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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는 틀렸다! 지금은 새로운 신을 찬양할 때!"

[환원주의에 반대한다]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다시 만들어진 신>

자연주의적 신성 이해

스튜어트 앨런 카우프만의 <다시 만들어진 신>(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오랜만에 꼭꼭 씹어 먹은 쫄깃쫄깃한 책이다. 처음 읽으면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을 떠올렸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도킨스'나 '만들어진 신'을 책 이름에 포함시켜 책을 출판하는 문화 현상을 지칭하는 '도킨스의 벼룩(Richard's Fleas)'에 포함될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혼돈의 가장자리>(국형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쓴 '복잡성 이론'의 대가인 바로 그 스튜어트 카우프만이라는 것과, 책의 원래 제목이 <신성을 다시 만들기 : 과학과 이성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견해(Reinventing the Sacred: A New View of Science, Reason, and Religion)>인 것을 보면 일부러 도킨스와 엮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주제가 주제인지라 카우프만이 의도적으로 도킨스를 거론하지는 않지만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서 그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나타난다. 한국의 출판사는 이런 것까지 고려해서 제목을 <다시 만들어진 신>으로 정했을까? 그렇다면 그 편집자는 고수다. 책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나, 출판 마케팅에 있어서나.

카우프만은 이 책을 왜 썼을까? 제목만 보면 평소 카우프만의 학문 활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주제다. 책을 쓴 동기를 이해하려면 출판된 2008년을 주목해야 한다. 2000년 이후 영미 출판계는 '종교'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 유행했다. 세계 지성계에 명함이라도 내밀려면,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이 '종교'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책을 써야 하는 분위기였다. 인류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진화 생물학자, 인지 과학자, 뇌 과학자 등이 쓴 종교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새로운' 시각은 대부분 '과학적'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진화 생물학'이나 '진화 심리학'에서 왔다.

카우프만의 책도 이런 흐름의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를 자극한 결정적인 계기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Breaking the Spell)>(김한영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이다. 이들은 현대 과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종교를 다루고 있는데, 그 기본적인 방식이 환원주의적이라는 것이 카우프만의 평가다.

카우프만은 산타페 연구소(Santa Fe Institute) 이래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복잡성의 원리'를 기반으로 생명계를 창발적인 자기 조직화에 따라 진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카우프만은 이런 반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신성의 재발명'을 이야기한다. 과학자로서 철저한 자연주의자인 카우프만은 환원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창발성의 확장, 생명계에서 인간 문화로

▲ <다시 만들어진 신>(스튜어트 앨런 카우프만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다시 만들어진 신>은 그다지 크지 않은 활자로 본문만 4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다. 책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전반부는 과학의 한계, 주로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창발성을 지닌 생물계가 물리학으로 전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창발계는 법칙적으로 진술할 수 없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무법적(lawless)'이다. 카우프만은 이와 더불어 우주에 주체성, 의미, 가치 등이 등장하는 데 이런 것들은 미래에 인과적 영향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결코 사전에 법칙적으로 예측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창발적인 계는 과학만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미스터리' 요소를 간직한다. 이런 전반부의 이야기는 이전 저작인 <혼돈의 가장자리>와 등에서 논의되고 있어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전 논의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문턱이 높아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시 만들어진 신>의 새로운 면모는 후반부에 나타난다. 전반부의 내용은 후반부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한다. 생명계의 창발성이 경제, 역사, 마음, 문화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 그가 후반부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과학적 논증을 바탕에 깔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카우프만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가치의 세계를 구성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그 세계는 환원주의를 넘어서 생명계와 인간 세계의 창발성과 근원적인 창조성이 구현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가치와 윤리가 자연적이며 과학적 위치에 토대를 두면서, 인간은 진화하는 생명계와 함께 인간의 경제와 문화라는 창발적인 복잡성이 구현된 놀라운 그물망에서 공동의 창조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카우프만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나 공감하고 존중할 수 있는 공통의 세계관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신'을 배제하고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창발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자연을, 자기 조직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자연의 신성'을 재발명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고 지구적 윤리의 출발로 삼아야 할 것을 호소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새로운 호소를 하는가?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

카우프만의 그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그 역시 과학적으로 토대를 둔 객관적 사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는 세계관이다. 삶의 실천을 위해서 '존재'에서 '당위'로 이끌어내는 과정을 데이비드 흄은 반대했지만, 카우프만은 흄의 지적에 반만 동의할 뿐이다. 오히려 생명 세계와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행위 주체성, 가치, 행동은 존재의 다른 요소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생물권의 진화 과정에서 창발된 것으로, 우주의 생명 세계의 속성이다. 따라서 존재와 당위의 분리는 절대적인 것도 정당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카우프만은 이런 세계관이 왜 요청된다고 하는가? 그것은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현대 세속 사회가 몇 가지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다고 한다. 신앙과 이성의 분열, 과학과 인문학의 분열, 영성의 결핍, 그릇된 환원주의적 과학적 세계관으로 인한 가치의 부재 등이 그것인데, 신성의 재발명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상처의 치유는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연주의적 신성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 윤리의 구상이라는 작업으로 구체화된다. 이 둘이야말로 <다시 만들어진 신>의 핵심이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원주의를 넘어서

카우프만은 현대 과학적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 환원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생명 세계와 인간 세계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환원주의를 틀렸다고 하거나 한계가 있다며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로서 그는 환원주의가 엄청나게 생산적이고 유용하다고 공감한다.

다만 카우프만은 우리가 환원주의의 위상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환원주의로 세상의 진리를 다 알아낼 수 있다거나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믿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환원주의로만 설명할 수 있는 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환원주의는 궁극적으로 기본 입자들의 상호 작용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입장이다. 스티븐 와인버그의 "설명의 화살표"들이 모두 아래를 가리키는 것처럼, 설명의 시선이, 사회에서 사람으로, 기관으로, 세포로, 생화학으로, 화학으로, 결국에는 물리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런 환원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오진 "사건"만을 허용한다.

이런 환원주의는 거의 400년 동안 서구 문명을 '갈릴레오의 주문(the Galilean Spell)'에 가두어 두었다. 이것은 우주의 모든 사건들이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시각으로서, 선형적인 인과 관계와 기계론적 결정론으로 특징한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고 세계 윤리를 구성하려는 카우프만의 본격적인 첫 걸음은 '갈릴레오 주문 깨기(Breaking the Galiean Spell)'로 시작한다.

우선 그는 생물학과 생물의 진화가 물리학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환원주의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생명이 우주에서 자연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생명과 더불어 행위 주체성(agency)이 등장 했고,행위 주체성과 더불어 가치와 의미와 행동이 등장했다. 이것들은 '입자'만큼이나 실재적인 존재이다. 이것들은 이런 의미에서 우주의 실재들이며, 창발적이다.

이것들을 물리적으로만 설명해도 충분하겠는가? 이것이 카우프만의 문제 제기이다. 이런 특정 생명체의 생명, 행위 주체성, 가치나 행동과 속성들이 진화를 통해 등장한 현상 자체는 물리학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행위자로서, 인간의 움직임은 '행동'이지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인간은 행위자로서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카우프만이 보기에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으로 우주의 창발성이나 행위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진화의 생성물이며 가치는 우주의 본래적 속성이다. 따라서 그는 생명 현상이나 기술과 인류 역사의 진화는 자연법칙으로만 온전히 묘사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갈릴레오 주문 깨기'다.

창발하는 인간의 문화

카우프만은 종의 진화가 창발적 과정을 거치는데, 인간의 경제, 역사, 문화의 진화도 마찬가지로 창발적이라고 주장한다. 문화, 과학, 경제, 지식, 행동 발명이 지속적으로 변천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으로, 즉 창발적 과정이다.

이렇게 생물권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진화, 경제의 진화도 자기 일관적이고 자기 구축적인 전체 그물망으로 쉼 없이 진화한다. 이들의 진화 과정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과정으로, 인류 문명 역시 자기 지속적이고 자기 구성적인 진화 과정을 겪는 것이다. 이것들 모두 우주의 부단한 창조성의 일부이다.

카우프만은 물리학적으로 설사 '모든 것의 이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최종 이론이 나오더라도 생물학적 진화, 경제적 진화, 문화적 진화, 인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 인간은 창발적 우주의 핵심 구성 요소이며, 자연을 창조주라고 했을 때, 우리 자신은 그 자연의 창발성에서 함께 구현하는 공동의 행위 주체이다.

생명 세계나 인간 세계가 창발하는 우주의 일부라면, 우리의 방향은 어떻게 자리 잡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이성과 과학을 넘어서 새로운 통합이다. 카우프만은 이성이나 과학만으로 인류의 미래를 향한 충분한 안내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에게 예술과 인문학을 재점검하고, 그것을 과학, 현실적 행동, 정치, 윤리, 영성과 재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우프만은 과학에 대해, 과학이 인문학보다 더 높은 권좌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을 하나의 인간적 활동으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통합을 시작할 수 있다. 과학이 예술, 법, 사업, 의학, 공예, 성직 등 인간의 창조성이 다채롭게 표현된 다른 영역들, 인간이 불확실성 앞에서 추구하는 다른 활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과학, 예술, 정치, 윤리, 영성의 공간을 모두 아우르며 의미를 찾는, 통일된 전망을 찾는 것. 이것이 신성을 재발명하는 작업이고, 세상 속에 우리 존재를 총제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다. 이것은 환원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 자체를 넘어선다.

ⓒ프레시안(손문상)

'자연 자체의 창조성으로서 신'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창조적 진화의 자연적인 산물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그물망은 물리적 법칙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부분적으로는 무법적이고(lawless)이고 부단히 창조적이다. 인류의 역사와 삶도 마찬가지다. 자연적 우주와 생물권과, 인류 문화에 드러나는 끊임없는 창조성이 있다. 카우프만은 이런 세계를 위해서 신성의 개념을 새로 구성하자고 호소한다.

하지만 카우프만이 신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종교적이거나 개인적 동기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과학 자체만으로는 생명 세계와 인간 세계를 충분히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고차원의 어떤 '장(field)'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신성의 재발명의 모색으로 구체화된다.

카우프만은 이런 새로운 신성으로부터 지구 윤리를 발명하기 바란다. 그 윤리를 길잡이 삼아 개개인의 삶을 물론이고 현재 형성되고 있는 전 지구적 문명의 방향을 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는 생명 현상을 전통 종교에서 주장하는 창조주로서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우프만이 말하는 새로운 신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주의 신비로운 창조성에 기반을 두고 신성을 다시 발명하려면, 우주에서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이다. 다음으로 생명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자연의 창조성을 진정한 신성으로 여기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신성을 재발명하는 단계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카우프만이 말하는 신은 인격신이 아니라 자연의 바로 신이다. 그가 제시하는 그 대안이 바로 자연의 창조성 그 자체로서 '창조성으로서 신'이다. 창발적 우주, 우주의 창조성이 새로운 신성을 위한 토대인 것이다. 이런 자연의 혁명적 창조성이 초자연적 창조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새로운 신성으로 다시 구성되는 것이다.

카우프만은 이런 신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진화에 근거한 지구 윤리의 창발적 수립을 과제로 던진다. 그가 생각하는 지구 윤리는 모든 생명들과 지구를 존중하며, 다양성과 관용이 핵심이며, 인간의 권력 추구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도 포함되는 그런 것이길 기대한다. 카우프만은 이 책을 통해 과학을 지반으로 현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찾고 그 속에서 우리의 인류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성만으로는 충분할 길잡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의 공통 기반을 찾아서 다 함께 신성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그때 이성 혼자만으로는 충분한 길잡이가 될 수 없어 인간성을 온전히 재통합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궁극의 가치들을 길잡이 삼아 수수께끼 속에서 살아가려면, 우리는 신성을 재발명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삶과 행동 가치, 문명, 전 지구적 문명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카우프만은 전 지구적 대화가 펼쳐지기를 희망하고,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들의 대화를 통해 전 지구적 문명의 전망과 실체를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시 만들어진 신>에서 "자연의 창조성 자체로서의 신"을 통해 다양하고 창조적이고 관용적인 문명을, 새로운 에덴을, 새로운 계몽 시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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