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눈물로 열렸다. 사형수가, 야당 후보가, 서자가, 섬사람이, 네 번의 도전 끝에, 70대 고령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암흑시대에 지지자들이 흘린 눈물, 그 눈물의 강을 타고 올라가 마침내 단 한 사람이 됐다. 척박한 현대사를 갈아엎는 기적이었다. 우리네 새벽에는 김대중의 눈물이 고여 있다." (5쪽)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김대중 대통령의 일상은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손이 떨려 글씨를 쓰지 못했다.
"육필 일기는 2009년 6월 4일에서 멈췄다. 그 후 김대중은 눈물이 더 잦아졌다. 비서들은 불길했다. 비서실장 박지원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대통령님, 이제 눈물은 그만 흘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김대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내 자신 없어 했다. '그렇게 하려 하는데도 잘 안 되는구려.'" (427쪽)
"(…) 그분이 가셨다. /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 나는 성프란시스꼬 회관으로 걸어갔고 / 정동 오래된 느티나무의 더 굵어진 빗방울이 / 우산에 후두둑 마침표들을 찍었다. / 그때 세브란스 뒤편 백양나무숲도 진저리를 쳤으리라. / 한세상 우리와 함께 숨 쉬었던 공기 속에 / 한분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을 때 / 소스라치며 빗물을 털어내는 / 백양나무의 그 무수한 낱말들 / 그분이 가셨고, 그분이 가셨다고 / 어디선가 문자 메시지들이 연달아 들어오고, / 광화문 광장, 꽉 막힌 차량들 사이로 / 잠시 짜증을 멈추고 / 사람들은 인왕산으로 몰려가는 먹구름을 보았다. / 지하철 계단을 바쁘게 뛰어오르던 자들도, / 담배 피우러 복도 난간에 나온 젊은 사원들도, / 기차역 대합실의 늦은 휴가객들도, 증권거래소와 / 통신사 사람들도 뭔가, 순간 텅 비어버린 것 같은 / 시간의 정지 속에 멈춰 있었다. / 그분이 가셨다. (…)" (황지우 추모 시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멈추시라' 中)
그렇게 가신 지 3년, 이 여름, 가시는 듯 돌아오셨다. <김대중 자서전>(전2권, 삼인 펴냄) 편집위원으로 집필을 맡았던 <경향신문> 논설위원 출신 김택근의 <새벽 : 김대중 평전>(사계절 펴냄)이다. 밤새 3주기를 예고하는 여름비 내리던 광복절 날 밤, 순식간에 읽었다. 고맙고 눈물이 났다.
2. 미공개 자료들
▲ <새벽 : 김대중 평전>(김택근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
그래서 자칫 저자의 만용일 뻔 했다. 차라리 대통령과 남모르는 저술가였다면 마음 편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자서전 '편집위원'이었다는 신분, 명예이자 굴레였을 것이다. 그래서 평전을 <프레시안>에 연재하는 동안 말도 좀 있었다. 저자 또한 다른 시선으로 주관적 맥락을 부여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자서전과 전기와 평전의 차이는 어디쯤일까? 특히 전기와 평전은? 어쩌면 이 책의 한계다.
하지만 자서전 편집위원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미공개 자료들은 이 책의 보물이다. 대통령의 육성, 공생애 동안 기록해 온 대통령의 진솔한 속내를 함께 해온 <김대중 수첩 육필 메모>, 강원룡 목사나 도널드 그레그 대사 등 인터뷰 자료, 국민의 정부 각료 및 청와대 수석비서관 증언집들이 그것이다. 이들 자료들은 평전 구석구석 알알이 박혀있다. 무엇보다도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대통령의 일기 대목대목이 그러하다.
3. 기본으로 돌아가자
현재가 파탄이면 과거가 그립다. 그래서 기본이 그립다. 무엇이 문제일까. 김대중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를 듣고는 매우 실망했다.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일기다.
"실용주의자를 자처한 대로 철학이나 비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정책이란 것도 무얼 하겠다는 나열이지 손에 잡히게 구체적 방법은 별로 없다. 남북 관계도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것인데 적극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예측은 벗어나지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관 한 명이 죽는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그날 대통령의 분노와 슬픔.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국민을 적으로 아는 정권, 권세 있고 부자만 있는 정권이다. 반드시 국민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고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았던 2009년 6월 11일 '6·15 남북 공동 선언 9주년 기념행사' 연설.
"만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지금과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하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이후로도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적 정치는 계속됐고, 대통령은 떠나신 지 3년이 흘렀고, 이명박 정부의 임기는 불과 몇 달 남지 않았고, 이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할 12월 대선은 몇 달 앞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한다는 민주 진보 진영은 과연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다시 김대중 노선의 기본을 탐색해야 하는 이유다.
4. 1971년, 김대중의 기본 노선은?
"(1971년)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정책 선거를 천명했다. 상대 후보 박정희에 대한 인신공격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정책으로만 승부하기로 했다. 향토예비군 폐지, 미·중·러·일 4대국의 한반도 전쟁 억제 보장(4대국 안전 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과 무역 추진, 대중 경제 노선의 추진, 사치세 신설, 학벌주의 타파, 이중곡가제 실시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76쪽)
지금 어느 민주 진영 후보가 예비군 폐지를 공약할 수 있을까. 요즘 세제로 치면 부유세라 할 만한 사치세 신설을 공약할 수 있을까. 보편적 복지를 공약하면서도 지출 구조 조정만을 설명하고, 재원의 한계를 고민하면서도 증세라는 말은 결코 꺼내기조차 두려워하는 선거 국면이다. 하지만 문제는 근본이다. 근본이야말로 역사를 반걸음 앞서 가는 시대에 대한 인식, 예언자적 사명, 시민과 역사에 대한 확신의 문제다.
국정 전반을 7개 항목으로 정리한 1971년 선거 공약은 대통령의 철학을 압축해서 대변한다.
"1인 독재에서 제2의 해방으로(법제 정치), 폐쇄 전쟁 지향에서 적극 평화 지향으로(통일), 예속 외교에서 자유 실리 외교로(외교), 정권 안보에서 민족 안보로(안보), 특권 경제에서 대중 경제로(경제), 불신과 절망에서 희망의 대중사회로(사회·복지), 질식·압박에서 자유·창조로(교육 문화)" (79쪽)
시대가 퇴행한 것일까, 정체한 것일까, 아니면 대통령이 너무 앞선 것일까. 대통령은 늘 자신의 노선을 대조법으로 이야기하기를 즐겨 했다. '민주주의 vs 군부 독재', '남북 화해 협력 vs 냉전 대결주의', '시장 경제 vs 관치 독점 경제'. 이것이 민주 진보 진영의 노선이 되어야 한다고 늘 얘기하곤 했다.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 시장 경제, 자본주의, 그야말로 단순한 명제고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였다. 그래서 대통령은 평생 남북 화해 협력을 위해 헌신했고, 군부 독재와 싸웠고, 관치 경제·독점 경제에 끊임없이 비판적이었고, 한국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폐쇄적 권력 구조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몇 가지만 인용해 보자. 먼저 검찰에 대해서는 퇴임 후 일기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이 나라 최대의 암적 존재는 검찰이다.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고 영남 지역 중심주의다." (267쪽)
또 다른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인 지역주의와 학벌주의에 대해서는 2008년 1월 10일 일기를 인용하자.
"우리나라 정치 풍토에서 가장 타기할 것은 지연과 학연이다. 학연은 경북고, 경남고, 경복고, 전주고, 광주일고 그리고 경기고인데 그중 가장 심한 것이 경기고와 전주고다. 그렇지 않을 만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시피 한다." (379쪽)
우리 시대 한국 사회의 근본 모순은 남북문제와 양극화 사회(경제민주화)일 것이다. 김대중 노선, 여기에 더해 노무현 노선까지를 민주 진보 진영의 정통 노선으로 여긴다면, 시대의 대안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이에 대한 분명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근본 문제에 대한 대안 없이 민주 진보 진영 지도자에게 이번 대선은 없다.
한국 사회의 이른바 '중간 권력' 문제에 대한 해법 또한 이번 대선에서 꼭 제안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재벌 권력, 언론 권력, 검찰 권력, 정보 권력, 관료들의 권력화 경향까지. 그리고 한국의 전근대를 이끌어 온 혈연, 지연, 학연, 근무연, 종교연…….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대안 없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물론 김대중 대통령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국민의 정부'를 이끌어가는 동안 확고한 정책과 대안에서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계가 곧 이 시대의 과제다. 우리 세대의 숙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정치가로서, 경세가로서, 역사와 시민 앞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위기의식만큼은 늘 분명했다. 세상을 떠난 날까지도 고뇌의 흔적은 일기와 이번 책에 구석구석 적혀 있다.
놀라운 부분이 있었다. 솔직히 이 부분을 읽다 너무 놀랐다. 2009년 2월 3일 일기다.
"나는 오랫동안 대통령 중심제를 지지해 왔으나 요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대통령제의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등 10명 중 8명이 독재자이거나 그 아류다. 나와 노무현이 10년 동안 민주화를 적극 추진해 와서 안심이다 생각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을 보니 역시 제도를 바꾸어야겠다.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책임제로." (417쪽)
이것이야말로 대통령이 한국 사회, 민주 진보 진영에 남긴 분명한 정치적 유언이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대통령제를 두고 절대적 대통령제, 제왕적 대통령제, 1인 대통령제, 가족 대통령제, 사적 대통령제 등등, 어떤 식으로 호명하건 한국 사회의 올바른 헌정주의를 위해선 더 이상 이런 방식의 대통령제를 그냥 두어선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는 대통령 1인에게로의 지나치고 과도한 권력 집중에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일극주의다. 대통령 중심주의가 아니다. 이 근본 문제를 외면하고는 결코 권력의 분산과 다원화된 의사 형성은 불가능하다. '그 때 그 때의' 다수파가 통치하고, '통치자가 피치자가 되고 피치자가 통치자가 되는' 민주공화제는 불가능하다. 기본권 보장, 특히 사회 경제적 기본권 보장이야말로 의회, 대통령, 사법부의 존재 이유다.
군림해야 할 이는 대통령이 아니라 시민이다.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근본주의요, 기본 노선이다. 이것이야말로 미래다.
5. 대통령이 그립다
1973년 7월, 대통령은 일본의 <세카이>와 대담을 나눴다. 대통령의 신념을 물었다.
"나는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 떨어져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은 역사입니다. 나는 역사에서 정의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나의 유일한 영웅은 국민입니다. 국민은 최후의 승리자이며 양심의 근원입니다. 나는 이런 신념으로 살고 있습니다." (102쪽)
그리곤 36년 뒤,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인 그 해 1월 일기다.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에 미흡한 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정치가의 삶을 넘어선 사상가, 철학가의 삶이라고 평한다면 과잉일까.
"대흥사 아래 여관 동네 / 술 파는 할머니 / 막걸리와 도토리묵 차려주고 / 앞치마에 눈물 찍는다. // 우리 선생님 / 고생도 징허게 많이 허신 양반 / 떨어져도 눈물 나고…… / 되야도 눈물 나고…… // 김장배추 뽑아 어수선한 밭에 / 진눈 마른눈 퍼부어쌓는데 / 말 못하는 진눈깨비도 / 옳은 말씀이라고 // 떨어져도 눈물 나고…… / 되야도 눈물 나고……" (심호택 '1997년 겨울 해남', 228쪽)
그랬다.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1997년 겨울, 고향 해남 사람들의 마음이 딱 그랬다. 고향 부모님 마음도 딱 이랬다. 2012년 겨울, 다시 이런 눈물을 맞이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떠나신 지 만 3년, 오늘 8월 18일 눈물로 대통령이 그립다.
▲ 김대중 대통령(1992년 3월).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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