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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을 버려야, 참예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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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을 버려야, 참예수를 만난다!

[프레시안 books]한완상의 <바보 예수>

예수의 십자가를 폐기처분한 한국 교회

"한 마디로 한국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를 폐기 처분함으로써 예수님을 추방시켰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자기 비움, 자기 지움의 깊고 높은 사랑의 힘이지요. 철저히 자기를 비우면서 남을 생명으로 채워서 새 존재로 우뚝 세워주시는 힘이지요. 그래서 이 땅에 평화와 공의를 세워주시지요." (<바보 예수>(한완상 지음, 삼인 펴냄))

몸집은 커졌다고 자랑하지만 사실 안으로는 곪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한완상의 질타는 통렬하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절망이 스며든 탄식으로 그치고 있지 않다. 회복되어야 할 예수의 삶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그는 "비움으로서 채우는 역설"을 주목한다. 사랑의 원형은 바로 이것이며, 세상이 이를 바보스럽다고 여긴다 해도 결국 진실로 생명이 이기는 길은 이 외에 없다고 믿는다.

"공적 지식인"이자 신학자의 고백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의 역할과 수난, 이후 통일원 장관, 교육부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공직을 역임한 한완상을 평생 붙들고 있는 화두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기쁨"이다. 평신도로서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새로운 목회의 모델을 창출해온 그는, 사회학자이자 <예수 없는 예수 교회>(김영사 펴냄), <한국 교회여, 낮은 곳에 서라>(포이에마 펴냄) 등의 책을 낸 신학자이기도 하다.

군사 독재 체제의 압박에 망명 생활과 진배없는 세월을 보냈던 미국에서 유니온 신학 대학 수학을 했으니,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사회과학과 신학의 정신적 바탕이 견고하게 훈련되어 있다고 하겠다. 사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소년 시절의 갈망은 한국 사회의 질곡 그 순간순간마다 자신을 던지는 방식으로 구체화되었고, 이제는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한 열정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향점에 대한 고뇌를 쏟아놓는다.

"정글에서와 같이 강자만 승리자로 영광을 독점하는 경쟁 상황에서는 사람은 짐승이 되고, 국가는 괴물이 되고, 시장은 참으로 징그러운 괴수로 변질되고 만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비극의 상황에서 '예수 따름이'는 바보가 되더라도 강권을 잔인하게 사용하거나 꼼수를 부리는 세력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열 경쟁과 승리 지상주의를 제어하는 운동에 앞장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장 감동적인 바보의 모범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몽상가 한완상?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 책의 제목을 "바보 예수"라고 한 까닭을 알게 된다. 한완상은 오늘날 주류 사회의 가치와 삶의 방식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걸 거부하고 새로운 양식의 삶을 선택하는 용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 질서의 탐욕과 승리주의의 시선으로 볼 때는 패배이자 바보스러운 일이 된다. 그럼에도 그는 이 바보 같은 선택과 의지가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 <바보 예수>(한완상 지음, 삼인 펴냄). ⓒ삼인

그런 점에서 한완상은 세상을 그만큼 살았는데도 아직도 몽상의 세계를 배회하고 있는가라는 힐난을 받을 법 하다. 그러나 그는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에 끌려가고 투옥당하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통일원 장관으로 있을 때마저도 색깔 공세로 극우 세력의 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낸 이력의 소유자다.

현실에 둔감하거나 현실을 모르거나 해서가 아니다. 시인 김수영이 그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펴냄)에서 김병욱이라는 시인을 말하면서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라고 했듯이, 한완상의 내면은 강자다. 아니라면 오늘의 현실에서 바보의 삶을 택할 수 있지 못하다.

산 아래 고통의 현장으로 가라

그의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현실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예수의 삶, 그리고 그것이 창출하는 진실의 힘이다. "변화산상"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성서의 대목을 한완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그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베드로가 "이곳이 좋사오니, 초막을 짓고 주님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예수의 영성의 관심은 산 아래 있었습니다. 산 아래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밑바닥 인생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삶, 곧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예수 운동(하느님 나라 건설 운동)을 펼쳐나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황홀한 산꼭대기의 영성 체험 속에 영원히 안주하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 나음과 자유의 삶, 치유와 정의의 삶을 외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산에서 곧 내려오시어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고통당하는 어린이부터 치유해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완상은 산 위의 영광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 고난의 현실에 함께 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가 가야 할 길임을 누차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류 한국 교회는 이런 자세를 바보로 여기고 있을 것만 같다.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요소 가운데 사도신경 문제를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한국 교회의 예배 현장에서 거의 반드시 공동 암송하는 신앙교리다.

사도신경, 예수의 삶을 지워버리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로 읊어지는 이 교리를 부인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사도신경에 대한 도전은 이단이 되는 첩경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한완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독교가 인류 역사 속에서 제도화된 이후 역사의 예수가 교회라는 제도에 흡수되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특히 사도신경이 교회의 중심적 신앙 고백으로 정착된 뒤 그 신앙 고백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온 크리스천들은 예수 없는 신앙 고백을 너무 오랫동안 뜻 없이 고백해온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교회의 조직이 거대화되고 관료제화되면서 조직의 권한이 막강해지고 그 영광이 세상 속에서 휘황찬란해지면서 예수와 하나님도 세상에서 군림하는 절대 독재자처럼 숭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사도 신경의) 고백 속에 사랑으로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간 예수의 역사적 현실성은 어디론가 실종되고, 심판의 공포로 무장된 예수만이 남아서 교회가 마치 죄에 대한 응징의 권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셈이다.

누가 똑똑한 자이며, 누가 무지하고 비천한가?

이런 맥락에서 한국 교회는 그의 말대로, "큰 창고로 변질" 되었으며 "얄팍한 카리스마를 과시하거나 거짓으로 과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홀려" 모이게 하고 있다. 이런 교회 안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꼴지"가 되어 얻는 감격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그건 바보의 것이며, 똑똑한 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축복을 받으려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똑똑하다고 하는 이들을 도리어 미련한 자로 만드시고 무지하다고 천대받았던 이들을 들어 올려 진정한 지혜의 위력을 과시하신다. 여기에서 인간관계의 역전과 새로운 질서가 태어난다.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 원리가 되고, 교만이 아니라 겸손이 평화의 뿌리가 되며 보복이 아니라 용서가 진정한 힘이 되는 것이다. 바보 예수가 온 몸으로 보여준 새로운 삶의 꺾이지 않는 뜨거운 에너지다.

한완상의 바울 읽기

그런 차원에서 그는 바울의 해석에 새로운 시선을 보낸다. 역사의 예수와 함께 한 바 없는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교리화, 과도한 신학화의 혐의를 받아왔다. 그러나 한완상은 바울이 예수를 직접 따르던 제자들보다 더 강력하게 사랑의 힘과 그렇게 만들어지는 공동체의 가치를 받들었음을 주목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 식구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를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셨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서 12 : 19-20)

발선의 축복

한완상은 이런 바울의 태도를 가리켜 "발선(發善)"이라고 부른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 바울의 언명은 예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진정한 승리의 원칙에 대한 선언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고 예수 운동의 패배를 보지만, 바울은 그곳에서 생명의 승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원칙을 직시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완상이 이를 "발선"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정리한 것은 그래서 의미 깊다. 악이 들이미는 칼 앞에서 또 다른 악의 반복적 증폭을 막는 것은 오로지 이 발선의 방법 외에는 없다. 아니면, 보복하거나 정치 공학적으로 계산하거나 체면과 위신을 내세우던지 또는 위장 제스처를 쓰는 것만 남게 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인간관계의 진정한 해결과 평화 그리고 아름다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결국 진실한 마음으로 발선을 주도하는 쪽이 삶과 역사의 참 주도권을 갖게 된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 역전의 기쁨 또는 통쾌함에 대한 보증이다. 문제는 이런 발선의 마음과 삶이 현실에서는 바보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세상의 멸시와 조롱을 이기는 것은 "비움의 힘", "낮아짐의 감동", "선을 앞세우는 결단"에 대한 믿음에 있다.

이 믿음을 상실한 시대는 스스로 비극을 자초한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너무도 많이 겪어왔다. 이제는 진정 이 어둠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올 때이다. 우리 앞에 지금 펼쳐진 현실에서도 "바보의 길"은 역설의 진리로 위력을 드러내 줄 것이다.

한 원로 기독 지식인이 진심을 다해 들려주는 예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의 돌파구다. 그의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내 안에 바보가 해맑게 웃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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