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을 왜 샀나요? 사놓고 내버려 둔 이유는요? '프레시안 books'는 '사놓고 읽지 않은(못한) 책'이란 주제로 열두 명의 필자에게 글을 청했습니다. 책등만 닳도록 봐 온 책에 대한 필자들의 추억과 항변은 각각의 '자서전'이나 '독서론'이 되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이 더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
사놓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은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글은 사놓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변명인 셈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가 무슨 대단한 서평꾼이나 글쟁이도 아니고, '내가 '산 책'에 그리 대단한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러면 이번 호를 채우고 있을 나머지 분들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장문의 글을 써낼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이나 써낼 수 있다면 어째서 그게 '읽지 않은 책'이란 말인가. 사실은 너무나 잘 알아서 딱히 펼쳐볼 일조차 없는 책들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들여다본다. 많은 책들이 보인다. 아니, 대부분이다. 그렇다. 사실은 읽은 책이 별로 없다. 시간을 되돌려본다. 그러니까 내가 '나만의 책장'이란 걸 갖게 된 건 최저임금보다 많은 월급을 받는 생활을 하고 나서 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은 숙제를 위한 교재나 리포트를 위한 참고 도서뿐이었다. 이런 책들은 사실 돈을 주고 사기가 너무 아깝지만(예를 들어 양장이라 2만원에 가까운 돈을 주고 사야했던 무려 '목회상담학' 교재였던 스캇펙의 책들이라거나) 도서관에서는 언제나 '대출 중'이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서울 몇 군데 공공도서관을 이용했는데, 제때 반납을 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차라리 구입을 했다. 한편 헌책방을 순례하며 '누런 책'을 모으기도 했는데, 그러나 이내 그런 책들은 사놓아봤자 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른 변명거리를 찾는다. 내 경우는 '동아리 방'이었다.
사실 각 전공마다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의 계보를 뽑아볼 수 있겠다. 나는 신학과라서 헌책방에서 사놓고 보지 않은 누런 책들 중에는 주로 민중신학과 해방신학과 관련된 책이 제법 많았다. (참고로 나는 03학번이다) 내가 더 이상 그것들을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던 4학년 때 나는 그 책을 '여성신학 동아리방 책장'에 모두 옮겨놓았다. (한마디로 더 이상 저런 책을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취업… 그러니까 먹고 살 생각을 4학년이 되서야 한 것이다.)
동아리방에 꽂아놓은 책은 이런 것들이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교회 자료집, 여성학, 여성신학……. 나는 그 책들을 거의 들춰보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그 책들을 왜 샀는지 동아리방에 죽치고 누워 생각해보려 노력했다. 폼이나 허세라고 우기기에도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급진적인 천주교 여성신학자인 메리 데일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황혜숙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펴냄), <교회와 제2의 성>(황혜숙 옮김, 여성신문사 펴냄)은 아마 제목이 멋있어서 샀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내 손에 들려있던 것은 여성신학자 현경의 대중서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1·2권, 열림원 펴냄)였다. 세계 진보신학의 명문이라는 유니온대의 아시아 최초 종신 교수가 되기 위한 면접 때 그녀가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당신은 교수를 하기에 너무 아름답다"는 내용이 실렸던 잡지가 있었다.
거의 펼쳐보지 않은 그 책들 중 유난히 각별했던 건 <여성신학 사전>이다. 원래 이런 책은 보라고 사는 게 아니라지만, 그래도 정말 언젠가는 볼 줄 알았다. 여성신학 따위 공부하지 않아도, 그래도 '사전'인데 살다보면 참고할 일 한번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결국 몇 번 읽어보려 애를 썼으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제목과 달리(?) 심할 정도로 아시아 여성신학자에 대한 부분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아시아에서는 여성신학자가 적다는 뜻이었고, 미개척지에 뛰어들면 말뚝 하나는 박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신입생 돋는' 낭만의 시절이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책을 사던 때의 이야기다.
결국 이 책의 말로는 '도난'이었다. 동아리 방에 책을 기증하면서 과연 명패와 책 중에 어떤 게 오래갈까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이 오지 않는 동아리였지만 내가 가져다 놓은 책들 중에는 신학생이라면 제법 탐낼만한 책이 없지는 않았다. 이 책을 비롯한 깨끗한 책들만 싹 사라진 그 날, 나는 A4용지에 가득히 편지를 써서 학과 로비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마지막 문장. "부디 그 책들을 헌책방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나는 그 책들과, 여성신학과 이별했다.
▲ <그리스도교>(한스 큉 지음,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 ⓒ분도출판사 |
한스 큉은 스위스 출신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튀빙겐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신학자다. 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탁월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1979년 가톨릭교회의 전통 교리에 대한 비판이 파문을 일으켜 바티칸으로부터 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가톨릭 주류 신학에 대한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후 초교파 운동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2년에 나온 이 책은 진보적인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살펴볼만한,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또는 기독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하고 싶은 평신도나 신학과 학회 세미나용 교재로도 추천될만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내 책장에서는 신학 책들 사이에 있기 보다는 <자본론>과 숲 출판사의 고전들이 있는 칸에 자리를 잡고 있다. 두꺼우나 절대 읽지 않은, 어느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집에서 가장 눈에 잘 띄어 인테리어 효과'가 가득한 책들이 모여 있는 자리이다. 남동생 역시 같은 학교 신학과에 입학했기 때문에 한스 큉의 책은 동생 방으로 옮겨졌으나 역시 읽혀지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아무리 읽지 않은 책이라도 설명은 해야 하니까) 책을 찾았으나 없다! 나는 결국 글을 쓰다말고 이 책을 주문한다. 출고까지 4일이 걸리지만 다행히도 품절 상태는 아니다. 오, 위대한 온라인 서점이여! 도대체 온라인 서점이 없던 시절에는 절판도서 확인과 도서 데이터베이스는 어디서 확인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 글은 그러니까 의미가 있다.
전공과목과 관련 있어 '보이나' 절대 읽지 않는 책 1위는 사실 따로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맞춰보시라! 거의 모든 인문학 관련 과목과 많은 사립대학의 필수 수업의 교재인 그 책! 이 책은 주로 '책'으로 취급되지 않는데, 필요에 따라 펼쳐보는 경우도 많지 않고, 주로 다른 목적으로만 읽히고는 한다. 이 책은 '독서가'들에게는 독서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반대로 이 책을 몇 번씩 완독해내는 것에 모든 힘을 쏟는 사람들도 있다. 그나마 의식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의 상황은 좀 나은 편인데, 좀 더 뭔가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주로 구매하는 '공동번역성서'나 '표준새번역' 쯤으로 가면 사놓고 잘 보지 않게 된다. (아, 나만 그럴지도 모른다.) 일단 동일한 텍스트 판본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쓸모가 줄고, 아무리 현대 상황에 맞추어 대폭 수정되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쾌락적 독서가 어려운 텍스트인데다가, 사실 분량이 만만치 않다.
나 역시도 위에 말한 버전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는데 쳐다볼 때마다 찝찝함을 버릴 수가 없다. 급기야 책상 아래 책꽂이로 치워버렸다가 화장실 변기 옆에 두었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걸 버리는 건 더 찝찝한 일이라, 언젠가 강제로 읽어야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란 역시 어떤 욕망의 투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되고 싶은 것, 추구하고 싶은 것, 그러나 지금 현실에서 막연한 것들의 상징인 그 책들을 우리는 사고, 버리지 못한다. 신학과에 들어가 허세 가득한 마음으로 좋아한 여성신학, 수업보다 더 재밌던 진보 기독교 담론에 관한 책들은 결국 사놓고 별로 읽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폼이었던 거다. 그 중에는 아직도 내 책장을 지키는 책들이 있고, 나와 이별한 책들도 있다. 매일 늦게까지 야근하던 직장에 다닐 때는 매주 MP3로 올라오는 인문학 강의 파일을 듣고 또 들었었다. 회사에서 나오는 문화 지원비를 연말에 모두 모아 추천 도서를 구매했었는데, 아직도 책장 한쪽을 차지하고'만' 있다.
읽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사 날랐던 또 다른 종류의 책들은 출판과 관련된 책들이었는데, 정말 출판사에 취업을 하게 되자 출판과 관련된 책들을 사기를 멈추었다. <편집자란 무엇인가>(김학원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는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펼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아직까지 마지막 챕터 즈음에 책날개가 접혀있다) 때때로 너무나 갖고 싶은 것들을, 그것에 대한 욕망을 확인하는 일이 두려워 책을 피하기도 한다. 편집자가 되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던 그때는 편집자 교과서라는 그 책을 펼쳐 무엇하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읽어버린 책은 미련 없이 주변에 잘 줘버리는 편이라 내 책장은 이제 읽지 않은 책들이 가득 차 있다. 대학생 시절까지 내 책장은 빌려 읽어본 뒤에 너무나 괜찮아서 구매한 책이 대부분이었다. "집에 읽지 않은 책이 가득한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월급을 받아 열심히 책을 사 나르고, 직업상 공짜 책을 종종 '득템'하는 인생을 살다보니 나 역시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지금부터 읽기 시작해도 죽기 전까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많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책들 사이에 끼인 난 그저 둘 데가 없는 이 책을 어서 읽어 치우고 주고 팔고 버리는 분리수거기가 될 뿐이다.
한 사람의 책장에는 그래서 인생이 담긴다. 포기한 것, 갖고 싶은 것, 한 때 추구했던 것, 외면하고 싶은 것, 마음을 다잡아주었던 것, 울림이 있었던 것, 필요했던 것, 그 모든 것이 책장에는 담겨있다. 나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면 그 사람의 책장부터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먹고 사는 일이 이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는 것도 책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책장을 들여다보면 내밀하게도 그 사람을 들여다 본 것만 같다. 내가 아는 책들, 책을 정리한 습관 등을 들여다보면 환희를 느낀다. '책 덕후'의 오르가슴이라고나 할까?
책장에는 오늘도 읽지 않은 책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또 온라인 서점을 뒤진다. 책장에 'Ctrl+F'가 가능했으면 좋겠다. 내가 그 책을 샀었나? 카드 대금은 언제 빠져나가나? 저 책들은 품절되기 전에 한 권이라도 더 구매해야 하는데, Oh, jesus!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