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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찬 연인에게 화끈하게 복수하는 법! 지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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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찬 연인에게 화끈하게 복수하는 법! 지독한…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윤대녕의 '달에서 나눈 얘기'

완전한 사랑에 관한 전설이 있다. 사람마다 그 전설의 내용은 다를 것이다. 정이 심취한 완전한 사랑의 그림은 이랬다.

모든 현실적인 필요와 계산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끌림에서만 비롯된 사랑, 현실적인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랑, 상대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사랑, 그의 결핍을 한 오라기의 틈도 없이 채워줄 수 있는 사랑. 그녀는 둘 사이에 소통하지 못한 한 마디라도 있을까봐 두려워했다. 둘은 완전한 영혼의 합일을 이루어야만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말은 이랬다. 성적인 끌림으로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다. 필요해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은 가꾸고 키워가야 할 것이지, 완성된 상태로 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사랑을 시작하기 어려웠다. 연애 무드가 무르익을 때마다 그녀는 상대와 자신의 감정이 완전한 순도를 갖추었나 의심하곤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대의 감정이 때로는 자신의 감정이 완전한 순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녀는 결국 연애를 시작하지 못했고, 시작한 연애라면 서둘러 끝내곤 했다. 상대가 생각보다 속물이라고 생각될 때마다 참을 수 없었던 점도 조기 종료에 일조했다. 어딘가에 완벽하게 고상한 남자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새로운 연애는 반복적인 고뇌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빠져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란 생각에,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직 괴롭기만 했고, 자신이 꿈꾸는 사랑이 어디에도 없을 것이란 예감에 절망했다.

절망한 그녀, 윤대녕의 '달에서 나눈 얘기'(<사랑은 미친 짓이다>(김훈 외 지음, 섬앤섬 펴냄))를 읽는다. 사랑에 관한 명상으로 가득 찬 짧은 소설이다. (혹자는 이 글을 수필로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이 글이 매우 풍요로운 의미를 담은 수려한 명작 소설로 보인다.)

'2프로' 부족한 감정으로 시작된 사랑

▲ '달에서 나눈 얘기'가 수록된 <사랑은 미친 짓이다>(김훈 외 15인 지음, 섬앤섬 펴냄). ⓒ섬앤섬
이 소설의 커플은 시작부터, 그러니까 커플이 된 계기부터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다. 자동차 사고로 한쪽 팔을 잃어버린 여자가 남자를 찾아온다. 남자는 중학생 때부터 여자를 짝사랑하며 쫓아다녔지만 대학생이 된 여자는 남자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귀었다. 여자는 지난 세월의 절망과 고독과 세 번의 자살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남자에게 청혼한다.

다음 날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다만 남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 말에 남자는 오히려 담담함을 느낀다. 남자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지 자문하는데,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일주일쯤 후 남자는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남자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러자 그녀는 지금부터라도 남자를 사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남자는 그 말이 당장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고 단지 그를 필요로 할 뿐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불구를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른다. 풍문 속 완전한 사랑에 따른다는, 열광, 사랑의 확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는 호언장담이 이들의 사랑에 빠져 있다. 이 사랑은 이토록 불완전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사랑에서 감정의 작위적 조작과 과장을 뺀다면 남는 고갱이는 이러한 망설임과 불확신과 필요의 혼합물일 것이다. 오래도록 완전한 순도의 사랑을 찾아 헤매었던 사람 정은 여기까지 읽고 자기가 놓쳤던 많은 기회를 떠올리며 회한에 빠졌다. 사랑인 듯하였으나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버리거나 기피했던 많은 기회들을.

이 당시 남자는 알고 있었다. 자기 감정이 연민과 동정심 심지어 복수심까지 포함된 혼합물임을. 그러나 남자는 "그 모든 감정이 사랑 안에 포함돼 있다고 생각"(38쪽)한다. "한 번쯤 상대에 대해 분노하거나 증오해 보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38쪽)라고 남자는 묻지만, 실제로 사랑의 감정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대로 열등감, 질투, 증오심, 공포, 가학 충동 등 아름답지 못한 정서들을 포함한다. 존재하는 모든 빛은 그림자를 거느리듯이 사랑 또한 그러하다. 그림자 없는 물체는 생명이 아니듯, 불편한 감정을 동반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순정 만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곱디고움 일색인 무엇과 거리가 먼 이런 추악한 감정들에 휘둘리면서 그러나 사랑에 빠진 자는 상대에게 예속된다. 남자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내게 존재함으로 해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매순간 느낀다는 거"(38쪽)라고 말한다.

남자의 말대로 열렬한 그리움이든 예찬이든 증오든 분노든 모두 '상대에게 얽매임'이 전제된 감정들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적으로 상대에게 기식하고 공생한다. 사랑이란 어쩌면 이러한 감정적 예속 상태에 다름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감정이 사랑인가 아닌가 자문하는 사람들은 내 감정의 미학도 보다는 예속도를 측정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는가'라는 질문보다 '내가 얼마나 그에게 예속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기 감정의 본색을 잘 밝혀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결핍, 사랑의 근원이자 과정

남자는 한 팔이 없는 아내의 불구를 온전한 신체보다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다른 여자들은 너무나 완전해 보여서 숨 막히는 존재이다. 결혼을 결심할 무렵 남자는 아내 될 여자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는 자신도 그만큼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 순간에 알았다.

상대의 완전함에 찬탄하는 사건 보다 불완전함을 인식하는 사건이 더욱더 사랑을 성장시키는 토양 노릇을 한다. 그리하여 두 팔이 없고 나머지 몸체도 두 개로 토막 난 밀로의 비너스는 아름답다. 치명적인 결핍은 밀로의 비너스를 완전한 몸체의 비너스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든다. 사람 사이의 사정도 이와 같으니, 결핍이 사랑을 싹틔운다. 결핍은 다른 무엇보다 강력한 에로스의 화살인 셈이다.

그런데 결핍을 보듬어 주는 심정이 사랑일 텐데, 이 부부의 행태는 얼핏 사랑과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개인 병원 의사인 남자는 다른 의사들과 달리 매일 밤 열한 시 넘어서 퇴근하며, 일요일과 공휴일에도 출근한다. 아내가 그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한쪽 팔로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싫어서이다.

결혼 초기에 남자는 집안일을 무턱대고 도와주려고만 했으나, 아내의 필사적인 거부에 부딪혀 결국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그렇다면 남자는 상대방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나? 결핍을 인정하고 채워주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되는가?

작가 윤대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핍이 쉽사리 채워지는 것이라면 완전한 사랑에 대한 신화도 사실일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완전한 사랑도 허구이다. 사랑에 대한 기다림이 있을 뿐이다. 결핍은 어지간해서는 온전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결핍된 자 자체가 결핍을 채우기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때로는 결핍을 지켜봐 주는 것, 상대가 자기 결핍을 은닉하는 행위에 동참해 주는 것만이 사랑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치 알코홀릭인 아내가 감추어 둔 술병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는 남편처럼. 무람없이, 저항 없이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행위가 자연스러워질 때를 기다리는 것, 바로 그 기다림이 사랑이 아닐까.

어둠과 밝음의 틈새, 오아시스의 물

이 소설의 부부는 삼중의 결핍을 안고 있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감정도 순도가 이 프로 결핍되었고, 사랑의 주체도 불구로 상징되듯 결핍을 안고 있고, 사랑의 과정도 완전한 합일과는 무언가 거리가 먼 결핍 상태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어둠 속의 사건인가. 완전한 합일과 꿈같은 행복으로만 화려하게 수놓인 관계가 밝음이고 그 반대가 어둠이라면 말이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어둠 속의 사건도, 밝음 속의 사건도 아니란다. 사랑은 세상의 어둠과 밝음 "그 틈새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일"(41쪽)이란다.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그 틈새를 지나다 보면 어느 날 황금빛의 사막과 오아시스를 발견하기도 하는데, 사랑이란 이 오아시스에서 "어렵게 얻어 마시는 한 모금의 물"(41쪽)이란다. 바닷물이나 빗물이 아무리 넘쳐흘러도 정작 마실 수는 없다. "정화된 한 컵의 물이 결국"(41쪽) 사랑이라고.

무슨 뜻인가. 우선 넘쳐흐르는 바닷물이나 빗물이 아닌 "한 컵의 물"에 주목해 보자. 흔히 말하는 남녀상열지사의 의미라면 사랑도 흔하다. 사랑이라고 착각되는 그 무엇도 흔하다. 그러나 흔전만전한 바닷물이나 빗물을 마실 수 없듯이 흘러넘치는 사랑 비스름한 그 모든 것을 우리는 향유할 수도, 그것으로 행복할 수도 없다. 우리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랑이란 정화된 한 컵의 물처럼, 단련된 순금처럼 드문 것, 각고로 가꾸고 성심껏 연마한 끝에 도달하는 맑고 상쾌한 경지이다.

다음으로 오아시스에서 "어렵게 얻어 마시는 한 모금의 물"이란 무슨 뜻일까. 소설은 삼중의 결핍을 이야기한다 했거니와, 결핍이 이 뿐이겠는가. 연인은 무수히 중첩된 결핍을 등에 지고 빛도 어둠도 아닌 그 틈새를 터덕터덕 지나가는 낙타이다. 결핍을 운명처럼 등에 지고 결핍 사이를 걷는 존재이다.

그러다가 축복처럼 만나는 오아시스 물 한 모금이라니. 여기에서 물은 사랑이 도달하기 바라 마지않는 영혼의 합일 상태를 일컬을 수 있다. 우리는 늘 영혼의 합일이라는 축복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주 가끔 온다. 또한 오아시스 물은 계속 걸을 수 있는 힘을 준다. 다시 말해 계속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물이 넘쳐흐를 필요는 없다는 말이 중요하다. 축복을 너무 자주 기대할 필요는 없다. 축복이 너무 흔하면 더 이상 축복이 아닌 법이다.

또 다른 명상을 들여다보자. 남자는 아내의 한 쪽 팔이 볼 때는 없지만 안 볼 때는 있다고 말한다. 아내가 자신한테 팔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 자기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타지, 어딘가에 순전함이 있고 언젠가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 이런 것도 또한 사랑의 일종이다. 결핍 상태로 걸어가는 것도 사랑이지만, 때로 결핍이 없다고 스스로 마법을 걸기도 하고 어딘가에 존재하는 순전함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때의 믿음은 서두의 정의 판타지와는 다르다. 정은 완전한 사랑을 꿈꾸었기에 사랑을 거부하고 기피했지만, 이 소설의 남자는 사랑을 가꾸기 위해 판타지를 수긍한다. 그는 자기 병원 이름을 "달의 병원"이라고 지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달을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지만" 그 자신은 "달에 살면서 사랑을"(42쪽)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사랑을 추상적으로 짐작하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살아내고 있다. 이런 그에게 사랑은 결핍 없는 것이 아니라, 결핍으로 연쇄된 것, 때로 결핍을 못 본 척 마법을 거는 것, 결핍을 등에 지고 결핍 사이를 걸어가는 것이다. 어렵게 얻어 마시는 한 모금의 물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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