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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소련·'복지 천국' 스웨덴, 뿌리는 같다?

[다른 '사회'를 발명하라]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강연

2008년 말부터 조금씩 볼륨을 키워 온 자본주의의 파열음이 보수적 경제학자·관료의 입에서도 메아리 칠 정도로 커졌다. 수많은 광장에서 유례없는 봉기가 일어나 이 파열음에 화답했지만 '자본주의 이후'를 내다보게 하는 조직적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지금 이곳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무덤 파는 이들"이라 기대됐던 이들조차 위기라는 진단 속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주의'는 오랫동안, 일부에겐 금기어 일부에겐 그저 이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새로운 사회의 재구성을 위해 돌아가야 할 자리는 아마 그곳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한반도의 특수한 사정과 결합된 특정한 연상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전에 경험한 적 없는 사회주의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이자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인 장석준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가시적인 실체로 나타나는가. 오랫동안 우리는 그것을 '국가'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기업의 횡포에 맞서 국유화가 답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장석준에 따르면 '국가 사회주의'를 벗어나는 가능성이 존재하며, 우리는 거기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이미 100년도 더 전에 누군가 그 길을 걸었으며, 역사책이란 분명한 증거를 남겨 놓았다고 한다.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상상력과 용기를 위해, 장석준은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G. D. H. 콜 지음, 김철수 옮김, 장석준 감수, 책세상 펴냄)를 힌트로 제시한다.

이 책은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발한, 근대적 의미의 노동자가 최초로 탄생한, 그래서 그 운동사 역시 세계에서 가장 긴 영국의 사례를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던 콜의 눈으로 집중 조명한다. 본문만 600쪽 이상인 방대한 양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의 곡절이 지금 정체에 빠져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진보 진영에 던지는 질문이 무겁기에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기업별·산별 노조를 뛰어넘는 형태의 노조는 어떻게 가능할까. 왜 우리의 노동운동은 협동조합운동, 정치운동과 만나지 못하고 '노동조합 운동'에 그쳐 왔을까.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프레시안 books'는 이 책의 감수자인 장석준 그리고 스무 명의 독자들과 함께 이 책을 '미리 읽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달 24일과 31일 양일 총 5시간에 걸쳐 진행된 장석준의 영국 노동 운동사 강연을 지면 중계한다. 분량은 길지만, 모든 이슈가 '대선'에 빨려드는 현재, 결국 중요한 것은 대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만들어나가야 할 새로운 사회라는 사실에 공감하는 독자에게는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편집자>


지금 왜 영국 노동운동사를 읽는가?

▲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조지 더글러스 하워드 콜 지음, 김철수 옮김, 장석준 감수, 책세상 펴냄). ⓒ책세상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가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1980년의 일입니다. 시절이 시절이다보니 운동하는 심정 아니었으면 내기 힘든 책이었지요. 이 발행 연도는 신군부의 집권과 광주항쟁이 일어난 해와도 일치합니다. 광주를 목격한 노동운동 세력에게도 이념적 무기가 절실해졌던 때였지요. 그로부터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운동 일선에서 다시 '사회주의'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한국의 운동권들은 이론적으로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를 주로 따르면서 거기서 벗어나 있는 사상들은 주변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책도 잊혔습니다.

2012년, 이 책을 다시 펴낸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요. 2008년 말부터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데, 그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노동운동 역시 자본주의와 함께 위기에 빠진 답답한 상황이죠. 그런 차원에서, 지구상에서 노동운동의 역사가 가장 긴 나라인 영국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노동자가 이 나라에서 처음 등장했으니까요. 그 역사가 길고, 드라마틱한 국면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를 시발점으로 해서 세계는 신자유주의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그 압박을 고스란히 떠안은 민중들이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아큐파이(Occupy) 운동을 벌였습니다. 우리 삶을 우리 것으로 되찾겠다는 의미죠. 이 운동은 도시 중심의 광장을 점거해 무기한 농성을 벌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과연 광장을 점거한다고 자본주의가 '점령' 될까요? 전 이 운동의 출발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어떤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점령할 게 있는데 아직 점령하지 못 한 거죠.

리처드 울프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점령이 '아큐파이 프로덕션(Production)'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가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현장인 생산의 현장을 점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수행하는 조직은 무엇이죠? 기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어떻게 점령할 것인가 입니다. 또, 그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겠지요. 커다란 숙제입니다.

예전엔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던 정답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유화입니다. 노동 계급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대자본을 가진 기업을 점거해 국가의 것으로 만든다는 시나리오입니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지요.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다시피 이 시나리오가 실현된 곳도 있지만 대체로 그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자본가가 앉아있던 자리에 당에서 임명한 사장이 앉는 것으로 바뀐 정도라고 할까요. 이게 과연 현재 우리의 핵심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장석준. ⓒ프레시안(최형락)

국가 사회주의라는 노선

오늘 이야기하려는 G. D. H. 콜(1889~1959)의 사상이 우리에게 힌트를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콜은 단순히 운동사의 서술가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국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가이자 운동가이기 때문에, 책의 어조나 문체가 그다지 태평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 삶을 살펴보는 것은 책 자체의 파악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길드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했고, 길드 사회주의의 이룩을 평생의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100년 전부터 논의된 사상이지만 우리에겐 생소합니다. 길드 사회주의는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어렵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하죠. 자본주의는 무엇이 주인 되는 사회인가요? 자본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인은 어떤 가시적인 조직체로 나타나죠? 기업과 은행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경우, 그 요체를 '사회'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실체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국가'는 100년 이상 넘게 이어진 전가의 보도 같은 정답이었습니다. 국가는 기업이나 은행처럼 너무나 뚜렷하게 체감되는 조직체이지요. 남자 분들이라면 병역 통지서를 받고 그것을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웃음)

그런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궁극적으로 이뤄야 할 사회에 대해 뭐라고 표현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었습니다. 실제로 깊이 들어가면 국가를 시민 사회의 대안으로 내세웠던 헤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는 게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국가는 '사회'에 의해 다시 흡수되고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측면이 더 많은 무엇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런 이야기도 하죠. 노동자 계급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국가 권력을 먼저 장악해야 한다고요.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종합되어 있는 게 마르크스 이론의 특징이고, 사람들은 이걸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사회주의를 꿈꾸면서도 자본을 대체할 실체적 조직을 떠올리는 데 모호함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정돈된 교과서처럼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 그들의 사상이 다른 사회주의 사상에 비해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보편적인 사상으로 정착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 후계자들이 노동운동과 좌파 정당 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편향입니다. 국가를 극복한, 국가 없는 인민들의 연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상은 책 안에 남아있게 되고, 실제 역사에서 마주친 것은 거의 다 '국가=사회주의'였던 것이죠.

이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 하나는 현실사회주의 노선입니다. 전자는 이른바 보통선거 제도를 쟁취한 노동자들이 선거에 참여하고, 그를 통해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사회를 대변'해 자본을 압박하는 시나리오로 나타납니다. 다른 하나는 보다 강력합니다. 혁명이란 방식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기존의 국가기구를 분쇄해버리고 새로운 국가기구를 건설하죠. 필연적으로 폭력이 수반됩니다. 역사 속에서 소련과 중국이 갔던 노선이지요.

위의 두 흐름은 실제론 굉장히 다르지만, 한 가지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야기했던 자리로 돌아가 보자면, 그것은 '국가'를 통해 '사회'라는 것에 접근하려 했던 점이지요. 사회 그 자체가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국가를 통해 발언하게 된다는 점에서 같다는 얘기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20세기를 지배했던 사회주의는 국가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의 '사회'가 곧 국가라는, 등치 관계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에 따른 실천들은 엄청난 한계를 노출시켰습니다. 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전자, 즉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곳에서는 복지 국가를 만드는 성과를 이뤄내긴 했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를 극복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근본적인 성찰과 재출발이 요구됩니다. 과연 국가가 오롯이 사회를 대변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윌리엄 모리스의 힌트

▲ 윌리엄 모리스. ⓒwww.marxists.org/archive
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중요한 인물을 짚고 넘어갑시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도 영향을 준 인물, 영국의 공예가이자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1834~1896)입니다. 모리스는 사실 사회주의자가 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직접 공방을 운영하는 자본가였으니까요. 그는 존 러스킨 같은 미학자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중세의 장인들이 공들여 만든 수공업 작품들이야말로 진정한 미를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게 사라지고 없는가', '어째서 당시의 노동이 지금은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이 타들어가는 과정에서 부딪힌 문제가 당시 그가 살고 있던 영국의 산업 자본주의였던 겁니다. 그는 그가 '미'라고 상정한 세계를 대중들이 향유하게 되려면 반드시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되어간, 독특한 사람입니다.

당시(1880년대) 영국에는 사회주의자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 유명한 디자이너이자 중소기업의 사장이나 되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지요. 그리고 그는 단순히 이슈만 되었던 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세계에 들어와 독창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기 시작합니다. 모리스가 왜 예술가에서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삶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100년 후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파머 톰슨(1886~1946)이 쓴 <윌리엄 모리스>(윤효녕·엄용희 옮김, 한길사 펴냄)에 잘 나와 있습니다.

모리스에 관해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 사람은 현 사회를 '이른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얽혀있는 모습 자체는 사회인데, 사회라고 부르기 찝찝한, 금방 해체될 것만 같은 혹은 해체되는 와중에 있는 사회라는 의미입니다.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협력 관계가 아닌 서로 내리눌러야만 하는 관계가 되기 때문에 '사회'라고 제대로 부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사회'가 진짜 '사회'가 되는 그 순간이, 사회주의가 목표로 해야 할 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그가 말하는 '진짜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모리스에 관해 두 번째로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그 역시 경제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의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것은 바로 '도덕적 변혁'이었습니다. 모리스가 말하는 도덕적 변혁이란,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되어야 할 노동자 민중들이 스스로 자신이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자본주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해 위에서부터 사회를 뜯어고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반드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이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변혁하는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경쟁의 사회관계가 아니라, 협력의 사회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개인들더러 옆에 있는 사람과 인간적인 정을 나누도록 해라, 협력의 사회관계를 맺도록 해라, 라고 하는 데 그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걸 받쳐줄 수 있는 조직적인 틀을 제시해야만 하겠지요. 모리스는 그 답을 완전히 제시해 주지는 않았지만, 묘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교과서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어받아서, 물질적으로는 더 발전된 기업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윌리엄 모리스는 그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발전된 어떤 유산들을 활용하되 그것이 반드시 다른 것과 결합해야 한다고 봤어요. 그것은 '중세의 생활양식', 즉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의 생활양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미래와 과거가 합쳐져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자 한다면 <에코토피아 뉴스>(박홍규 옮김, 필맥 펴냄)라는 책을 참고하십시오. 유토피아를 다룬 '소설'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미래인 20세기에 등장한 어떤 사회를 다루고 있는데, 이곳은 농촌과 소도시가 결합한, 마을 중심의 자치가 이루어지는 전원 사회입니다. 이것이 국가와 기업을 대체하여 '사회'로서 기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페이비언 협회와 콜

윌리엄 모리스의 이러한 착상과 원칙들이, 콜과 그의 길드 사회주의 사상에 들어서서 좀 더 구체화됩니다. 콜은 경제학자이자 정치·사회학자이며 역사학자이고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운동가입니다. 게다가 저명한 추리 소설 작가이기도 했으니,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인간이었습니다.

그 역시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가 되기 쉽지 않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좌파나 노동운동과는 상관없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거든요. 아버지 조지 콜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보수당원이자 국교회 신도였습니다. 콜 역시 영국 사회에서 부유한 집안의 똑똑한 아들이 밟는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으며 성장했습니다. 명문 세인트 폴 학교에서 10대를 보냈고, 1908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소위 '의식화'될 수 있었던 데엔 모리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내가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부와 빈곤, 지배와 종속이라는 쌍둥이 죄악에서 벗어난 평등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접하면서 이런 사회만이 인간의 존귀함과 동료애에 부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회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모리스가 상상한 사회는 내게 인간관계의 올바른 형태를 구현한 것으로 보였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존경할 만한 것으로 다가왔다."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해제 중, 본문 707쪽)

알려져 있다시피 옥스퍼드 대학의 학풍은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그 속에서도 콜은 옥스퍼드 대학 페이비언 협회(Oxford University Fabian Society, OUFS)라는 사회주의 서클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영국의 유서 깊은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는 그 이름을 고대 로마의 파비우스 장군에서 따 온, 혁명이 아닌 점진 개혁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자는 전략을 가진 모임이었습니다. 뒤에 버티고 숨어서 한니발의 군대가 지칠 때를 기다리는 '만만디' 전술이 파비우스 장군의 전투 방법이었거든요.

이 협회를 만든 인물은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 즉 '웹 부부'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도 결합합니다. 이들은 협회를 만들면서 <페이비언 논집>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걸 보면 그들의 주장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 사회주의입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나아가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는 기존의 국가 기구에 새로운 세력이 진출하여 그 기구를 통해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봤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조류 가운데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고, 실제로 영국 노동당은 이 노선에 의해 100년간 움직여 왔습니다.

▲ 비어트리스 웹과 시드니 웹 부부. ⓒwww.thinkinghousewife.com

콜이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이미 페이비언 협회원들은 시의원이나 시장 등의 직책으로 지자체에 많이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시 정부도 내각 책임제였고, 이들 가운데는 노동당이 아닌 자유당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19세기 후반 시 정부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에 민간 기업이 장악하고 있던 상수도, 전기, 가스 등 생활 필수 공공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국유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을 '지방자치 사회주의', '가스와 수도관의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이 시절로서는 실로 커다란 진보였고, 그런 권위 때문에 콜 역시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했을 거라고 봅니다.

생철학과 생디칼리즘

그런데 젊은 콜과 그의 친구들은 점점 페이비언 협회와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시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1889년에 태어난 콜이 대학에 진학한 1900년대 말은 '벨 에포크'라 불리는, 1차 세계대전을 몇 년 앞두고 전개된 자본주의의 최 전성기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지성계에서는 그러한 물질적인 번영에 회의를 가지고 인간의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상 사조가 물결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뿐만이 아니라 페이비언식 사회주의가 전제하는 19세기 식 실증주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감을 의미했고, 이러한 반(反) 실증주의 이념과 정서는 특히 젊은 좌파들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발휘했습니다. '약동하는 생'을 강조하는 베르그송의 생(生) 철학이 유행했고, 그 제자 격이라 할 수 있는 조르주 소렐(1847~1992)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사상이 이런 사조를 좌파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의 페이비언 식 사상과는 다른 좌파 사상을 만들고자 하는 조류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지적 흐름에 대해서는 스튜어트 휴즈의 <의식과 사회>(황문수 옮김, 개마고원 펴냄)를 참고하길 바랍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앞서 페이비언주의는 국가 사회주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국가 사회주의에는 전통적인 경쟁 상대(?)가 있지요. 바로 아나키즘입니다. 아나키즘은 자본보다도 국가를 오히려 더 때려 부수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요. 하지만 아나키즘 역시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주인 되는 세상을 지향하는데요. 그렇다면 사회는 어떤 주체로 나타나야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아나키스트들은 별 대답을 내놓지 못했어요. 물론 크로포트킨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강의 진행을 위해 비약을 허용한다면 이쪽도 결국 모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반 실증주의 사조를 좌익에 전파시키는 역할을 했던 조르주 소렐은 사실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한 발 나아갔지요. 소렐의 시대는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이 막 발전하고 있는 시대였고, 소렐이 활동하는 프랑스 노동조합은 유럽의 다른 어떤 노조보다 전투적이었습니다. 그는 "국가는 아니다. 그럼 사회를 대변하는 역할은 누가 해야 하는가? 바로 조직화된 노동자 자신이라는 의미에서의 노동조합이다"라는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노조가 우리나라 식의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직업별 노조, 혹은 조금 더 현대화되고 거대화된 형태의 산업별 노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렐은 노조가 자본주의와 싸우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봤고, 그래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핵심적 수단은 총파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총파업은 시한이 있고 어떤 한정적인 요구를 내거는 그런 파업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총파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무너진 현장에서 사회를 작동시켜야 할 것은 좌파 정당의 사회주의자 정치인이 아니라 노조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의 흐름 중 하나인 생디칼리즘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앞서 설명 드린 ①국가 사회주의 ②아나키즘과 함께 ③번으로 매겨 봅시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운동권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주로 ①번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상이 전개되던 당시 콜은 젊은이였고, 비록 그 출발은 페이비언이었지만 윌리엄 모리스가 꿈꾼 세계를 연상하면서 ①에 문제의식을 갖고 ③과 같은 새로운 사상에 끌리게 됩니다.

"원 빅 유니온"

이 당시 콜과 그의 동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단순히 사상만이 아니었고, 중요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때는 1912년, 그는 스물세 살, 대학 마지막 학년 때였겠지요.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에도 한 챕터에 걸쳐 묘사되는 이 시기는, 우리로 치면 1987년 같은 시기였습니다. 6.29 선언 이후 울산에서부터 자발적인 파업이 벌어졌고, 7~9월 석 달에 걸쳐 노조가 없는 곳에선 노조가 만들어지고 어용 노조가 있던 곳에 민주 노조가 들어서는 등 노동운동의 출발이 이루어졌는데요. 영국의 경우 1912년이 바로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노동조합이 등장하여 아주 강력한 파업을 펼치면서 온 나라를 흔든 해입니다. 이 무렵엔 영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탈리아, 벨기에, 러시아 곳곳-도 들썩였습니다. 특히 이탈리아는 거의 폭동으로까지 발전했는데요. 그 2년 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더 길게 지속되고 더 커다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1차 대전에 각국의 내부 계급 투쟁을 잠재우기 위한 측면이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sittingdownforsomething.wordpress.com
이 시기를 '레이버 언레스트(Labour Unrest)'라고 합니다. 이 책은 '노동 불안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시기 젊은 콜도 옥스퍼드에 있는 버스 노동자 등이 파업을 감행할 때 직접 결합해서 싸웁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콜은 더욱 성장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생디칼리즘 사상뿐 아니라 어떤 운동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세계 산업 노동자 연맹(Industrial Workers of World, IWW)의 운동인데요. 이는 현대적 의미의 대규모 산업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시발점이 된 운동입니다.

그 전까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의 노조 형태는 우리가 떠올리는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 '직업별' 노조였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과 비슷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직업 협회 비슷한 형태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까요? 철도 산업을 예로 들어 봅시다. 철도 노동자를 아우르는 노조가 아니라 기관사 조합, 화부(火夫) 조합, 승무원 조합이 있고, 교섭도 파업도 다 따로 하니까 단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이 발전하면 할수록 어떤 '기술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 미숙련 노동자들, 즉 며칠 단위로 어떤 공장에 '픽업' 되어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소외됩니다. 특정 기술을 요하는 노동자들의 조합이라면 똘똘 뭉쳤을 경우 자본가들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와서 할 수 있는' 노동이라면 대항력이 없으니까요. 이런 사람들이 마치 현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 바깥에 존재하듯 직업별 노조 외부에 포진하게 된 겁니다. 다수의 미숙련 이주민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던 미국의 경우 이 한계가 더 심각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IWW 운동은 '원 빅 유니온'이라는 구호를 내겁니다. 섬유 노동자 따로, 금속 노동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노동자 안에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나라의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노동조합' 안에 다 조직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사실 그 목표는 나아가 나라 바깥의, 전 세계 노동자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월드(World)가 붙은 거고요. 여담이지만 이 운동의 가장 열렬한 대변자 중 하나가 바로 사회주의자로 성장한 성인 이후의 이야기는 위인전에 등장하지 않는, 헬렌 켈러입니다.

프랑스에서 촉발된 생디칼리즘과 미국의 IWW 운동이 만나게 되면 굉장히 많은 상상력이 촉발될 수 있습니다. 동시대에 두 가지 흐름을 목도한 콜은 머릿속에서 둘을 결합시키게 됩니다. 실제로 결합되면 어떤 불꽃이 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와중에 1차 대전이 터졌고, 어느 나라든 국내 투쟁은 소강 상태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었고요. 사실 콜도 군대에 끌려가기 좋은 나이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징집에서 면제됩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안토니오 그람시 역시 척추 장애 때문에 목숨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길드 사회주의에 주목하다

당시 콜이 주목한 것이 앞서 말씀드린 '길드 사회주의'입니다. '길드'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중세 시대 유럽에 존재했던 수공업자들의 조합이죠. 자기 기술을 갖고 먹고 사는 수공업자들은 반드시 그 도시에 있는 수공업자 조합에 가입을 해야 했습니다. 거기엔 도제-직인-장인이라는 엄격한 위계가 존재했습니다. 훈육을 거쳐 마지막으로 장인이 되면,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영자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지금과는 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위계는 분명했고, 말 그대로 봉건적 위계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어떤 인간적인 관계가 있었던 거죠.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지만, 길드 사회에서는 다 같이 책임을 졌던 겁니다. 무엇보다 길드 사이에서는 자본주의에서 기업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길드 사회주의를 처음 주장한 사람이 윌리엄 모리스의 제자였던 아서 펜티라는 사람입니다. 펜티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는 자본주의의 유산을 일정하게 이어받으면서도 자본주의 이전의 어떤 질서, 전통, 자원과 결합해야 한다'는 모리스의 착상을 이어받아 자기 나름대로 구체적인 제안을 내놨습니다. 길드를 되살리자는 이야기였지요.

생디칼리즘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생디칼리즘에서 상정하는 것은 현재의 산업 질서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지금 존재하는 노조'였습니다. 펜티가 얘기하는 조합은 자생적인 조직이라기보다, 중세 길드를 되살리는 방향의 인위적 변혁을 필요로 하는 조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드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생산과 시장 유통의 전반적인 과정을 통제하고 이윤을 나누자는 것이었는데,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맡았던 경제를 움직이는 기본 단위 역할을 길드가 맡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전히 모호하긴 하지만 모리스의 생각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된 이 구상에 S. G. 홉슨과 A. R. 오레이지라는 사람이 감응을 했고, 이들이 <뉴에이지>라는 잡지를 창간합니다. <뉴에이지>는 길드가 자본주의의 기업을 곧바로 이어받아 도시 수준에서 진행될 게 아니라, 전국 단위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꽤나 야심찬 이야기를 했는데요. 전국 단위의 각 산업 길드를 조직하여 '길드 의회'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서로 소통하고 합의를 하게 된다면 국가의 기존 관료 기구를 폐지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어떤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까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즉각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 길드란 것은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가? 생산 현장을 중심으로, 생산자·노동자들이 만드는 것일 터다. 그렇다면 '소비자'의 이해는 어디에 있는가? 생산자와 소비자는 같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이 조직체를 통해서는 '생산자로서의 민중'의 이해만이 대변될 수 있다. 소비자로서의 이해는 사상될 수 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소비자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콜과 동지들은 펜티 유의 주장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는 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대의 길드 사회주의가 등장하게 됩니다.

콜은 1915년 웹 부부가 이끄는 조직 노선에 반발하여 페이비언 협회를 탈퇴하고, '전국 길드 연맹'이란 조직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길드 사회주의 이론의 체계를 정돈하는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 저서가 <길드 사회주의 재론>이란 책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자본주의 사회보다 다원적인

이 <길드 사회주의 재론>을 중심으로 콜이 생각한 대안 사회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는 현재의 '민주주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지금의 민주주의는 대리 정치'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대표자를 뽑으면 그들의 임기는 몇 년간 보장되지만, 뽑아준 사람들을 대변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당파에 따라 더 많은 힘을 가진 사람들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대리 정치에서 '자치'로 발전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노동자 민중이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리고, 대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두 번째로는 민주주의 정치가 좁은 의미의 정치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4년에 한 번 국회의원 뽑을 때만 유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한다는 지적이지요. 그게 아니라 실제 경제 현장, 즉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현장으로까지 민주주의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조직적 실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콜은 홉슨 같은 '선배'들처럼 길드라는 조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공장이라는 단위에서 자치가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결정 사항은 이사회가 아닌 노동자들이 투표로 뽑은 대리자들이 결정하고, 그 대리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 소환권을 발송할 수 있으며, 더 크고 중요한 사항들은 총회에서 논의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자치가 개별 공장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개별 공장이 지역 차원 혹은 산업(섬유 산업 길드 등)으로 모일 수 있으며 이것이 전국 길드로 이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전국 단위의 산업 길드들이 전국적으로 모여서 산업 길드 회의(Industrial Guild Congress, IGC)라는 것을 조직합니다. 이 산업 길드 회의에는 전국 섬유 길드 대표도, 금속 길드 대표도 모여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중앙 계획 당국이 했던 역할을 맡는 것이죠. 다시 말해 어느 산업에 어느 정도의 자원을 할당할 것인지, 발생한 이윤은 사회적으로 합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그것이 과한 이득일 경우 세금을 얼마나 물릴 것이며 어디에 투입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이 의회(산업 길드 회의)에서 결정한다는 겁니다.

의회니까 당연히 표결도 하고 합의 과정도 거쳐야 하고 싸우기도 하겠죠. 그것이 비록 비효율적일 수는 있겠지만, 바람직한 사회를 실현하려면 갈등을 겪으면서도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소련의 중앙 계획 당국이 지령을 내리는 사회주의보다는 대한민국 국회 같은 모습을 포함하는 사회주의가 더 낫다는 발상이라 할까요. 이런 모델을 통해 자본주의와도 국가 사회주의와도 다른 사회상을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한편 홉슨이나 오레이지가 맞닥뜨린 문제가, '소비자의 이해가 소외된, 생산자만의 길드'라는 문제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반박에 콜은 어떤 답을 내놨을까요. 그는 '소비자 길드'를 포함하는 훨씬 더 다원적인 사회를 제시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 하면 '획일적인 사회'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죠. 그것을 모래 같은 작은 물질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는 바위 같다는 의미에서 '일괴암적 사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콜은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훨씬 더 다원적인 사회여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생산자 길드 혹은 노조가 국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사회 조직'이 국가를 대신하는 체제를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선 산업 길드뿐 아니라 소비자 길드 역시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비자 길드는 생활이 이뤄지는 '지역' 중심으로 꾸려지겠지요. 소비자 길드 역시 생산자 길드와 마찬가지로 상급으로 대리자를 올리면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면 또 그 한 단계 위에서 소비자 길드 대표와 생산자 길드 대표 사이의 협상도 필요하겠죠. '너희들이 생산한 섬유의 값을 낮출 수 있지 않겠느냐'라든가, 어떤 요구를 하고 싸울 수 있겠지요. 생산했는데 질 좋은데 값이 비싸다, 값 낮출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걸 요구해서 싸우기도 하고요.

소비자 길드만 있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콜은 최소한으로 존재해야 할 길드에 대해 꽤나 장황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가령 '문화' 생산물은 도저히 다른 산업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며 문화 평의회를 따로 조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건도 마찬가지고, 수도·가스 등 공공재도 그러하며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있어서도 별도의 평의회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한마디로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가 해결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시장에서 해결했던 문제들을, 이 구상 속에선 그야말로 다원적인 결사체들, 개인이 복수로 속해 있는 결사체들 사이의 협상과 합의로 처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국가 자체도 남아서 일부 기능을 존속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행했던 필수적인 역할-예를 들어 세금을 관리한다든지 은행 같은 신용 기관을 통제한다든지 외교적 역할을 한다든지 하는 역할-을 여전히 맡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죠. 하지만 콜은 그 조직체가 지금까지의 국가와는 다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코뮌'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정치학에서는 이런 입장을 다원주의 국가론이라고 부르는데요. 한마디로 일괴암적 사회가 아닌, 권력이 최대한 사회의 다른 조직체들로 분산되어 있는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콜은 의회에 참석할 의원을 지역 단위로만 뽑을 것이 아니라, '기능별 대의제'라는 또 다른 축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기능을 대변하는 것이 길드란 조직일 수 있겠지요. 이 두 축이 맞물려야만 인민의 의사를 좀 더 촘촘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논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개혁과 혁명은 만나게 된다!

혁명과 개혁 가운데 콜이 선호한 것은 개혁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두긴 하지만 일단 개혁이라는 출발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위와 같은 구상을 내놓은 것은 그러한 조직들의 맹아를 지금부터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일 텐데, 어디서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사실 당시 영국에는 노총 역할을 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내셔널 센터가 있었고 이는 '노동조합 회의(Congres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산업 길드 회의'는 이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산업 길드 회의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그 청사진이 던져진 게 아니라, 그 당시 영국 노동운동이 실제로 갖고 있던 조직이 이런 식으로 '진화'되어야 한다고 봤던 것이죠. 자본가들로부터 무엇을 더 받아내느냐에서 나아가, 우리가 이 산업을 자본가 없이 운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바꿔나가자는 얘기였죠. 콜은 그것이 지금부터 해야 할 개혁적 운동의 시작이라고 봤습니다. 그는 이러한 맹아를 변형시키고 발전시켜 놓아야 혁명적 시기가 왔을 때 더 쉽게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기 때문에, 개혁과 혁명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닌 만나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람시도 마오쩌둥도 그 자신을 역사에 남긴 사상이나 당을 20대에 만든 것처럼, 콜도 위와 같은 주장을 모두 20대에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생애 동안, 어떤 식으로 자기 논지나 운동을 전개해 갔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해제에 맡기도록 하고 길드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한 것만 언급하자면, 사실상 그것은 1920년대 초 부분적 길드 실험의 실패나 운동권 내 정치적 분열 등을 겪으며 그 자체로는 좌절되게 됩니다. 이후 콜은 노동당과 관계를 맺으면서 좌파 운동은 계속하지만, 길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걸지는 못하게 됩니다.

이후 영국 노동운동의 주요 길목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특히 대공황 당시 케인즈와 함께 공황 해결을 위해 정부가 재정 확대 정책을 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케인즈주의적 당면 과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끈질기게 그것을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장기 과제와 연결할 방안을 고민했고, 그 고투의 산물로 <경제 계획의 원리(Principles of Economic Planning)>(1933)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소련 사회주의가 중앙 계획 기구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둔 시기였기에, 콜도 과거에 비해 국가의 역할을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각 생산 주체가 직접 목소리를 내면서 전체적인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참여형 계획 경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런 점에서 길드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을 줄곧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계획 가운데 개별 경제 행위자들이 충분한 소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구매력의 계획'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신용론>을 쓴 더글러스 소령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이 주장한 것은 지금으로 보면 기본 소득 같은 것입니다. 모든 시민들에게 최저 생계비에 준하는 현금 소득을 그냥 주고 그것이 일자리 소득과 합쳐져 전체 소득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콜은 선구적인 기본 소득 논자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영국엔 노동당 정부가 들어섰고 복지 국가의 초석을 놓는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냉전 때문에 국방비 지출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복지 예산이 삭감되고 개혁은 어설프게 끝나버립니다. 콜은 노동당을 강하게 비판했고,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많은 책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세대의 사회주의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며 젊은이들을 규합했고, 그가 제시한 방향은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어 스튜어트 홀 등 신좌파(New Left)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59년 당뇨병으로 눈을 감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로버트 오웬, 세 가지 얼굴

노동운동의 역사라는 제목을 보고 아마 '노동조합'의 역사를 떠올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른바 사회'를 대체할 진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콜이 다룬 세계는 거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봅시다.

"특히 필자는 노동운동의 세 부문-노동조합, 협동조합 및 정치조직-은 하나의 노력이 세 국면으로 나타난 것이고, 이 노력은 공통의 필요와 감동에서 우러나오며, 때로는 분열을 겪는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길은 공통의 목적을 향해 뻗어 있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깨닫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14쪽)

노동조합과 함께 협동조합 및 정치조직을 언급하고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는 노동운동의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과 연결됩니다. 노동운동이 노조만의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 과제는 현재의 질서 내에서 더 많은 소득을 확보하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콜은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봤고, 세 축이 어우러져 새로운 사회가 성립되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한국에선 노동운동 하면 노조의 운동만이 일방적으로 부각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정치조직은 그래도 2000년대 들어서 노동운동의 주요 축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지만, 협동조합 같은 경우엔 여전히 노조완 상관없는 지역운동이나 소시민 운동으로 치부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콜의 언급은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렇다면 노동조합, 협동조합 및 정치조직 세 부문이 구성해 나가야 할, 사회주의의 '사회'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기 전에, 사회주의의 창시자라 할 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 봅시다. 콜보다 100년 앞선 18세기 말~19세기 초, 역사 속의 중요한 사회주의자로 누가 있을까요? 소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생시몽(1760~1825)과 푸리에(1772~1837), 영국의 로버트 오웬(1771~1858)이 있습니다. 이 셋 중에 마르크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또 우리에게도 중요한 인물이 바로 오웬입니다.

▲ 로버트 오웬의 초상. ⓒrobert-owen.com
오웬은 자수성가한 자본가였습니다. 찰스 디킨스 소설에 악역으로 나오는 영국 1세대 자본가에 속했죠. 이 1세대들은 원래 돈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은행이나 대상인으로부터 돈을 꾸어서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재산을 굴렸습니다. 그들은 악독하고 독선적이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일수록 '너희들도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정서가 있죠. 그런데 오웬은 자신이 굴리는 공장 제도 속에서 사회의 말살, 소멸, 와해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문명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을 가졌고, '뉴 라나크' 실험에 나서게 됩니다.

그것은 라나크라는 농촌에 공장을 지어서 사회주의적으로 운영해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이게 성공하면서, 자본가나 귀족들도 오웬에 주목하게 되지요.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문제로 떠오른 계급 갈등이 여기선 일정하게 해결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오웬은 이 실험의 규모를 넓혀서 실시해보고자 했고, 미국으로 건너 가 뉴하모니라는 마을에서 좀 더 큰 실험을 벌입니다. 하지만 이건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는 사회 전체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섬 같이 통제된 곳에서 실험만 해서는 자신이 생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뼈저리게 느꼈고,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낙담하고 돌아온 그는 곧 당황하게 됩니다. 그 앞에 '오웬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었으니까요. (웃음) 다시 힘을 얻은 오웬은 당시 1세대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생산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합니다. 노동조합이 아니라 생산협동조합을요.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노동조합보다 생산협동조합을 중시하고, 이것을 어떻게 전체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는가를 고민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건설노동자조합'이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노동조합과는 달리, 개별 노동자들이 '오야(작업 반장, 현장의 자본가와 종속되어 있는 존재)'를 거치지 않고, 자본가의 직접 지휘를 받지 않고 '생산자' 조합으로 기능한다는 발상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생산의 지휘와 통제를 아예 스스로 만드는 거죠. 이는 현재 파견 노동자나 비정규 노동자 문제에 있어 어떤 영감을 던져줄 수 있다고 봅니다.

오웬은 또 '전국 노동조합 대연합'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IWW 운동이 추구했던 이상('원 빅 유니온')을 이미 100년 전에 추구한 것이지요. 특정 기술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당시의 직업별 노조 체계를 벗어나, 노동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한 조직에 뭉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직을 만들기는 하지만 얼마 안 가 흐지부지 되어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이것들이 다 실패한 후 오웬은 또 다른 운동의 결합을 시도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차티스트 운동, 우리 식으로 말하면 헌법 개정 운동이지요. 이는 노동자들의 선거권 확보를 위한 일종의 정치 운동이었습니다.

왜 오웬 이야기를 했는지 아시겠지요. 이 사람 안에, 100년 뒤에 실현될 노동 운동의 '최소한의' 세 얼굴(노동조합 운동, 협동조합 운동, 정치조직 운동)이 집약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가 이런 것들을 통해 필생의 과제로 생각한 것은, 와해되어 가는 사회를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할 것인가 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한국이 노동운동은 오웬의 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의 모태, 사실은 교회에?

사실 영국 노동운동에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문화적 전통이 있습니다. 바로 디센트(Dissent)라 불리는 비국교도 전통입니다. 초기 비국교도로는 대표적인 게 장로파가 있지요. 또 '조합 교회'라고도 하는 회중파가 있고, 거기서 더 발전해 퀘이커가 나왔고, 18세기 이후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니테리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게 감리교(메서디스트)입니다. 감리교는 원래 성공회 소속이던 존 웨슬리(1703~1791)의 반성적 신학 운동으로부터 등장했습니다. 감리교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이 감리교의 문화적 기반 속에서 영국의 노동운동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노동자들의 중요한 집결점이 됩니다. 한국 노동운동사를 보다가 외국 역사를 보면 전혀 다른 뿌리와 문화적 DNA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차이가 어디서 왔나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러한 비국교도 전통이 나옵니다.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경우, 각 마을마다 지금의 공무원 비슷한 담당 신부가 있었습니다. 그 운영진 자리는 고스란히 지역의 명사, 자본가, 지주들에 돌아갔지요. 교회 안에서도 맨 앞자리는 명사, 그 다음은 중산층, 뒤에는 못 사는 사람 이런 식으로 사회 지배 질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서구 전통에 있어서 조직체로서의 '사회'의 원형을 제공한 건 사실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교회가 보여주는 이런 지배 질서를 못 견뎌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속엔 교리적인 반감뿐 아니라 사회적인 반감도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반감이 컸겠지요. 그 반감을 결집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준 게 바로 감리교회입니다.

국가에서 임명한 신부가 아니라 떠돌이 목사들이 교회를 운영했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푼돈을 모아서 목사의 생활비를 마련해 줬습니다. 공동체성이 상당히 강하고 운영도 민주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이는 단순히 대안적 교회였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바라는 사회의 모태를 보여주는 대안적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노동운동의 문화적 원점을 제공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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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집>(정경섭 지음, 레디앙 펴냄). ⓒ레디앙
핵심은 이겁니다. 새로운 사회라는 먼 미래의 과제를 위해서 체험 가능한 영역 속에 나름의 씨앗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당시로서는 비국교도 교회, 특히 감리교회였다는 겁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그렇게 모여야만 평범한 생활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겠죠. 이렇게 '노동자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행위는 노동당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다른 나라엔 어떤 게 있었을까요? 스웨덴 같은 곳에는 '민중의 집'이 있습니다. 민중 회관 같은 곳입니다. 노동자들은 이런 건물에 모여서 교육, 토론 같은 문화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들어져야 할 사회의 모태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던 거죠. 이와 관련해서는 올해 출간된 <민중의 집>(정경섭 지음, 레디앙 펴냄)이란 책도 있습니다.

새로운 노동조합을 상상하라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첫 장부터 읽게 되면, 처음엔 흥미롭고 역동적인 얘기가 많이 나와서 책장이 죽죽 넘어갑니다. 그러다 중간을 지나 1850년대에 이르면(이는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자본론>을 쓰던 시기이지요) 책이 지루해집니다. 실제로 역사가 그랬습니다.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여왕이 왕좌에 있었던 때를 '빅토리아 시기'라고 부르는데, 노동운동사로 보면 2세대 내지는 3세대로 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직업별 조합 가운데 합동 기계공 조합 같은 소위 '잘 나가는' 조합이 생기고, 이들이 자본가와의 일상적인 교섭 기회를 확보하면서 상당한 실질 임금 상승을 거두어냅니다. 그런데 이런 조합에 속해 있는 노동자들이 한마디로 '중산층화'되기 시작합니다. 주로 남성인 그들은 부르주아가 쓰던 챙 높은 실크해트를 쓰고 다니는 등 복장부터 다르게 하고 다닌 거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노동 귀족'이라는 말을 발명하게 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노동 귀족의 등장을 전 지구적 맥락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영국 자본주의라는 틀에서 보면 사실 노동자들이 살기 좋아진 건데 뭐 하러 비판을 하느냐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국의 일부 노동자들은 지구 자본주의의 맨 꼭대기에서 제국주의의 수혜를 누리는 셈이었던 것이죠. 만일 이 상황이 지속되었다면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렇게 두꺼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귀족이 되었습니다"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요.

문제는, 이걸 혁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상황을 한국 사회에 옮겨 놓고 보면,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중소기업·비정규 노동자들과의 격차를 떠올려 볼 수 있는데요. 참 어려운 상황이죠. 우리가 이 책을 긴 시간 들여 읽는 이유가 있다면 그겁니다. 적어도 이 책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거든요.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발한 국가에서 어느 순간 화석화된 운동도 결국엔 분명 바뀌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만큼 우리에게 신뢰 있는 정보가 있을까요?

1880년대 초부터 일단의 선구적인 운동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끼리끼리 운동에 그쳤지만, 물방울로 바위를 뚫듯 서서히 이들이 뿌린 씨앗이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런던 부두노동자 대파업이 일어난 1889년이 제1차 전환기입니다. 부두노동자들은 기존 영국 노동운동 질서에서조차 배제된, 그야말로 미숙련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조직을 이루고 1889년에 폭발한 겁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신(新) 조합주의 운동'이 시작됩니다.

기존 조합이 기능별이었다면 이 조합들은 한 지역에 있는 '자본가와 싸울 의향이 있는' 노동자들을 기능과 상관없이 규합하는 조합이었습니다. 오웬이 말했던 대 일반 노동조합의 꿈을 다시 꾼 사람들인 거죠. 이들을 대표하는 말은 '만인을 위한 조합'입니다.

이후 잠시 퇴조기를 거치고 제2차 전환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1912년의 '레이버 언레스트'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노동조합이 공공 및 일반 노동자 조합(Transport and General Workers' Union, TGWU)이었는데요. 여기 '일반'이 왜 붙었을까요. 핵심은 운수 노동자였지만 가입하고 싶은 노조라면 어느 분야든지 가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TGWU는 부두·철도 등의 파업을 벌이면서 영국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합니다. 연맹이 아닌 '단일 노동조합'으로 20세기 초에 벌써 조합원 수가 90만 명이었으니 대단하죠. 현재 영국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 두 개가 각각 조합원 100만 명이 넘는 유니즌(Unison)과 유나이트 더 유니온(Unite the Union)인데, 그 모태가 TGWU입니다.

현재 한국의 주된 노동조합 형태는 기업별 노조입니다. 당시 영국의 직업별 노조하고도 다르지만, 어떤 형태와 틀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소수의, 테두리 안에 있는 노동자만 가입할 수 있다는 틀이지요. 그걸 벗어나 자본가가 아닌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조합으로 관념 자체를 바꿔나간 게 TGWU입니다.

한국 기업별 노조가 산업별로 전환하겠다고 하고, 민주노총에 금속노조나 금융노조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위와 같이 관념을 바꿔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청년 유니온이 내세운 '유니온'이, 신 조합주의 운동이 등장했던 당시의 이미지 혁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노동조합'이란 말을 쓰면 기업별 노조라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기 어려워 굳이 영어로 유니온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노동당의 실패가 말해주는 것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에는 노동자 정치 세력화, 즉 노동자 정당 건설과 관련해서도 상당 부분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정치 세력화 실험에는 그대로 배울 측면도 있고, 반면교사로 바라 볼 측면도 있습니다.

노동당을 건설하고 빠른 속도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은 '집단 입당제'라는 조치를 취합니다. 정당이 개별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당원으로 받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 전체가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TGWU에서 대의원 회의를 해서 조합 전체가 노동당 입장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가입이 결정되면 무려 조합원 90만 명이 입당하게 되는 거죠. 90만 명의 조합비를 생각해 보면, 운신의 폭이 얼마나 커졌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맹점이 있었습니다. 집단 입당제로 들어온 당원들에게 노동당 당원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할 리 없었으니까요. '선거 때 노동당을 찍어야겠다' 정도의 인식이지, 당의 강령을 인지한다든지 당 후보 당선을 위해 뭘 한다든지 하는 노력은 없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당의 이념적 기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은 유럽 대륙의 다른 좌파 정당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기존 자유당의 자유주의와 크게 구분이 안 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념적 구분을 명확히 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공산당'이란 당명을 갖기 어려운 것처럼 대중적으로 표를 모으기 어렵다는 위험성이 있었던 겁니다. 자유당과 이념적 구분은 잘 안 되지만 노동자를 내거니까 다수의 노동자들은 노동당을 선택했고, 이것이 노동당의 급속 성장을 도왔습니다. 참고로 대륙의 다른 나라들은 영국과 달랐는데요. 특히 독일 사민당의 경우 철저하게 개별 노동자들을 설득해 당에 가입시키는 방식이었기에 급속 성장은 불가능했어도 당원 정체성이 강력했고 이념적 기반이 탄탄했습니다.

잠재된 문제는 위기 상황에서 반드시 폭발하고 맙니다. 그 대표적 사건이 대공황 발생으로부터 2년 뒤인 1931년에 일어났습니다. 대공황 와중이니 불황과 일자리 문제가 심각했는데, 당시 집권 중이던 노동당은 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는 유럽의 다른 좌파 정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결과는 영국에서 어떤 나라보다 비극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 필립 스노든. ⓒwww.npgprints.com
당시 총리는 램지 맥도널드, 재무장관은 필립 스노든이었습니다. 노동당 창당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해낸 주역들이었지요. 그런데 이들은 위기 속에서, 좌파 정당으로서의 대안 제시가 아니라 극히 자유주의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특히 스노든은 당시 영국의 리버럴리스트 대부분이 그랬듯 금본위제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거든요.

불황이 닥쳤고, 거리에 노동자들이 나앉았습니다. 실업 보험을 지급해야 하는데 실업자 숫자가 워낙 많아 기금은 점점 고갈되어 가겠지요. 그러자 정부에 실업 보험금을 깎아야 한다는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노동당 의원들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자본가들의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던 당 수뇌부들은 엄청난 일을 벌이고 맙니다.

어느 날 아침 맥도날드 총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실업 보험금 인하 등을 위한 보수당과의 대 연정'을 발표한 겁니다. 당 간부·일반 당원에게 사전 고지는 없었고, 오로지 보수당 총재와의 밀실 회담을 통해서 이루어진 전격적 발표였지요. 당장 당이 뒤집어졌고 현역 총리를 출당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총리가 무소속이 된 상황에서 조기 총선을 실시한 결과, 노동당은 대 참패를 맞게 됩니다. 노동당의 자리는 50석으로 현격히 줄어들고 말았지요.

이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냥 미룰 수 있는 숙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거지요. 오히려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노동당은 이후 재생력을 보여줍니다. 위기를 당의 재구성 과정으로 삼은 거지요. 곧바로 연례 당 대회에서 은행 국유화 등 자유주의와 절연하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부 지식인의 담론이었던 사회주의를 당의 전면에 내걸고 새로운 좌파 정당으로 거듭납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 국가를 건설한 노동당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노동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국의 경험은 우리의 노동자 정치 세력화라는 과제에도 통렬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는데요. 노동자 정당 성장의 척도는 눈에 보이는 지표를 통해서 평가되곤 하지만, 그것보다 심층의 토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집단 입당제를 통한 성장은 겉으론 빨라 보여도 내실이 있진 않았던 겁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 정당

ⓒ프레시안(최형락)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영국의 노동당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를 살펴볼까 합니다.

영국엔 노동당이 있고, '독립 노동당'이 따로 있습니다. 먼저 만들어진 건 독립 노동당으로, 케어 하디라는 노동운동 출신의 도덕적 사회주의자가 중심이 되었지요. 아직 노동운동계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 세력화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할 때 선구적으로 나선 조직입니다. 독립 노동당은 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생존했으며, 다른 노동조합들처럼 노동당의 '가입 단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하나, '협동조합당'이란 것도 있습니다. 협동조합 운동 세력이 결의해 당을 만든 거죠. 그런데 선거에서 협동조합당이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어요. 그런데 영국 하원에는 협동조합 당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들은 노동당과 이중으로 가입되어 있습니다. 협동조합당 소속이되 선거에 나갈 때는 노동당으로서 자신을 알리는 거죠.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면 자기 이름 옆에 노동당/협동조합당 의원으로 소속을 기재하고요.

이 독특한 구조를 말씀드린 이유는 한국의 정당 모델을 돌아보기 위해섭니다. 한국의 정당은 정당의 형태를 대한민국 정당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선관위가 규정해준 범위 내에서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지난 총선 당시 제가 속해 있는 진보신당은 신문 사설 등에서 국민참여당이나 통합진보당과 합당하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거는 연합 형태로 치르고 거기서 화합이 이루어지면 다음 단계를 물색해 보자는 논의가 더 합당하지 않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영국 노동당은 그 안에 협동조합당을 '품고' 있는 등 여러 형태를 유연하게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도 열어놓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난 봄 겪었던 '통합진보당 사태'를 되새긴다면, 그런 고민은 더욱 더 절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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