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책을 내는가?
"내가 간절히 읽고 싶은 책들이다."
출판 시장에서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그가 읽고 싶은 책이 출판의 기준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책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그"는 누구인가? 이 시대가 갈망하는 인문 정신을 제1의 원칙으로 삼는다는 출판 장인 김언호다.
그와의 인연도 이제 20년을 넘어 30년의 시간을 향해가고 있는데 막상 그의 책 <한 권의 책을 위하여>(한길사 펴냄)를 읽고는 내가 미처 몰랐던 그와 대면하면서 새삼 많이 놀라고 있다. 한 사회가 철학이 있는 출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참으로 경이로운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권의 책이야말로 탁월한 미학이라는 확신도 갖게 됩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박물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권의 책은 인문학이고 예술학입니다."
월리엄 모리스의 인문주의와 미학적 열정에 매혹된 김언호는 "아름다운 책 한권"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책은 그저 책이 아니라 그 책의 외모와 내면에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정신의 뜨거움과 정밀한 손길이 존재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고품격의 정신은 미학의 정수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책의 가치에 대한 그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있는 출판 그리고 시대정신
▲ <한 권의 책을 위하여>(김언호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국가 권력의 폭력과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을 겪은 그는 시대정신과 책의 관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줄여서 "해전사"로 불렸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한길사 펴냄)이 당대의 독서 열풍을 일으킨 힘에 대해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해전사를 그렇게까지 열독하게 된 것은 그 책과 함께 살아가는 독자들이 그런 책을 이미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두 독자의 요구가 아니라 한 시대의 집단적 요구였습니다. 책과 독자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신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체험은 그에게 저자, 독자 그리고 편집자의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게 한다. 그와 같은 작업을 위해 그는 무엇보다도 출판인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강조한다. 그것은 "변방주의의 정신"이다.
"저는 변방주의를 생각합니다. 변방의 정신과 사상을 말하고 싶습니다. 출판인이라면 물질과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그 변방에서, 아웃사이더로서, 사회와 국가와 민족 공동체와 세계의 살림살이와 사상과 이론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창조적인 지성과 논리적인 이성을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방주의의 미덕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출판은 주류의 힘을 과시하는 시장주의에 물들지 않는다. 사상과 철학, 인문과 사회과학의 최고 저작들을 출간하는 '한길 그레이트북스'와 같은 엄청난 기획이 120권에 달하고 있는 것은 그가 출판을 대하는 진지성의 결과다.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런 기획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지식 구도를 보다 깊이 있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상찬(賞讚)의 가치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독서 공동체의 지평은 "동아시아 독서 대학"이라는 구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동아시아 자신에 의한 동아시아의 재발견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동아시아적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의 의미를 갖는다. "책으로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만들어가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언호가 헤이리 예술 마을에 대한 비전을 펼쳐 보일 때나, 파주 출판 도시의 미래를 기획해나갈 때나 우리는 "책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변모시키려는 한 출판인의 웅대한 의지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세계 도처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책방들과 도서관을 향해 있으며, "보다 진지한 출판을 위한 고민"을 토로한다.
진지한 책들을 위해
일본의 이와나미쇼텐 전 사장 고(故) 야스에 료스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점차 상업성이 강한 대중적 출판에 보다 깊이 있는 책들이 밀려나는 세태에 탄식하고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야스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출판은 지금 큰 난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출판이 홍수를 이루고, 그것에 정통적이고 고급한 출판이 밀리고 있습니다. 결국 한 나라의 출판 문화는 도서관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 질적으로 향상된 출반을 안정되게 유지, 향상 시키는 길은 도서관이 많이 생겨서 좋은 양서를 구입해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어 그는 도서관이 대출률 높은 서적만 구비하는 것이 도서관의 올바른 역할이 아니라고 못박고, 뉴욕에서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책들도 대단히 중요하니까요. 몇 년 전에 뉴욕의 한 도서관에 갔었습니다. 부관장의 안내를 받았는데, 일본 서적들도 많이 구입되어 진열되어 있었는데 부관장에게 제가 물었지요, 이런 책까지 사두십니까? 그랬더니 그 부관장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도서관의 제일 큰 즐거움은 3년에 한 번 정도 대출되는 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언호의 출판 철학도 이런 견해와 일치한다.
"대중적인 출판이란 시장 기능에 의해 자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지만, 이제 한 명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그 어떤 책은 출간될 수 있어야 한다. 한 명의 탁월한 독자가 때로는 한 국가, 한 사회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문명 시대, 지식 정보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좋은 도서관. 좋은 출판
다소 길지만 그 다음의 생각도 인용하고 싶다.
"한 국가, 사회가 누리는 출판문화의 수준이란 한 권의 책을 살인적인 부수로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책 저런 책들이 다양하게 출판되는 발행 종수로 말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수십만 권씩 찍어 돈을 벌지 않고 수십 종 수백 종의 책을 기획 출판해 돈을 버는 행위를 나는 진정한 출판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대로 된 규모와 장서를 갖춘 도서관들이 사회, 문화 인프라로 존재하고 인용된다면, 출판인들이 눈이 충혈이 되도록 장사되는 책을 쫓아다니지 않고 깊이 생각하여 이런저런 종류의 책들을 진지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전문 사서들이 사명감을 갖고 운영하는 공공 도서관 없이 출판다운 출판은 어불성설이다. 공공 도서관이란 형식과 사치가 아니라 우리 국가 사회를 대내외적으로 제대로 살아가게 하는 기본 전제다."
시대를 기획하다
이 책은 그래서 한길사라는 어느 특정 출판사의 기록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지나온 현대 지성사의 고투와 희망이 거쳐 온 길에 대한 증언이며,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공론의 출발점이다. 이는 거대 마케팅이나 브랜드로 좌우되는 출판이 아니라, 책 하나 하나의 내면에 담긴 진실성과 시대적 가치를 주목하는 독서 공동체 만들기이며, 우리 사회의 생각과 판단을 풍부하고 심오하게 길러가는 정신적 인프라의 구축에 대한 비전 제시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출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지식과 성찰의 토대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가장 위대한 시대정신의 능력이라고.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한 권의 책은 그야말로 한 시대를 난데없이 가격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움트게 할 수 있다고.
"이 한 권의 책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 책을 가진 사회는 행복할 것이다. 그 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슴이 뛰고, 우리의 지성이 격동하며 우리의 시야가 확 트이는 그런 감격을 맛보고 싶다.
시장이 만들어주는 베스트셀러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간절히 읽고 싶은 책 한 권의 탄생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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