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당한 의사와 간호사를 이끌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과묵한 농민의 풍모를 띤 그는 병원이 심각한 피해를 당했음에도 초인적으로 진료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었다. 짬을 내 폭탄이 투하된 지점을 찾아가 불탄 돌과 기왓장 등을 가져왔다. 젊은 시절 방사능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그게 원인 규명에 결정적인 힘이 될 줄 몰랐다. 폐쇄된 지하실에 있던 뢴트겐 필름의 감광을 발견했다. 그는 그날 떨어진 폭탄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 채게 되었다.
그는 히로시마를 떠나지 않았다. 남아서 원폭증 환자를 진료했다. 처음에는 2, 3년이면 증상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겪은 대재앙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백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만 7년이 걸렸다. 이 사람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는 "너무나 인간다운 위엄을 가지고 오늘도 인간 몸속에 존재하는 원폭과 싸우고 있는, 그야말로 히로시마의 독자적인 인간, 히로시마적인 인간이다"고 평했다.
미야모토 다다오는 한여름 해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원폭병원 앞에서 원·수폭 금지 세계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환영하는 짧은 인사말을 했다. 옆에 있는 소녀보다 키가 작고 왜소했던 그는 모기의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제9회 세계 대회의 성공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외부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자 그는 쓰러졌다. 한동안 병상에 누워 지냈고 마침내 전신쇠약증으로 죽었다. 성공을 기원하는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셈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그 간절함의 보상으로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야기하고, 의지를 밝힌 인간의 위엄과 만족감을 지닌 채 물러났다"고 회고했다.
피폭자인 어린 산모가 기형아를 낳았다. 각오하고 있었던지라 충격을 견뎌낼 수 있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아이를 한번 보고 싶다고 했지만 의사가 거절했다. 상황이 얼마나 나빴는지 짐작할 만하다. 남편이 대신 보러 갔을 적에 아이는 이미 '처리'되었다. 사실을 알게 된 산모는 아이 얼굴을 보았더라면 "차라리 용기가 났을 텐데"라며 탄식했다. 병원의 대응을 탓할 수는 없다. 보아야 하지 않을 것은 안 보는 게 낫다. 그런데 사산한 기형아일지라도 거기에 매달려 용기를 회복하려 했던 산모를 어찌 보아야 하는가. 오에 겐자부로는 말한다. "그것은 통속적인 휴머니즘을 넘어선 새로운 휴머니즘, 바로 히로시마의 비참함 속에서 피어난 강인한 휴머니즘"이라고.
한 노인은 흐루시초프가 핵실험 재개 성명을 내자 항의하는 차원에서 원폭 위령비 앞에서 할복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목을 그으려 했지만 원폭증을 앓는 노인의 체력으로는 심한 손상을 입힐 수 없었다. 할복할 적에 노인은 미국과 소련 대사관 등에 항의서 아홉 통을 보냈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노인은 병상에 누워 줄곧 "결국 살아서 치욕을 당했다"는 말을 되뇌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비참한 만년에 비로소 쟁취한 인간의 위엄에 바로 삶의 의미가가 존재 해 있다"고 말했다.
청년은 네 살 때 피폭됐다. 살아남았지만 10대 후반 백혈병이 발발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2년. 그는 병상에 누워 있기를 거부했다. 병을 속이고 인쇄소에 취직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직장 생활을 잘해냈다. 악기점에 근무하는 아가씨와 연애했고 약혼까지 했다.
하지만 그 2년의 유예 기간이 다하자 그는 고통 끝에 사망했다. 청년이 죽고 나서 일주일 지나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왔다. 청년을 헌신적으로 돌본 의사와 간호사에게 두루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그녀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이 비극적인 로맨스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는 다음처럼 말했다.
"그녀는 가치 하나를 뒤집었다. 국가라는 것의 더러운 기만, 그 희생이 된 약자의 입장에서 국가의 기만과 살아남은 인간 모두의 기만에 대해 치명적인 반격을 가했다. 그러고는 연인과 함께 침묵한 채로 자신들의 독자적인 위엄으로 꾸며진 죽음의 나라로 떠나갔다. 타인을 용서하지 않는 고독하고 엄격한 죽음의 나라 (…) 결코 기만적인 국가와 산자들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다."
▲ <히로시마 노트>(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
특히 이런 상황은 오로지 그 피해 때문만이 아니라 원폭을 투하한 다음 세계의 관심이 원폭의 위력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적 비참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데서 비롯한 면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겪은 원폭의 비참함을 오히려 활용하고, 자신들이 느끼는 수치심과 굴욕 그 자체에 무기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러니, 오에 겐자부로가 자주 위엄이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이 책을 읽고 오에 겐자부로가 일본의 원폭 피해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 원인이었던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없다고 비판하지는 말자. 이 책은 그가 1961년부터 63년까지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쓴 르포다. 이후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상황을 복합적으로 이해했고, 일본이 아시아 민중에 끼친 죄악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
원폭 피해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우리 삶의 미래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할 수 있다. 우리는 핵 발전에 대한 의존을 줄여야 한다는 시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핵발전소는 결코 안전한 전력 생산 방식이 아니다. 더 큰 시련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치려 하면 너무 어리석은 짓이다.
원폭이 미친 엄청난 피해를 찬찬히 살피며, 핵발전소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당연히 거기에는 절제와 희생이 따를 터. 하나,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행동인지를 <히로시마 노트>는 생생하면서도 끔찍하게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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