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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랑해서 때린다!" 그 남자의 심리는…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③

☞관련 기사 : <피아노 치는 여자> ①연애 못하는 당신, 지독한 '자기애의 화신'!그녀의 절규 "나를 때리고 욕하고 오줌을…"

클레머

가련하고도 답답한 에리카를 이제 그만 떠나, 클레머에게 눈길을 돌려보자. 클레머의 호감은 애초에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기 전 연습 단계로 에리카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이 들고 지적으로 우월한 여자와의 경험을 나중에 좀 더 나은 여자들과 진지한 사랑을 나누는 데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초기 클레머의 욕망을 추동한 동력은 학습 욕구였던 셈이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젊은이들의 경우, '반함'이라는 사건은 학습 욕구를 상당량 포함한다. 젊은 연인은 상대를 학습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연애 그 자체를 학습하고 싶다.

학습 욕구는 호기심과도 통한다. 클레머는 겹겹으로 둘러쳐진 껍질 속 에리카의 본모습이 궁금하다. 그래서 과도하게 치장한 에리카의 모습을 혐오한다. 치장은 본모습을 감추는 벽 노릇을 하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길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에리카의 치장은 다른 의미로도 그를 불쾌하게 한다. 클레머는 그녀가 자신을 완전히 삼켜버리지나 않을까, 자신이 잠자는 호랑이를 깨운 셈이었을까, 두려워하며 후회한다. (여자의 과도한 치장은 남자에게 두려움을 주는가!)

에리카 못지않게 그 역시 정복욕이 강하다. 그는 에리카를 정복하고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 한다. 그의 강한 정복욕은 에리카에게 거절당했을 때의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운동 경기에서 자기보다 못한 친구와 경쟁해서 이김으로써 정복에 실패한 좌절감을 위무하려고 한다.

"친구란 자신의 힘을 자기보다 약한 친구의 힘에 비교하고 그 우위를 더욱 다지기 위해 있는 것"(154쪽)이라는 클레머의 생각은 그의 만만치 않은 정복욕, 혹은 지배욕을 보여준다. 그는 좌절할 때마다 자기의 우월감을 확인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목적으로 서툰 카누 선수를 미리 골라 둔다. 에리카와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쥐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잔혹한 편지에 그는 어떻게 반응했나. 그는 우선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싸늘해진다. 본심은 학습 욕구와 정복 욕구가 혼합된 것이었으면서도 에리카를 갈구하는 마음이 그리 가벼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쾌감 이후에는 다른 감정도 온다. 그는 그녀가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 경탄하기도 한다. 천성적으로 모험을 즐기는 그는 위험한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도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내면세계에 겁을 먹기도 한다.

에리카는 자신을 학대해 달라는 편지를 미끼로 그를 유혹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그는 에리카가 자기를 비하함으로써 더 당당하게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 사실에 경악한다.

편지 사건 이후 에리카가 클레머를 찾아온다. 그는 발기할 수 없다. 성기를 입에 물고 있던 에리카가 토하자, 그는 처음으로 욕설을 퍼붓는다.

"자신이 몹시 역겨운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에리카 여사?" (300쪽)

한 번 퍼붓기 시작한 욕설은 멈추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에 반복적으로 손이 가듯이, 그는 반복적으로 똑같은 욕설을 쏟아낸다. 이 사건은 클레머 안의 폭력 욕구를 일깨운다.

그는 시민공원을 찾는다. 에리카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희생제물이 필요하다. 충분히 보복을 했음에도. 그는 동물이라도 괴롭혀야 한다.

"여자 하나가 불러일으킨 채워지지 않은 충동이 이제 그를 마구 사악하게 만들어간다." (307쪽)

그는 꽃들을 마구 짓밟고, 정사를 나누는 어린 커플에게 욕을 퍼붓고 협박한다. 그들의 옷을 질근질근 밟으며 기뻐한다.


▲ <피아노 치는 여자>(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에리카의 폭력욕이 클레머에게 전염된 것이다. 어머니의 폭력욕이 에리카에게 전염되었듯이. 그의 행동은 전염된 폭력욕 말고도 다른 이유에서도 비롯된다. 그는 구애하는 도중에 심한 좌절을 겪었다. 에리카는 "그의 감정을 끊임없이 비웃었고, 그의 사랑은 여러 달 동안 아무런 보답도 얻지 못한 채 스러져버"(310쪽)렸다. 양상이야 어찌됐든 여러 달 동안 집착했던 여인에게서 그가 바라는 방식대로의 결말을 얻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또한 그의 좌절감은 그녀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도 하다. 정복욕 강한 남자들은 흔히 도도한 여자를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그녀의 복종과 헌신을 얻어낸 이후 가볍게 떠나는 자유를 과시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클레머도 그런 식으로 관계에서 권력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대를 명령한 에리카의 편지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그에 대한 권력 행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자신을 학대하게 함으로써, 학대의 쾌감에 그를 물들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를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지배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그는 감지한 것이다.

그는 이미 폭력의 쾌감이라는 유혹에 굴복했으므로, 어느 정도 에리카의 술수에 말려들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클레머는 자신이 그녀에게 조종당했다고, 즉 주도권 게임에서 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원에서 실컷 폭력욕을 분출한 후 클레머는 에리카를 찾아간다. 증오스러운 에리카에게 자연스럽게 욕망이 생길 리 없기에 자위라는 도구로 욕망을 작위적으로 환기해야 했다. 문밖에서 자위를 마친 그는 전화를 건다.

꿈은 이루어졌는가

에리카는 문을 열어준다. 어이없게도 클레머가 진정한 사랑으로 자신을 찾았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런데 클레머는 자기가 "처음부터 진지하게 제의했던 상호간의 애정을 거부한 건 그녀"(323쪽)라고 비난하며, 그녀를 진지하게 대해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후 그는 에리카의 얼굴과 배를 무참하게 때린다. 폭력은 무자비하게 이어진다. 욕설로 체벌로 강간으로.

그때 에리카는 그 어느 때보다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면서, 그의 폭력을 열정적인 갈망으로 착각하기까지 하지만, 남자는 그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는다. 열정으로 보기에 그의 폭행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학대의 극치는 강간 이후 그가 연출한 가장된 다정함이다. 누가 봐도 거짓임을 뻔히 알 수 있는 위선적인 다정함으로 그는 그녀를 완벽하게 조롱하고, 완벽하게 학대한다.

클레머의 폭력은 전술했듯, 에리카에 의해 촉발된 폭력 욕구 그리고 정복욕의 좌절로 형성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다른 요인도 있다. 작가에 의하면, "오로지 자신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엄청난 증오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이라는 옷을 입혀둘 수 있었"고 "이제야 제대로 그걸 벗어 던지고 있는 참"(327쪽)이란다.

그러니까 클레머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증오였다고 작가는 해석한다. 또한 이 "이 노여움은 천천히 그러나 철저하게,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에 형성된 것"(330쪽)이란다. 작가에 따르면,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증오가 형성된다.

사랑은 생장하면서 증오를 동시에 키운다. 사랑이 워낙 좌절감이나 분노와 가깝기에, 사랑하는 대상이 실제로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림자 없는 빛이 없듯, 사랑은 본래적으로 증오를 거느린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에리카는 자기 감옥 부수기에 실패한다. 그녀는 자기가 만든 감옥의 견고함과 파옥의 불가능함만을 재차 확인한다.

사람은 자기가 불러낸 영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법

복잡한 심리 분석이 난무했다. 미로와도 같은 사람 마음, 그 뒤얽힌 난장을 상세히 기술한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웬만한 심리학 해설서 이상이다. 따라서 일단 그것을 충실히 정리하는 것도 괜찮은 독법일 듯했다.

심리 해설을 빼고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정리해보자. 자기 감옥을 부수지 못한 영혼의 비극. 에리카는 어머니에게 배운 방식대로 밖에 사랑할 줄 모른다. 어머니의 방식은 곧 자기 감옥이다. 에리카는 어머니로부터 형성된 자기 내면이 지정한 사랑의 룰 안으로 클레머를 끌고 들어오려 했다. 다른 룰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에리카의 비극이다.

클레머의 분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그는 에리카를 발로 차면서 "나는 나"라고 포효한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에리카를 비난한 것이다. 에리카가 그라는 사람 자체를 무시하고 그녀만의 틀 안에서 그를 '사용'하려고 했음에, 그는 분노한다.

그러나 에리카만 그러한가. 우리도 사랑할 때 나만의 룰을 버리지 못해서 함정에 빠지지 않는가. 이것은 나를 버리고 상대에 맞추라는 상투적인 교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의식하건 하지 않건, 누구에게나 사랑을 대하는 자신만의 룰이 있다. 그 룰은 감옥이 되어 그를 가두는 동시에 운명을 결정한다. 성격이 반 팔자라지 않은가.

룰을 고수하는 한 그는 상대를 바꾸어도 똑같은 궤도 안에서 순환할 뿐이다. 옐리네크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인용한 구절, 사람은 "자기가 불러낸 영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법이지"(338쪽)라는 말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룰, 감옥, 틀, 자기가 불러낸 영, 이들은 일종의 심성 구조이다. 마음은 길을 걸으며 방향을 잡을 때 습관적으로 특정 방향을 선택한다. 하고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유독 그것을 선택하게 하는 무의식적 습관이 심성 구조이다.

상황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사람은 이전과 동일한 선택을 한다. 외부의 자극을 동일한 방식으로 수용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고, 웬만해서는 죽을 때까지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

가령 어릴 적 부모님의 학대로 사랑을 불신하는 심성 구조를 지닌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쉽사리 사랑을 믿지 못한다. 지나치게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시험하는 일을 반복한다. 사랑이 완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사랑의 불완전함만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결핍감에 시달린다.

한 여자한테서 안정적인 사랑을 받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 사람은 늘상 여러 여자를 사냥하며 방황한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렇다. 자존감이 낮아서, 즉 자기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여기는 경우. 그에게는 낮은 자존감이 심성 구조이다.

유년 기억이 변경 불가능하듯이, 이들 심성 구조는 어지간해서는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으로 머무른다. 그들은 평생 이 심성 구조를 짊어지고 산다. 심성 구조를 버리는 것은 자기를 형성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심성 구조는 그를 구속하는 감옥이 되고,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좌표가 된다.

이러한 감옥을 깨부술 때, 사람도 사랑도 성장하거니와, 말처럼 쉬울까. 그래서 부부 생활 중에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자기 감옥을 부수기가 인력으로 너무나 힘들기에, 신의 힘이라도 빌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자기 감옥의 수인(囚人)으로 살 것인가.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하는 것은 타인의 억압이 아니라, 내 몸뚱이를 묶는 내 손의 오랏줄이다.

진정한 해방은 자기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진짜 자유를 원하거든 우선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 자기의 심성 구조를 혁파하는 이, 그가 바로 초인(超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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