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군(왕비의 소생)도 아니고, 부왕이 특별히 아끼는 후궁의 소생도 아니었으며(공빈 김 씨가 세상을 떠난 후 임금은 또 다른 후궁인 인빈 김 씨를 총애했다), 큰아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17세에 세자가 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올라오던 위기 상황에서였다. 성대한 의식은 고사하고, 세자가 되자마자 피란 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리고 곧 분조(分朝, 둘로 나눈 조정 중 하나)를 이끌며 항전을 독려했다. 일본군 주둔지 근처를 돌아다니고 때때로 노숙도 해야 하는 고된 길이었다.
분조가 성과를 거두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앞길은 여전히 가시밭길이었다. 세자는 권위가 손상된 '상처 입은 지존'(선조)의 심기를 늘 살펴야 했다. 명나라는 선조와 세자를 이간질했을 뿐만 아니라 세자로 승인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젊은 왕비(훗날 인목대비)에게서 적자(영창대군)를 얻으면서, 세자의 자리는 더 불안해졌다.
1608년 선조가 세 살배기 영창대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면서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국제적으로 공인받지 못한 세자로 산 지 16년 만이었다. 그의 집권기에 친형(임해군)과 영창대군을 비롯한 혈육들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1623년, 일부 신하들이 왕을 끌어내리고 왕의 조카 능양군(인조)을 옹립했다.
폐위된 왕은 유배됐다. 유배 직후 아들, 며느리, 아내를 모두 잃었지만, 모진 목숨은 18년이나 더 이어졌다. 1641년, 귀양지 제주에서 66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조선 역사에서 연산군과 함께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이다.
'혼군'에서 외교 전문가로…광해군의 부활
▲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
이런 상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책이 나왔다. 오항녕이 지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이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 2010년)에서 한 장을 할애해 광해군 담론을 분석한 오항녕이 본격적으로 광해군 시대를 다룬 책이다. '광해군에 대한 21세기의 반정(反正)'을 표방한 이 책의 핵심 주장은 광해군이 철저히 실패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광해군=혼군'이라는 인식의 부활이다.
나는 한명기의 <광해군>(역사비평사 펴냄)과 대비하며 오항녕의 책을 살펴볼 생각이다. 한명기는 광해군을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로 평가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또 한명기의 책은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를 널리 확산한 저서로 꼽힌다(2000년 발간 후 23쇄를 찍었다!). 오항녕이 한명기의 책을 인용하며 "광해군이 과연 그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가"라고 질문한 것도 이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는 한국사 연구자가 아니다. 광해군에 관한 1차 사료들을 하나하나 살핀 적도 없고, 2차 연구 자료들을 꿰고 있지도 못하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오항녕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타당한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연구자들의 몫이다. 두 학자의 논지를 대비해 쟁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글의 목표다. 물론 독자로서 든 약간의 의문도 들어간다.
두 책을 비교하기 전에 먼저 짚을 것이 있다. 그동안 오항녕의 책을 소개한 언론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이나바 이와키치에 관한 대목이다.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한 원조라는 내용이다. 사실이다. 오항녕의 책 앞부분에도 이에 관한 대목이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이것이 오항녕의 책에 처음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명기도 이를 비중 있게 다뤘다. 연구자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나 연구사에 친숙하지 않은 적잖은 독자는 구체적인 내용을 살피기도 전에 기사들만 보고 '아니, 광해군 재평가가 식민사학자 따라 하기였다니…'라고 단정할 우려가 있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오항녕의 <광해군> "잃어버린 15년"
오항녕은 책에서 주로 광해군 집권기의 내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임해군 옥사, 대동법, 경연을 비롯한 조선의 문치주의 시스템, 거듭된 궁궐 공사 등을 세밀하게 살핀다.
오항녕은 임해군 옥사가 반역을 꾀해 벌어진 옥사라고 하기에는 그 증거가 미미하기 그지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임해군 문제를 덮기 위해 조정이 명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조선-명 외교 관계를 어지럽히고 경제적 곤궁까지 자초했다는 비판이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대동법은 대표적인 민생 안정책으로 꼽힌다. 오항녕도 대동법을 조선 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정책 변화로 본다. 그러나 오항녕이 보기에 대동법이라는 치적은 광해군의 몫이 아니다. 오항녕은 광해군이 대동법이라는 정책의 성격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대동법 확대 실시 요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그동안 학계에서 애매하게 넘어가거나, 정반대로 '광해군은 대동법을 추진했는데 양반 지주들이 반대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아울러 오항녕은 광해군 시대에 경연이 거의 열리지 않았다는 데 주목한다. 경연은 군주와 신하가 함께 공부하면서 국가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다. 그가 보기에 경연이 무용지물 취급을 받은 건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시스템의 붕괴이자 문치주의의 위기다. 그는 광해군이 '아프다, 덥다, 춥다' 등 온갖 핑계를 대며 경연을 기피하면서 죄인을 친국하는 일에 집착했다고 비판한다.
연이은 궁궐 공사도 오항녕의 비판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다시 광해군 재평가론자들을 공박한다. 광해군이 폐위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인 궁궐 공사 문제에 눈감거나 어물쩍 넘어갔으며, 설령 주목하더라도 다른 정책과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왕권 강화'라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숨어버렸다는 비판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 궁궐은 대부분 폐허가 됐다. 오항녕도 궁궐 공사가 필요한 시기였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쳤다는 것이다. 왕실의 권위를 적절히 다시 세우는 수준을 넘어, 경복궁의 열 배에 달하는 인경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 공사를 거듭했다는 지적이다.
오항녕은 이 과정에서 백성을 쥐어짜고 재정을 탕진했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궁궐을 짓기 위해 1년 치 무기 제작에 들어가는 철의 열 배를 단 석 달 동안 허비하고, 군량까지 끌어다 썼다는 것이다. 그는 무리한 궁궐 공사가 대동법 시행을 가로막은 요인이며, 광해군이 궁궐에 집착하면서 후금에 대한 방비를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내정에 대한 비판은 광해군의 외교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진다. 책에서 광해군의 대외 정책을 다룬 부분은 분량이 많지 않지만, 결론은 명확하다. 대후금 정책은 기조도, 원칙도 없었고 광해군에게는 상황 통제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항녕은 1619년 심하 전투(강홍립이 이끄는 1만3000여 명의 조선군이 후금군에 패해 9000명 정도가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를 거론하며, 준비와 전략이 전무한 상태에서 파병한데다가 어설픈 기회주의적 투항으로 군사들만 잃은 졸전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참패는 재정 파탄과 군정 방치가 빚어낸 결과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항녕은 이런 난맥 속에서 광해군이 정책 판단 능력을 상실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국정에서 손을 놓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본다. 그의 눈에 비친 광해군 집권기는 "잃어버린 15년"이다. 민생 회복, 사회 통합, 재정 확보, 군비 확충, 문화 발전 등 어느 것 하나 이룬 것은 없고 오히려 역주행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삶을 시작한 건 광해군을 몰아낸 이후이며 이런 의미에서 '반정'은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한명기의 <광해군> "광해군 죽이기는 부당하다!"
▲ <광해군>(한명기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
오항녕과 달리, 한명기는 대동법을 광해군의 업적으로 본다.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동법에 호응한 백성들과 "대동법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며 반발한 기득권 세력 사이에서 광해군이 대동법을 유지한 것은 하층민에 대한 정권 차원의 양보였음이 분명하다는 평가다.
이런 양보가 가능했던 건 백성의 곤경에 대한 현실감 있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명기의 생각이다. 그는 광해군이 순탄하게 즉위한 임금이 아니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광해군은 세자가 되고 나서 27개월을 지방에서 보내고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도 많은 곳을 다녔다.
광해군이 전국을 다니던 임진왜란 당시 백성의 삶은 처참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굶주림에 지친 조선 사람들은 명군이 토한 음식물을 서로 먹겠다고 다퉈야 했던 시절이다. 광해군이 그 장면을 직접 봤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참상을 곳곳에서 마주쳤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한명기가 말한 현실감 있는 인식은 이런 밑바닥 상황을 접한 광해군의 경험과 관련돼 있다.
또 한명기는 <동의보감>에 주목한다. <동의보감> 완성 사실만 간략히 언급한 오항녕과 달리, 그는 <동의보감> 간행이 커다란 의미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광해군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를 뒤집어쓰고 귀양살이를 하던 허준에게 도성 출입과 내의원 의서 열람을 허가하는 등 간행 작업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는 광해군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같이 조치한 것은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한명기가 광해군의 내정을 모두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광해군이 임해군 처벌 등의 문제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고, 역모 옥사가 연이어 벌어지면서 정국 구상이 헝클어졌다는 내용도 책에 담겨 있다. 오항녕과 마찬가지로, 거듭된 궁궐 공사에도 비판적이다. 그는 광해군이 집착한 이 사업이 농민을 병들게 하고 궁극에는 광해군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아울러 내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책임은 광해군 스스로 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한명기 역시 광해군이 경연을 거의 열지 않았다는 점도 거론한다. 그러나 오항녕과 달리, 이를 시스템 붕괴 근거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광해군이 경연을 피하면서도 국방과 외교 문제만은 반드시 챙겼다는 대목이다.
책의 3분의1 정도를 할애해 한명기가 찾아낸 광해군은 외교 전문가이자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국방 문제에 관심을 쏟은 군주다. 그는 광해군이 어느 국왕보다 주변 국가의 동향을 탐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후금의 기마병에 대비하고자 화포를 비롯한 무기 제작에 힘썼다고 본다. 원수로 여겨지던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 조총 등을 구입할 수 있을지 은밀히 타진한 것도 대륙의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명기는 광해군이 심하 전투 이후에도 계속된 명나라의 출병 요구(책에 소개된 사례는 세 번)를 거부했다는 데 주목한다. 이때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해야 한다며 파병을 주장하는 신하들과도 맞서야 했다. 그는 광해군이 명에 외교적으로 역공을 펴 추가 출병 거부라는 성과를 거뒀으며, 이 과정에서 '명나라를 주물렀다'고까지 평가한다. 오항녕과는 상반된 시각이다.
잃어버린 15년? 그럼 인조 집권기는?
이처럼 두 학자가 재구성한 광해군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폈듯이 오항녕이 제시한 사안들은 대부분 한명기의 책에서도 다뤄졌다. 물론 앞에서 살펴봤듯이 강조점, 비중, 시각이 다르고 그에 따라 평가도 다르다.
같은 자료를 보더라도 학자에 따라 다르게 역사를 구성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평범한 독자로서 드는 몇 가지 의문과 생각을 밝힌다. 한명기의 책에도 의문이 드는 대목이 있지만, 오항녕의 책에 대한 서평인 만큼 그에 대한 의문 위주로 제기한다.
두 학자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사안은 대동법과 외교 문제다. 내게 대동법과 관련해 어느 쪽 의견이 맞는지 판단할 능력은 없다. 그건 연구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대동법은 광해군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인 만큼 연구자들의 치열한 토론을 기대한다.
외교-국방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항녕에게 의문이 든다. 한명기 책에는 심하 전투 이전에 광해군이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심하 전투 이후에는 안팎의 압력을 견디며 추가 파병을 계속 거부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정보 수집에 심혈을 기울인 모습도 나온다. 이에 관한 1차 사료들을 오항녕도 봤을 터인데, 왜 이런 사항들을 충분히 다루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내용을 충분히 반영했어도 '원칙 없는 대외 정책'이라는 평가가 가능했을까?
오항녕의 책에는 광해군의 대외 정책에 관한 내용이 많지 않기에, 한명기가 제시한 여러 사례에 대한 그의 평가를 하나하나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대한 그의 결론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오항녕은 광해군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편향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오항녕이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며 긍정적으로 재평가한 것은 부적절하며, 따라서 그간 소홀히 다뤄진 내정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궁궐 공사 등으로 재정이 파탄 나는 상황에서 파병을 비롯한 대외 정책은 속 빈 강정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론이 과연 적절한 평가였는지는 의문이다.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을 종합적으로 진단하기보다는 한쪽으로, 즉 기존과는 반대 방향으로 치우친 결론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더해 내정 부분에서 <동의보감>의 편찬과 같은 사항을 충분히 다루지 않은 것도 아쉽다.
"잃어버린 15년"이라는 주장에도 의문이 든다. 이 규정의 적절성은 대동법과 외교 문제 등에 대한 학자들의 토론 결과에 따라 판명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다. 다른 통치자들의 시대에 대한 평가 잣대와 비교할 때 공정한가 하는 문제다.
인류 역사에서 백성에게 완벽한 통치자가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렇기에 특정한 시기와 다른 시기를 비교하며 백성의 삶을 살필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이것은 광해군에 대한 평가에도 적용된다. 오항녕의 책은 광해군 집권기만을 다루고 있지만, 어떤 시기든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명기가 제기한 '광해군을 쫓아낸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지켜졌는가' 하는 질문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 명분은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광해군 시기에 벌어진 부정을 바로잡겠다던 이들은 광해군 때 권신들이 했던 나쁜 관행을 답습했다. 예컨대 광해군 때 권신들이 백성 등에게서 뺏은 토지는 광해군을 몰아낸 세력의 손에 넘어갔고, 이를 비난하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시중에서 불렸으며 익명서도 나돌았다.
오항녕은 궁궐 공사 중단 등을 거론하며 "반정은 말 그대로 인민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다. 오항녕과 달리, 한명기는 이른바 반혁명 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 아래 기찰이 강화됐을 뿐 백성의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별로 없었다고 평가한다. 또 기찰이 후금에 대한 방어 태세를 확립하는 데도 저해가 됐음을 지적한다. 반역을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장수들이 군사 훈련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짚어볼 대목이다. 한명기는 광해군을 몰아낸 세력이 일관성 없이 척화와 주화를 반복하다가 더 큰 비극을 불렀다고 본다. 심하 전투를 거론하며 광해군을 비판한 오항녕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볼까? 1만3000여 명의 인명 손실을 비판하며 이를 "잃어버린 15년"의 근거 중 하나로 삼은 그에게 수십 만 백성이 죽거나 어육으로 전락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벌어진 인조 집권기는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린 26년'일까?
한 가지 덧붙이면, 심하 전투의 책임을 광해군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재조지은을 내세우며 광해군을 안팎에서 협공한 명나라 및 조선의 신하들에 대해서도 더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오항녕은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인조 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 광해군이 부활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건 다른 연구자들이 답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한 건 근대주의 역사학 여부보다 잣대의 일관성, 그리고 온몸으로 시대를 살아간 백성들의 삶이다. 광해군을 미화할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다.
이병헌의 <광해>, 설 자리가 없다?
▲ <광해, 왕이 된 남자> 포스터. ⓒmovie.naver.com |
그런데 오항녕이 재구성한 광해군이 재평가된 광해군보다 실제에 훨씬 근접한 것이라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설 자리를 잃는 것 아닌가 하는 객쩍은 생각이 든다. 설정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엉망진창이었다고 인정하는 연산군 시대를 다룬 영화, 예컨대 '광해군 버전 <왕의 남자>' 같은 게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예술 장르에 역사적 사실과 논리의 잣대를 지나치게 들이댈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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