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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명품에 중독된 한국 지식인에게 고함!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월터 미뇰로의 <지역사/지구적 기획>

월터 미뇰로, 우습게보지 마라

이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만간 개정판이 나올 예정이니, 그걸 판본으로 삼아 한국 독자들이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서구 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극복과 비서구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담론을 만들어 낸 엔리케 뒤셀이나 월터 미뇰로가 사실상 푸대접받고 있는 현실 자체가 <지역사/지구적 기획(Local Histories/Global Designs)>(Princeton University Press 펴냄)이 우리 사회에 특별히 소개될 이유가 되기도 한다.

미뇰로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안 국가 내에서 서구 중심주의와 탈식민주의 논의가 한참 깊게 진행되고 있다가 언어학의 소쉬르, 인류학의 레비스트로스, 철학의 데리다, 정신 분석학의 라캉이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면서 상황이 졸지에 변해버린 것을 회상한다. 유럽의 정신적 계보에 뿌리를 둔 지적 논의 앞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다루고 고뇌했던 일체의 주제들이 별 볼일 없는 낡은 이야기처럼 취급되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지식인이면 데리다, 라캉, 푸코 정도는 줄줄이 입에 달고 나서야 지구적 수준의 지적 역량을 보일 수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철학은 하위 체계, 말하자면 'B급' 판정을 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뇰로의 지적 도전은 바로 이러한 현실과 정면으로 맞섰고, 그러면서 자신의 틀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유럽의 포스트모던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나 비판이 아니라, 그것이 놓치고 있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월러스틴-미뇰로

탈식민주의 논의 내지는 포스트 식민주의 담론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미셀 푸코를 인식의 기둥으로 삼아 비서구를 서구의 하위 체계로 위치 지운 오리엔탈리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면, 호미 바바는 라캉을, 가야트리 스피박은 데리다를 통해 자신의 탈식민주의 논의를 펼쳐나간다. 이에 반해, 월터 미뇰로는 뒤셀의 해방 철학과, 세계 체제론의 이매뉴얼 월러스틴을 통해 세계 체제의 위계 질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정리해나간다.

그러나 미뇰로는 세계 체제의 패권적 구조와 그 변동에 대한 분석에 열중한 월러스틴에 머물지 않고, '권력의 식민지성(coloniality of power)' 그리고 '식민지적 차이(colonial difference)'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묵살된 역사적 경험과 발언 그리고 원주민들의 현실과 언어를 인간과 세계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아나간다. 이것은 그가 이른바 '지식의 지정학(geopolitics of knowledge)'이라는 틀을 통해 정리해낸, 패권 체제와 하위 체계 사이의 경계선에서 사유하는 '경계 사고' 또는 '변방 사유(border thinking)'의 산물이다.

미뇰로는 서구의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던 철학이 세계 체제의 중심부에서 그 중심의 사유와 논리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바 있지만, 서구 중심주의가 토대를 둔 식민지적 착취나 그로 인한 식민지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의 소멸에 대한 인식은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포스트모던 철학이 서구의 역사적 진보를 이루어왔다고 여긴 이성의 야만성이나 이성의 전체주의적 지배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나 이들의 본래 언어가 말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해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경계 사유, 권력의 식민지성, 식민지적 차이

▲ <지역사/지구적 기획(Local Histories/Global Designs)>(월터 미뇰로 지음, Princeton University Press 펴냄). ⓒPrinceton University Press
미뇰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러한 유럽 지식인의 논의가 지구적 차원의 지적 발언권을 확보하는데 일차적 요건인 것처럼 되고 있는 현실 자체가 바로 하위 주체(subaltern)로서의 비서구 지역이 생산해내는 지식의 세계적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다름 아닌 이것이 권력의 식민지성이 발휘되고 있는 공간이며, 패권 체제의 현실과 비교할 때 열등한 것처럼 여겨지는 식민지적 차이가 만들어지면서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500년에 걸친 세계 체제의 역사적 재편 과정에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지식의 중추가 되면서 비서구 지역사의 주체들은 자기 언어로 자신의 현실을 세계적 차원에서 발언하는 것이 봉쇄되거나 또는 경청할 만한 지적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이들 중심 체제의 언어 외에 다른 언어로 철학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미뇰로는 서구 중심주의(Occidentalism)가 지배하는 현실에 대해, "복종을 요구당한 지식의 반격(insurrection of subjugated knowledge)"을 내세운다. 이것은 푸코의 담론이기도 한데, 미뇰로는 이를 통해 유럽 역사의 근대와 식민주의가 어떻게 서로 짝을 이루면서 인류의 역사를 왜곡해왔고 서구 중심주의의 일방성을 보편성의 이름으로 관철해왔는지 비판한다.

이론의 여행

하위 주체 연구(subaltern studies)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이론의 여행"이라는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이 대목에는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제3세계로 여행을 가는 이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론은 여행을 하기도 한다. 그 이론이 어느 지역에 도착하면 그 지역 풍토에 따라 변모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일 그 이론이 식민지적 차이를 가진 지역을 여행하면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 그런데 어떤 이론들은 여행을 하지 못한다. 본래 태어난 곳에서 그냥 평생을 지낸다. 하위 주체들이 생산해낸 지식들이 그런 운명에 처한다. 반면에 중심에서 생겨난 이론들은 여권을 가지고 어디든 간다."

결국, 지식에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세상인 셈이다. 미뇰로는 뒤셀이 런던이나 파리 또는 뉴욕이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뒤셀은 몰리고 쫒기고 억압받은 자들의 현실을 "타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으로 철학화한 레비나스와 마르크스 그리고 성서를 토대로 자신의 해방 철학의 뼈대를 세웠다.

뒤셀이 쓴 마르크스의 <그룬트리세(Grundrisse,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와 <자본> 중간 단계의 <경제학-철학 수고>에 대한 해설은, 읽는 이를 압도당하게 한다. 그런 뒤셀의 지적 역량에 대한 우리 지식인 사회의 낮은 관심도 역시 미뇰로의 말대로 유럽이 생산해낸 지식에 대한 선망과 그 위계질서에 지배받고 있는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억압된 역사의 발언권

미뇰로는 유럽과 미국의 지구적 기획이 일방적으로 관철되어 나가는 중에,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특히 원주민들의 "억압된 기억과 지식(suppressed memories and knowledge)"의 복구가 절실하며 이는 이들의 삶이 만들어낸 언어의 시민권을 복구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이중 언어 사용(bilanguaging)"에서 비롯될 수 있다면서, 열등한 변방으로 취급되고 있는 언어가 가진 기억과 역사가 현실에서 서구의 지구적 기획과 동등한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뇰로는 서구의 근대를 이루어낸 르네상스에 대해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비판적 연구를 한 바 있는데(), 근대의 내면에 뿌리를 내린 식민주의 문제를 명확하고 비판적으로 정리해내지 못하면 우리는 근대에 대한 환상 내지는 근대에 대한 인식의 왜곡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뇰로를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우리의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중국의 속국이었으며 일본의 식민지였고 미국의 패권 체제 내부에 종속적 위치로 살아왔던 우리는 '권력의 식민지성', '식민지적 차이', '경계 사유', '하위 주체 연구'에 대한 독자적 발언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는가?

그로써 우리의 현실을 이루어온 역사와 기억이 어디에서 억압되고, 무엇에 복종해왔으며 어떤 인식의 왜곡을 낳았는지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논의들은 종적을 찾을 수 없다시피 되어버렸다. 이 나라의 정치, 외교, 문화, 교육에 대한 논의는 사실 모두 이러한 지점에서 새롭고 성찰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의 이름과 논리는 우리 역사의 현실과 결합되어 새로운 긴장과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해설자가 되어 그들의 문제를 우리가 껴안고 가고 있는 느낌이 짙다. 그건 이미 스피박이 말했듯이 세계적 패권 체제의 중심에 충성하는 "토착 정보원(Native Informer)"에 불과해지는 일이다.

이건 프란츠 파농이 명료하게 드러냈던 것처럼,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쓰고 백인 행세를 하는 비극적인 희극이다. "사유의 지정학적 고뇌"가 사라진 자들의 허무한 명품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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