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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었다, 2만 명이 사라졌다!… 살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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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었다, 2만 명이 사라졌다!… 살 이유가 있을까?

[강상중-강신주] 우울의 시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다

일본의 '국민 작가'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1905년 '이 나라는 멸망할 것'이라고 읊조렸다. 때는 제국주의의 야욕이 열강에 대한 승리와 만나 그야말로 호전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였다. 하지만 40년이 안 되어 소세키의 예감은 적중했고,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한 학자가 소세키의 비관론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을 발견했다.

이 학자, 강상중(62) 도쿄대학교 정보학환 교수는 소세키의 비관론을 '정직한 비관론'이라 부르며 저성장 시대에 진입한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바라보는 관점에 적용한다. 재일교포 2세인 그는 1998년 재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 인물로, 지금은 주류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는 '스타 지식인'이다.

동북아시아 문제, 일본 내셔널리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해 온 그는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한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앞으로' 등 성장 제일주의 사회의 낙관적 행복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역설하며 고민이나 고통 등 우리가 피하고자 했던 단어들을 꺼내든다.


▲ <살아야 하는 이유>(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그가 겨냥하는 이들은 여전히 일본에서 '다시 경제 대국'을 외치는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경제적인 몰락과 21세기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그로 인한 비정규직의 양산이나 빈부 격차 심화 등 각종 사회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낙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강상중은 이러한 맥락에서 2011년의 대재앙, 3.11 동일본 대지진이 1945년 8월 15일 패전일과 같은 중요한 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사라지게 한 3.11 동일본 대지진은 그 자신에게도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는 5월에 출간되었던 신작 <살아야 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 펴냄)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고통과 3.11 동일본 대지진의 경험을 토대 삼아 집필되었다. 극한의 고통과 종말론적인 상황과 맞닥뜨린 초로의 학자가 터트린 사자후라고 할까. 고민을 권유한다는 차원에서 이 책의 전편 격인 <고민하는 힘>(이경덕 옮김, 사계절 펴냄, 2009)과 맞닿아 있지만 목소리는 한층 더 절박하다.

철학자 강신주(45)와 그가 만났다. 강신주 역시 위로나 최면보다는 고통과 대면할 사유의 힘을 강조하며, 그런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펴냄) 등의 인문·철학서를 써 왔다. 그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달팽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미지의 세계를 앞에 두고 공포로 절망해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불어오는 바람이나 작은 물기를 느끼고 용기의 한 발을 내딛는 달팽이다. 강신주는 일본 사회가 그토록 '생물적인 차원'의 조언이 필요할 정도가 된 것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런 종말론적인 진단이 '뭘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개인에 대한 위로로 빠질 가능성을 경계하며 거듭 우려를 제기했다.


강상중은 이 우려에 대해 뭐라고 대답했을까? '프레시안 books'는 지난 5일 <살아야 하는 이유> 한국어판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리기 전, 약 한 시간동안 두 사람이 마주앉아 나눈 대화를 정리해 싣는다. 대담의 통역은 정호석 도쿄대학교 대학원 정보학환 특임조교가 맡았다. <편집자>

▲ 철학자 강신주(왼쪽), 도쿄대학교 정보학환 교수 강상중. ⓒ프레시안(최형락)

강신주 : 강상중 선생님,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의 한국어판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책이 나오기 전, 추천사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고 원고를 먼저 읽었습니다. 읽고 나서 든 감상 중에 하나는 '씁쓸하다'는 느낌이었어요. 책이 한 사회의 징후라고 한다면,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문제 삼는 시대가 되었구나 싶어서죠. 왜 이렇게 절박한 테마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부터 여쭤보고 싶습니다.

강상중 : 저는 1972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이른바 유신 시대였죠. 그 당시 저와 같은 재일교포들은 '반 쪽바리'라 불리며 멸시를 받았습니다. 재일교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짊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래도 당시의 고민은 상당히 명확했던 편이었죠. 그러나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민족 정체성이라든가 하는 분명한 고민과는 다른 고민을 겪고 있습니다. 계층 간 격차, 실업, 고용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무거운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좀 더 직접적인 계기로는, 제 개인적인 불행이란 절실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책에도 썼다시피 극도의 신경증에 시달리던 제 아들이 2010년 세상을 떠났고, 저희 가족에게 납을 삼키는 듯한 고통이 덮쳐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고 몇 달이 지났을 때, 일본의 도호쿠 지방을 덮친 3.11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고 핵발전소 사고라는 비참한 사태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행방불명자를 포함해서 하루아침에 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살던 땅에서 사라졌지요. 이 두 가지 일이 잇달아 다가왔을 때, 저는 상당히 종말론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후 일본이 이걸로 종언을 맞이하는 게 아닌가 하는 혼돈 속에서 책을 쓰게 됐습니다.

▲ 강상중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굉장히 커다란 불행이 언제든 우리를 덮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일본의 경우 3.11 동일본 대지진의 규모를 뛰어넘는 대형 재해의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으며, 한국에는 여전히 전쟁으로 인한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존재합니다. 이렇듯 개인의 수준을 넘는 커다란 위험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거기에 지지 않기 위한 힘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행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행'이 가진 힘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는 회로, 바로 그 부분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근대에서, 예전의 '고체적인' 근대에서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돈, 애정, 건강, 노후 등의) 행복은 이제 일부의 혜택 받은 사람들에게만 약속된 '특권'이 되고 만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평범한 행복의 감정에 잠길 수는 없는 걸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무엇을 행복이라 느끼는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뀌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 26쪽)

이제 지금까지와 같은 행복론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고뇌나 수고에 눈을 돌리고, 그 의미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 비로소 새로운 행복의 형태가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43쪽)


강신주 :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어요. 이 책의 제목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고자 할 때, 그러니까 어떤 고통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을 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고, 종교적이고 초의미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책을 보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원인'들과 맞서는 듯한, 종교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어요.

제가 이 책에 우려하는 것은, 실제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그런 초월적인 시선으로 품어주는 듯한 그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힘든 사람들과, 선생님 같이 가족의 문제나 재해처럼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경우의 간극이 간혹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래서 선생님이 던지는 말이 비정규 노동자처럼 정치나 자본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약간 멀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강상중 : 강 선생님께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웃음)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먼저 이 문제는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를 기존 유대교의 정통성을 뒤집는 반역자나 혁명가로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는 그런 사회 조건이나 구조를 넘어서는 초의미적 영역이 존재합니다. 인간이 사회 단계의 총체인 것처럼 예수 역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들의 앙상블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그러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수 년 전 도쿄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인 사건의 범인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사람들을 트럭으로 치고 칼을 부려 수 명이 죽고 많은 이들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이 범인은 공장을 떠돌던 비정규 노동자로, 자신의 상태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악한 개인이 저지른 일이다'라는 시각과, '비정규 고용의 대량화라는 사회적 고통과 압박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라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틀리기도 합니다. 인간은 환경이 만들어내는 존재이긴 하지만, 삶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는 같은 환경에 있다 해도 모두가 같은 반응을 하는 게 아니지요. 즉,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킨다고 해서 그 인간이 변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사르트르가 말했던 의미로서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리고 자유의지는 종교적 의미로만 지탱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정치적이고 환경적인 조건들 외에도 종교적이고 초의미적인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 일본 사회는 지금 빈부격차나 비정규 고용 같은 문제들을 겪는 가운데, '전쟁'을 이야기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을 단번에 쓸어서 해결할 수 있는 계기로서 전쟁 혹은 전쟁에 가까운 상태를 갈망하게 되는 심리이지요. 저는 이런 전쟁에의 갈망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이 종교적이고 초의미적인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인류는 근대 이후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만을 취급하는 도구주의적 사고에 의해 표면적으로는 경이로운 번영을 손에 넣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전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예전에는 과학이 차례로 '꿈'을 실현해 주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점차 행복해진다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단언할 수 없습니다. (…)

이처럼 과학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인류가 당연한 것처럼 마음을 기울였던 신이란 무엇이었을까,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미신과는 다른 게 아닐까, 의존심이나 약함과는 다른 게 아닐까, 그것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지금의 괴로움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관심을 가지고 종교에 주목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저는 (리처드) 도킨스 등의 (신은 망상이라는) 의견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적인 물음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41~142쪽)


▲ 철학자 강신주. ⓒ프레시안(최형락)
강신주 :
제 우려에 대해 부연하자면, 인간이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사회나 구조의 변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해볼 수 없다'라는 느낌을 갖고 종교적인 해결점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 때문입니다. 물론 정말 초월적인 의미에서 바라봐야 하는 문제들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강상중 : 저는 지금까지의 사회 개혁이나 운동이 사람의 마음 속 깊이까지 가 닿지 못했던 실패의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왔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이후 (사회 변혁을 보는 데) 종교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을 분리시켜 보는 시각이 굳건하게 정립되어 이어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일시적이긴 하지만 동학 운동이, 중국에서는 태평천국 운동이 그랬듯이 정치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민중 운동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것을 구시대적인 운동으로 이해했지요. 하지만 그 시각으로 보면 현재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 경계를 명확히 하기보다, 종교에 가까운 어떤 것과 정치·사회에서의 변화를 서로 연결할 수 있는 '회로'를 염두에 두고 책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강신주 : 저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정말 바닥까지 불행해진 사람들이나 자살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과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지금 막 아이를 잃어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이미 서너 명의 아이를 잃은 사람이 다가와 '괜찮다'라고 해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 '위로'가 참 묘한 게, '상황을 받아들여라'라는 체념적인 정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생물적' 차원으로 내려가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 책이 나온 사회가 그만큼 절망적인 수준이라는 방증인 셈이라 안타깝게 느껴지는데요. 저는 이것을 달팽이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커다란 미지의 세계를 앞에 둔 달팽이지요. 하지만 달팽이는 앞이 안 보인다고 바로 스스로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거나 물기가 있으면 조금씩 촉수를 움직이거든요.

하지만 인간은 작든 크든 어떤 계기로 인해서 자살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사회적인 원인과 의미를 갖게 되고요. 그렇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인간과 사회 차원에서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책은 너무 생물 차원으로 내려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앞서 책을 쓰시기 전에 '종말론적'인 느낌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얘기라 그런지 사회적 존재로서 세상을 어떻게 변혁시켜나가야 할지에 대한 전망이 보이기보다, 생물적 수준에서 헐벗게 될 것이며 적자생존하게 될 거라는 너무 어두운 전망만이 남습니다. 이런 잿빛의 전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체념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계속 우려되는 것들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웃음)

ⓒ프레시안(최형락)
강상중 :
아닙니다. 방금 들어주신 달팽이 예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웃음) 저는 60년하고 조금 살아왔을 뿐이지만, 그 동안 자본주의가 우리 삶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제 다시 10~20년 단위를 뛰어넘는 큰 변화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상황에서 당연히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아보게 되겠지요.

그런데 저는, 너무 잿빛이라고 지적해 주셨지만, '미래라는 것은 없다'는 완전하고 철저한 비관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반복해 강조한 것이 바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밝고 성실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하는 행복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낙관적 인생론이나 행복론을 체로 쳐서 비관론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생을 힘껏 껴안고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 테리 이글턴의 말인데요. 책 말미에도 인용한 그의 문장을 저는 '비극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절망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온몸으로 이겨내는 휴머니즘이지요.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사람들은 일상의 영역을 지켜나가기에 급급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따라서 일각에서는 사회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과거 사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장밋빛 미래가 도래하리라 믿는 사람도 없고요. 저는 그렇게 유토피아가 기각되었을 때, 철저한 비관론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그림을 제시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에서 적극적으로 인용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거듭나기(twice born)' 개념을 통해 미래를 그려보겠다는 의미이지요.

일본의 경우, 이번 3.11 동일본 대지진은 1945년 8월 15일 패전일에 필적하는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절망론이 아니라, 철저한 비관을 통해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지독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사회를 재생시키고자 하는 열망은, 한국에서도 다수 존재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 자꾸 제 머리를 스치는 것은 '거듭나기'라는 말입니다. '거듭나기'는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중요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121쪽)

ⓒ프레시안(최형락)

강신주 : 마치 방주를 만드는 노아와 비슷한 심정이신 것 같습니다. (웃음)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거듭나기'가 왠지 한(恨)의 정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자살 역시 수치나 자의식 같은 문화적이고 민족적인 특성과도 관련이 있는 현상인데, 일본은 할복 등의 그러한 문화가 있는 반면 한국은 별로 그렇지 않거든요. 문화적인 측면으로만 보면 '죽어도 안 죽는다'고 할까요. 너무 힘들다보니 오히려 자의식을 내려놓는다고 할까요. (웃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정서는 확실히 '한'과 관계가 있고 나아가 일본적이기보다 한국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뭔가 의식하고 쓰신 결과인지 궁금합니다.

강상중 : 예전에 미국의 사회 사상가인 코넬 웨스트를 만났을 때, 그 분이 "한국인의 한과 흑인들의 블루스·재즈는, 문맥은 다를지언정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블루스·재즈처럼 한 속에는,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부분이 있는 한편, 고통이 있더라도 털어내고 결국엔 극복해 살아내는 측면이 있다는 뜻 같은데요.

그런 점에서 강신주 선생님의 지적은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물론 제가 의도하고 그렇게 쓴 것은 아니지만, 재일 한국인으로서 무의식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한의 정서와 문화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보면, 다른 일본인이 썼으면 이렇게 나올 수 없었던 책일지도 모르겠네요.

강신주 : 마지막으로 전편 격인 <고민하는 힘>과 속편 격인 이 책을 함께 읽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두 권을 어떻게 읽고 고민했으면 좋겠는지를 포함하여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상중 : 현재 동아시아를 보면 한-일, 중-일, 한-중 간에 일촉즉발의 대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싶어 마음이 아플 정도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기존에 표면적으로만 가졌던 과장된 '좋은 관계'가 아니라, 더욱 본질적인 부분에서 소통하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외교나 대선 같은 커다란 이벤트를 넘어 사회의 중핵, 고통을 겪는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있는 포괄적인 접근으로 말이지요.

사실 <고민하는 힘>을 썼을 무렵만 해도 아직 제겐 낙관주의의 단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불행이나 3.11 동일본 대지진을 겪고 철저한 비관론으로 돌아서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비관론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후에 더욱 새롭게 재생하고 싶다는 삶의 긍정과 이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불굴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독자들이 많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고, 그런 모습을 끝까지 응원하고 싶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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