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다섯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지금 문학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문학평론가 우찬제 서강대학교 교수가 답합니다. "지금 문학 비평은 세상을 바꾸는 인문학의 전위가 되어야 합니다!"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③ 세 번째 질문 :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④ 네 번째 질문 : 현대 동양 철학은 가능합니까? |
1980년대 초에 김현은 1970년대 비평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제야말로 문학 비평가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 문학 비평은 문학 비평이 문학 비평으로 남을 수 있게 싸워야 한다. 그 싸움과 동시에 문학 비평은 문학 비평이 정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 비평이란 무엇일 수 있을까. 1980년대의 앞자리에 나는 그 질문을 나에게 되풀이하여 던진다." ('비평의 방법', <전체에 대한 통찰>(나남출판 펴냄, 1990년), 213~214쪽)
이런 질문은 매우 근본적인 것이어서 언제든지 비평가들로부터 제기됨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현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거듭 되물어진, 그만큼 오래된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과 그 이후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소회는 매우 곡진하다. 김현이 타계한 1990년 이후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고, 또 20여 년이 지난 요즘은 더욱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정보 자본주의와 소비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위력 앞에서 그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불연속적인 것과 연속적인 것이 얽히고설킨 나날의 삶은 존재의 불확정성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질주하는 문화 변동은 문화 지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여겨질 정도다. 공유하는 인간 경험과 문화 체험의 정도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그에 따라 개개인의 삶과 의식은 더더욱 파편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겉보기에는 이전보다 풍요롭고 화려하고 다채로워 보이지만, 정작 인간의 내면적 행복 지수나 문화적 감동 지수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작은 인간, 왜소한 인간들의 불안감이나 피로감, 존재 박탈감들이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작은 인간들은 나날이 상품을 소비하며 살지만, 소비의 주체인 자신마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더 큰 타자에 의해 소비되거나 소진된다.
▲ 문학평론가 김현. ⓒ뉴시스 |
그렇기보다는 여러 경로에서 의심과 의혹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비평가들이 문학적 진정성과는 별개로 상업주의나 저널리즘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내지 강화하기 위한 소아적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많은 작품들을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 비평가의 비평적 판단력이나 감식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 비평적 평가 기준이 모호하거나 타당하지 않다는 것, 문학 텍스트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을 앞세운 발언만을 하거나 문학 생산이나 문화 수준 향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지엽말엽적인 논의로 시간을 소모한다는 것, 기생적인 주례사 비평에 머문다는 것, 등등 여러 의혹과 추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이런 의혹의 시선이나 추문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가들에 의한 불만은 예로부터 많이 있어 왔다. 콜린스를 "작품을 좀먹고 사는 벼룩"으로 혹평한 테니슨의 말이나, "시인을 평가하는 것은 오로지 시인만의 임무이며, 그것도 모든 시인의 임무가 아니라, 최상의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 벤 존슨의 지적을 비롯해, "악의에 찬 평자들은 시시한 작가들의 하위 서열 중에서도 이류에 속한다"(쉘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평자들은 생산 능력을 잃어버린 환관들의 모습을 발견한다"(조지 스타이너), "심지어 가장 저급한 시도 그 시에 대한 언급과 같거나 더 나을 수밖에 없다"(그레이) 등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E. M. 포스터 역시 "비평은 적절치 못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비평이 한 번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고, 대신 해서는 안 될 것만 지적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문학 비평의 전제>(현대미학사 펴냄, 1998년)에서 이런 사례들을 원용하면서 루스벤은, 평자들은 항상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로부터 평가 지침을 받음으로써 평가 기준의 하향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준으로 인해서 항시 부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젊은 작가들을 미리 규정된 원칙에 의거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마치 뒷거울을 보면서 운전하는 것과 같으며, 기껏해야 앞에 놓인 현재의 상황과 충돌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또 '비평가 없는 예술과 독자 없는 비평가'라는 시사적인 제목의 글에서 미국의 비평가 메리 프랫은 "대부분의 예술 작품에 대해 사실상 비평이 쓰이지 않고 있는 형편이고" "대부분의 비평이 읽히지 않고 만다"(<비평이란 무엇인가>(예림기획 펴냄))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김현이 비평가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던 무렵이었다. 물론 이런저런 의혹의 시선들이 시비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에 대한 시비보다는 발본적 성찰을 통해, 문학 비평이 무엇으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할 때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비평은 어떻게 그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문학과 현실의 전체적 상황과 맥락의 성찰을 위한 비평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두루 아는 것처럼 정보/소비 자본주의가 만개한 가운데 현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생태계의 전면적 균형 상실과 아울러 생명의 전체성에 대한 인간 감각의 파괴와 상실 경향 심각하다. 그런 가운데 문화 일반은 비속화 일로에 있으며, 상징적이거나 실제적인 폭력으로부터 인간 삶은 자유롭지 못하다.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계급 문제나 불평등 문제에 대한 성찰은 물론 한반도 내적으로 분단 문제, 민족 문제 역시 비평적 성찰의 긴장을 요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한 경쟁 시대의 타자의 윤리학이나 디지털 시대의 윤리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적극적인 성찰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 일상생활 그 자체도 얼마나 문제적인가. 근대의 이성이 의심받고 전체성이 회의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나, 우리는 여러 가지 맥락에서 그것들을 의심하고 회의하면서도 현묘하게 새로운 시대의 윤리 감각에 대해 역동적으로 성찰할 필요를 느낀다. 현실과 문화, 문학에 대한 진정한 비판과 전면적 성찰을 바탕으로 문학과 인문 문화의 건강성을 추구하고, 세계의 생명력의 불꽃을 다시 지필 수 있어야 한다. 문화적 현실적 맹목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으로 인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새롭게 굴릴 수 있는 비평적 긴장과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러니까 비평의 종언은 없다. 문제가 깊고 넓을수록 비평적 주제도 심화될 수 있는 법이다.
둘째, 해설과 비판의 담론을 넘어 비평은 생산과 창조의 담론을 지향해야 한다. 물론 기존에 비평이 견지했던 해석과 비판의 담론은 그 자체로 새로운 창조와 생산을 위한 기획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생산과 창조의 담론이 될 수 있을 때 비평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을 터이다.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현실에서 인간 의식의 신명에 상응하는 상상력을 회복하는 방향은 어디에 있을지, 새로운 문학 지도 그리기를 위한 가능 세계 탐색의 가능성과 방향은 어디에 있을지에 대해, 비평이 창조적인 지혜를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경험된 세계이거나 경험하기를 소망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적 공동 제작자라는 자의식을 비평이 지닐 수 있을 때, 비평은 창작의 진정한 타자가 될 수 있을 터이다.
나아가 문학의 새로운 존재 방식에 대해서도 창작자 이상으로 고민과 지혜를 생산적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비평과 창작과의 관계에서 비평이 사후성(事後性)에만 머물지 말고, 비판과 반성의 사후성은 물론 새로운 창조와 생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동시성이나 사전성(事前性)의 영역까지 포괄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시대의 의미심장한 주제들에 대한 예민한 탐색과 첨단 감각, 오랜 인문적 지혜와 교양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생산된 비평들은 독자들과 행복한 소통의 지평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 자설(自說)적인 비평 이론을 계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살아있는 비평적 쟁점을 부각시키는 가운데 대화적 비평을 모색해야 한다. 가벼운 인상 비평이나 가십성 비평이나 주례사 비평 등이 만연하면 비평은 점점 왜소화되고 주변으로 밀려날 운명에 처할 것이다. "작품을 좀먹고 사는 벼룩" 신세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또 소비 자본주의의 쳇바퀴에 휘말려 가볍게 소비되거나 소진될 여지마저 있다. 무엇보다 이미 이루어진 창작물에 대한 기생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터이다.
비평이 자기 정체성과 존재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우선 비평 이론에 대한 심화된 성찰이 요구된다. 20세기 후반에 서구에서 많은 비평 이론들이 개진되고 실험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형식주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비평, 정신분석 비평, 독자 반응 비평, 신화 비평, 탈구조주의 비평, 탈식민주의 비평, 페미니즘 비평, 신역사주의 비평, 생태주의 비평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의 많은 비평 방법들을 우리는 학습했다.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루카치, 골드만, 마슈레이, 미하일 바흐친,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크리스테바, 주디스 버틀러, 프로이트, 융, 라캉, 푸코, 들뢰즈, 가타리, 지젝, 지그문트 바우만, 조르조 아감벤과 그 밖의 많은 논자들을 탄력적으로 주목한 바 있다. 여기에 노장 사상이나 불교의 윤리 감각, 유가의 사상이나 퇴계학 등 동아시아의 담론들을 보태고 융합하고 새롭게 성찰하면 수용을 넘어선 새로운 비평 이론의 구상도 가능할 것이다.
비평 이론의 틀이 넉넉하고 튼튼할 때 비평 담론의 적절성 및 정당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비판적 대화나 논쟁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비평 이론을 바탕으로 한 전작 비평의 저작도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단편 소설 중심의 근대 소설사가 어느덧 당당한 장편 소설의 시대를 맞이했다. 비평도 자기 체계를 명실상부하게 갖춘 전작 장편 비평의 시대를 열어나갈 때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사례가 있겠지만, 노드롭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1957년) 같은 경우를 떠올려 보기로 한다. 현대 미국 문학 비평을 개관하는 자리에서 윌튼 리츠(프린스턴 대학 석좌교수)는 새로운 비평의 시대의 전주곡으로 노드롭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를 주목했다. 프라이에 와서야 비로소 비평가는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힘을 가지고 더 이상 예술가의 시종이 아닌 동료가 되었다고 리츠는 지적한다.
인간성과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프라이는, 비평가가 자신의 독자적인 창조력을 가지고 어떻게 예술가와 독자 사이에 위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평의 해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조직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리츠의 견해다. 일찍이 영국의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도 1958년에 쓴 서평에서 "이 책은 핵심적이고 자주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면에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 되어 버린 비평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적은 바 있다.)
넷째, 문학 교육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비평의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비평은 예로부터 폭넓은 의미에서 문학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인문 문화적 가치를 계발하고 보존 전승하며, 비판적 시민을 교육하며, 문화적 능력을 함양한다는 측면에서 문학 교육과 비평은 실질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 문학의 위기, 비평의 위기, 문학 교육의 위기는 서로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문학 교육 현장은 수준 높은 문학 교양과 비판적 안목을 지닌 독자 내지 예비 창작자를 양성하는 곳이다. 이 목표가 실효를 거둘 수 있을 때 한 사회의 문화적 능력은 향상된다. 진정한 문학과 비평의 생산과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도 그 기반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문학 교육이 잘되기 위해서는 교육 재료가 충분해야 한다. 좋은 작품과 그것을 읽고 판별하고 해석하고 비평할 수 있는 안목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비평가들이 그런 실질적인 교육 재료를 폭넓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 교육 현장에 양질의 재료와 동시대의 문제적 측면들에 대한 살아있는 쟁점을 제공할 수 있을 때, 비평의 사회적인 영향력도 증대될 것이며, 독자 없는 비평의 불우한 운명도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섯째,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안팎이라는 양 방향으로 열려 있다. 한국 문학과 그 담론을 세계에 널리 효과적으로 알리는 것이 그 하나라면, 세계 문학의 수준에 비춰 한국 문학이 부단히 혁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10여 년 전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문학 교수와 대화를 나눌 때의 일이다. 내가 라캉과 지젝 이야기를 하니까, 그녀는 그런 담론은 자신도 잘 아니 자기가 모르는 동양/한국의 다른 담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작년(2011년) 가을 멕시코 과달라하라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 문학 이야기를 하는데, 에스파냐 어 독자들은 한국 문학의 맥락에 대해 더 듣고 싶어 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잘 만드는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 이야기의 다양한 맥락을 알고 싶어 했다.
세계 문학적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한국 문학의 특수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심화된 담론을 정립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참으로 많다. 드라마나 영화, K팝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문학으로 심화될 때, 한국적인 가치의 세계화는 그 진정한 깊이를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세계 문학의 첨단 감각에 대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과 탄력적으로 소통하고 혁신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혜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우리 시대 비평가들의 몫이다. 번역이나 홍보의 문제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번역되고 홍보될 것의 심미적 가치를 혁신하는 것이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여섯째, 전위적인 실험 정신으로 비평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흔히 언어는 소리와 침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창작 텍스트도 그렇듯이 비평도 실험된 영역과 실험되지 않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실험된 고답적인 비평 언어와 관점, 스타일로는 새로운 시대의 비평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 실험되지 않은 영역에서 새로운 비평의 탄생을 부단히 꿈꾸어야 한다. 구축, 해체, 재구축의 과정을 반복해 왔던 담론의 질서와 계보를 헤아리면서, 정녕 새로운 비평 언어와 관점, 스타일로 문학과 비평의 역사를 새롭게 열겠다는 다부진 정념과 지혜가 요구된다.
우리 시대 비평의 과제는 그밖에도 더 많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비평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여전히 꿈꾸고 싶다. 비평이 사회 문화의 주요한 조감도나 나침반 역할을 담당하고, 인문 문화의 신경 중추가 되어 문화 대중들과 폭넓게 소통하는 꿈을 말이다. 의미심장한 문학 담론으로 한국과 세계의 문학/문화 지도를 역동적으로 바꾸어나갈 소망을, 비평의 이름으로 견지하고 싶다.
창작 텍스트를 추수하는 소박한 해설자를 넘어서서 비평으로 문학의 꿈을 새롭게 꾸고, 인문적 지혜의 벼리를 알게 하려는 역동적 기획을, 추구하고 싶다. 인문 문화의 전위가 되고, 인문 문화의 소통을 통해 문화 대중들과 위안과 행복의 감각을 교감할 수 있는 그런 담론의 공간으로서 비평의 자리를 모색하고 싶다. 그러니까 새로운 가능성을 탐문하는 도전으로서의 비평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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