골라서 그저 펼쳐지는 곳부터 읽기 시작해 봤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스무 쪽을 넘기지 못하는 실패였다.
한번은 어떤 책을 주문했는데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애니북스 펴냄) CD가 운명처럼 덤으로 같이 따라 왔다. 판촉용 보너스 선물이었다. 만화로 보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만화의 힘은 강력했다. 하지만 그저 그림 보느라 조금 더 진척이 있었을 뿐이었다. 의미 있는 독서에는 또 실패를 하고 말았다.
내가 돈을 내고 자발적으로 구매한 첫 번째 <삼국지>는 장정일의 <삼국지>였다. 우선 장정일이라는 작가에 대한 신뢰가 큰 작용을 했다. 무언가 관점이 다른 <삼국지>를 써 놓았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장정일이야말로 '삼국지 트라우마'로부터 나를 구해줄 구원자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구입해 두고서도 한참을 참았다. 좀 더 묵힌 다음 읽고 싶은 욕구가 극에 다했을 때 읽으려는 의도였다. 이번에야말로 <삼국지>를 정복하고야말겠다는 비장한 결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 순간 책을 들었다. 하지만 기대가 사라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정일에 대한 신뢰가 책을 놓지 않고 다른 <삼국지> 보다 조금 더 나아간 오십여 쪽까지 나를 끌고 갔을 뿐이었다. 또 실패였다. 장정일에 대한 신뢰도 '삼국지 트라우마'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날 새벽의 트위터 잡담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하게 지내는 도서평론가와 <삼국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삼국지>에 대한 그의 평가가 나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는 눈물이 찔끔했다. 또 한 명의 동지를 얻은 것 같았다. <삼국지>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쓴 그의 에세이는 트위터 친구들의 <삼국지> 질타와 함께 나의 오래된 '삼국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로 나는 심지어 '독서와 토론' 같은 재목을 단 수업에서도 당당하게 나만의 <삼국지>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삼국지> 타령을 하는 오십 줄에 다가 선 고등학교 친구들에게는 <삼국지> 커밍아웃을 하고 산다. 아마 내가 다시 <삼국지>를 손에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배명훈 작가나 황정은 작가가 <삼국지>를 쓴다면 호기심에 또는 예의상 백 쪽 정도는 읽어볼 정도의 미련은 있다.
한동안 책꽂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장정일의 <삼국지>를 이제는 미련 없이 내다 버리기로 했다. 기증하지도 않을 것이다. 반드시 내손으로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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