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는 아로요 집권 내내 불안한 정국이 계속됐다. 시민운동가, 노조 지도자, 언론인들에 대한 국가권력과 연계된 세력들의 테러가 반복되고, 아로요를 포함해 측근들의 비리가 잇달아 불거지면서 시민사회단체들의 반정부운동이 계속되었다. 여기에 선거개입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아로요는 궁지로 몰렸다.
▲ 2005년 7월 25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시위대가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의회로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
첫 여성 부통령을 지내고 대통령직에 오른 아로요는 유력 가문 출신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필리핀 9대 대통령을 지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이다. 2001년 집권 초기 그녀는 부패문제로 권좌에서 내려온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는 대조적으로 재능과 청렴성을 갖춘 지도자로 비춰졌다. 그러나 이후 그녀의 정치행태는 정치가문(political dynasty)을 배경으로 권력을 얻은 뒤 온갖 비리를 일삼는 구태정치인, 일명 '뜨라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식민지와 독재체제를 경험한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를 경험한 필리핀이 민주화 이후 가장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놓인 시기가 바로 아로요 집권시기였다.
한국은 필리핀에 이어 민주화를 경험하였지만 더 빠른 속도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해나갔다. 선거제도를 비롯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해 여러 요소가 비교적 순조롭게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성향의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톤은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한국을 민주주의에 성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사례로 소개했다. 이때 그가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유무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는 세력 간의 갈등을 공정한 선거 경쟁을 통해 줄여나가는 과정인 바, 이러한 '갈등의 제도화'는 공정한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선거가 불공정하게 치러졌을 경우 선거에 패배한 세력은 불복종운동을 시작한다. 불공정한 경쟁으로부터 탄생한 권력의 정통성을 승인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박근혜 정부가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문제로 필리핀 아로요 정부와 유사한 상황에 봉착했다. 이른바 '국정원 사건'은 국제인권기구로부터 표현의 자유 위축 등의 문제로 경고를 받은 바 있는 이명박 정부의 '포복형 권위주의'(creeping authoritarianism) 측면과 연관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아로요 정권은 '포복형 권위주의'가 보다 악화된 예이다.
▲ 28일 국정원 규탄을 위해 시민·사회단체가 연 거리 강연회에서 촛불 집회 참석자들이 사회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
'국정원 사건'은 아로요 전(前) 대통령이 직면했던 것처럼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문제와 연관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시민사회 진영의 '국정원 규탄론', '박근혜 대통령 책임론'도 아로요 정부의 정통성을 승인하지 않던 필리핀 시민사회진영의 불복종운동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선거개입 사안과 관련해 아로요 전 대통령이 불법행위의 당사자였던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의도하지 않게' 그 수혜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으나, 이 사건이 권력 재생산을 꾀한 여권세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맥락 속에 있다.
이번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대목을 강조하고 싶다. 우선 '국정원 사건'이 비운동권 대학생들에 의해 먼저 사회적 의제로 띄워지면서 폭넓은 시민운동으로 점차 발전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민주주의의 최소 원칙이 정치적 중립을 준수해야 할 국가기관에 의해 유린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번 기회를 계기로 보수건 진보건 공정 선거가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임을 편의적으로 수용하는 세력은 주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언제부터인가 진보 성향의 지식인 일각에서는 정당 영역 밖에서의 정치적 행위를 민주주의 발전의 걸림돌로 보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명박 정부 하에서의 촛불집회도 비판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번 '국정원 사건'이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시민들의 역할이 컸지 정당들은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정당정치 제일주의는 교정돼야 한다. 물론 갈등의 제도화 차원에서 정당의 역할이 중차대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민정치 역시 사회적 의제 설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나아가 정당의 게으름을 감시하고 정당의 자기 혁신을 압박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로서의 시민정치와 대의민주주의로서의 정당정치라는 두 다리를 사용해 진보한다는, 요컨대 상식에 가까운 민주주의 이론이 한국과 같이 민주화 이후 국면에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여전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이번 '국정원 사건'의 희생자라고 주장한다면, 다시 말해 '시키지 않은 짓' 때문에 억울하게 정통성 위기(legitimacy crisis) 국면으로 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번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등은 물론이고, 불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진지한 노력이 경주돼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추진 등과 같은 사안 때문에 진보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대북 화해정책을 반미-좌경으로 몰고 가면서 '국정원 사건' 정국을 모면하려는 일부 여권 인사들의 태도는 당당하지 못하다.
지난 2012년 4월 1일, 버마에서는 50년 군사독재체제로부터의 이행을 상징하는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국제사회와 국내 민주인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지자 테인 세인 신정부는 국내외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민주주의의 기본 규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시간으로 보나 경제성장의 키로 보나 버마보다 월등히 앞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박근혜 정부가 '한국판 아로요 정부'가 아닌 민주정부로서 원칙 있는 해법과 실행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박근혜 정부는 아로요 정부처럼 시민사회의 불복종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공권력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버마의 신정부보다 못한 최악의 민선정부로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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