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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오해의 악순환에 갇힌 유교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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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오해의 악순환에 갇힌 유교를 구하라!

[프레시안 books] 배병삼의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논어> 관련 서적을 써왔던 영산대학교 교수 배병삼이 연구 범위를 넓혀서 '유교'를 들고 나왔다. 그간 <녹색평론>에 써오던 글을 묶어서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녹색평론사 펴냄)로 펴낸 것이다. 머리말에서 지은이는 "100년 전 묘비명조차 없이 파묻힌 유교의 혼령을 불러내 그 말을 들어보는 초혼제의 마당"을 벌이는 심정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면서 나름의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동안 유교에 대한 비평은 있었어도 유교가 제 목소리로 발언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착안한다. 이 책은 유교 앞에 마이크를 대놓고, 그의 말을 들어보는 자리다." (5쪽)

초혼제라는 말을 쓰는 만큼 배병삼은 자신을 정치학자가 아니라 무당에 위치시키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유교'를 '그'의 대명사로 받는 것은 따지지 말자!) 죽은 유교가 직접 자신을 드러낼 수 없으므로 '배병삼'에 빙의해 그의 입과 손을 빌어서 100년 이후의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고 있다. 일단 그의 역할을 믿어보고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유교라면, 쓰레기통에 내던져도 좋을 터. 공자와 맹자가 우리 삶을 관찰한 후 내뱉음직한 비평과 조언을 들어보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질곡으로 변한 이 땅의 학교에 대한 조언을, 또 해체일로에 접어든 한국의 가족과 사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그리고 사익의 추구로 위기에 봉착한 시장 경제와 가진 자의 도구로 타락한 정치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을 청해본다." (8쪽)

이 부분을 읽다보면 집필 동기와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초혼제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불러내서 위로하는 의식이다. 초혼제가 끝나면 혼령은 더 이상 이승에 미련을 두지 않고 저승에 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비평과 조언, 비판과 대안을 청하는 것은 단순히 유교의 초혼제에서 할 일이 아니라 심령 부흥회에 할 일이다. 초혼제가 끝나면 유교의 혼령은 이승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부흥회라야 유교의 혼령은 이승에 남아 학교, 가족과 사회, 정치 영역을 살피며 도움이 될 만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지은이는 유교의 초혼제를 잘 지내고서 신원(伸寃)이 이루어지면서 그를 바탕으로 심령 부흥회까지 한꺼번에 지낼 요량으로 이 책을 묶은 듯하다. 책의 구성을 보면 이러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1부가 '유교, 오해 풀기'이고, 2부가 '유교, 이해하기'이고, 3부가 '유교에서 길 찾기'이다. 1부의 초혼제를 지내고 2부의 신원 운동을 통해 3부의 심령 부흥회를 벌이고자 하는 것이다. 글을 초혼제와 부흥회 두 부분을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배병삼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배병삼은 글의 제목만으로 선홍색의 핏빛을 연상시킬 정도로 신원의 초점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이는 종래 유교의 본질이 아닌데도 그것인양 덧씌운 위민(爲民), 민본주의, 충효(忠孝)의 낙인을 걷어낼 것을 제안하고 삼강과 오륜의 기초적인 구별마저 허용하지 않는 지적 만용을 한 방에 날려버리려고 하고 있다.

보통 '맹자 사상=위민 사상·민본 사상'의 등식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34쪽). 철학 입문서를 보면 상식이 진리일 수도 있지만 진리를 배반하는 경우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배병삼도 같은 생각이다. 맹자는 '위민'으로 자신의 사상을 주장한 적이 없고 '위민' 조어는 맹자 사상의 전모를 포섭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위민이란 군주가 국가의 소유자임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고 "또 자기 소유물을 백성들에게 시혜로 베풀 적에야 '인민을 위한다'는 말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35쪽). 상식에 따르면 맹자가 말하는 군주는 전제군주이기도 하고 하늘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상 "군주는 국가 관리를 위탁받은 존재이며, 또 휘하 관료들의 일탈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자일 따름, 국가의 소유자는 아닌 것이다."(36쪽)

그럼 '민본'은 어떤가? 민본은 서양의 'democracy'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민주 대신에 채택된 대응어일 뿐이다. 아울러 민본은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치사상이므로 그것으로 맹자 또는 유교의 본질을 규명할 수 없는 것이다(56~58쪽).

'충효'도 오해에 바탕을 둔 착각일 뿐이다. 왜냐하면 "'상대방 처지를 접어서 생각함'을 뜻하는 서(恕)와 짝을 지어 '충서'라는 표현을 이루거나, 신뢰(信)와 짝을 지어 '충신'으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 용례이다. 요컨대 충효는 유교의 경전에서는 거의 쓰인 적이 없었던 말이"(69쪽)기 때문이다. ('거의'가 완전 부정이 아니라는 것은 따지지 말자!) 사실 따지고 보면 '충효'는 유교가 아니라 <한비자>에 기원한 것이다.

"한비자에게서 기원한 법가의 원리가 한(漢)제국 초기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제국의 통치 원리로 인입된 것이다. 그리하여 한당(漢唐) 시대 이후 중국과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도 충효라는 말은 관습적으로 쓰이게 된 것인데, 특별히 일본의 에도(江戶)시대에 충-효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였던 것이다." (71쪽)

배병삼의 초혼제에 따르면, 사람들은 오해의 주술에 갇혀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양 믿고서 유교에 대해 저주의 화살을 퍼붓는 우스꽝스런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오해에서 생긴 앙금을 털어내고 유교를 정면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유교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까? 그는 제안하는 방법론을 귀기울여 보자.

"동양 사상의 현대화 작업은 텍스트를 고유의 맥락에 따라 이해하고 또 오늘날로 해석하는 기초적(경학적) 작업에서 비롯될 뿐이다. 맹자의 사상도 <맹자>를 꼼꼼하게 점검하는 작업에서 추출되어야 만 한다." (58쪽)

현대화 작업의 제안에서 텍스트를 왜곡하지 말고 원의의 맥락대로 이해하라는 주장은 분명하지만 '오늘날로 해석하는' 기초적(경학적) 작업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배병삼은 앞서 말했듯이 위민, 민본주의, 충효를 폐기 처분하고 <맹자>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쓰이는 여민동락(與民同樂), 여민해락(與民偕樂), 여민동지(與民同之) 등의 '여민'(與民)에 주목한다. 여민은 '위한다'는 말속에 위계 서열과 지배 복종의 문법을 감춘 위민을 대체해서 '함께·더불어' 한다는 인민 주권을 내장하고 있다고 과감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지은이는 책 전체, 특히 8장에서 이러한 과감한 해석을 한층 더 밀어붙여서 유교를 아예 '여민 체제'로 규정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129쪽에서 그렇게 밝히고 8장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여민 체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민 체제는 인민 주권론에 바탕을 두며, 정전(井田) 제도가 그 사회 경제적 뼈대이고, 조법(助法)이 그 세금 제도이고, 순수(巡狩)가 그 감찰 제도이고, 시사(詩史)가 그 미디어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제 배병삼의 시도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자. 그는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유교 다시 읽기'를 제안하고 있다. 그의 작업을 읽다보면 제거해도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굳은살을 벗기는 목욕탕이 생각난다. 굳은살은 매끄러운 피부가 아닌데도 살다 보면 자꾸만 달라붙는다. 배병삼은 위민, 삼강, 민본주의, 충효 등을 유교에 들어붙은 굳은살로 보고 그것을 떼어내서 그 아래에 예쁜 속살을 드러내려고 하는 듯하다. 목욕탕을 다녀온 것처럼 그의 책을 읽고 나면 "가뿐하다!"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또 굳은살이 피부에 달라붙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으려면 그의 작업은 추후에 보완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귀 기울어야 할 곳도 없지 않다.

그는 '생태의 눈으로 <논어> 읽기'라는 제목을 프롤로그에 달면서 말미에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위하여' 세계에서 너는 나의 수단이 되고 나는 너의 수탈자가 되지만, '함께·더불어' 세계 속에서 너와 나는 우리로 발효되고, 또 동식물, 산과 강, 나아가 일마저도 물질 덩어리가 아닌 이 세계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대접받는 세상이 된다. 생태 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여기다." (26쪽)

이 주장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정의 사회처럼 수사적으로는 아름답다. 책 전체가 '위민'과 '여민'이 선과 악의 세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과잉 상징화되어있지 않은가? 또 맹자가 말하는 '여민'이 텍스트에 직조된 당위적 사실성만큼 현실적 사실성을 가질 수 있을까? 국유제 또는 공유제에 바탕을 맹자의 정전 제도가 오늘날 어떤 식으로 제도화될 수 있는지 검토하지 않는다면 과학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공상적 이상주의를 말하게 된다. 또 동식물, 산과 강, 일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면 결국 인민 주권을 넘어서 만물 주권을 주장하게 된다. 만물 주권론에서 말하지 못하는 만물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 더 논의되어야 한다.

'여민'을 인민 주권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권의 근원, 정당화, 획득, 분배, 유지, 재생산과 권력의 분립, 견제 그리고 군권과 민권의 갈등 등을 둘러싼 다양한 후속 논의를 필요로 한다. 아울러 맹자의 인민 주권론을 유교의 인민 주권론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배병삼은 위민, 민본주의 등과 유교의 결합을 법가, 한제국의 유교, 에도(江戶) 유교, 일제의 식민지 체험에 의해 뒤범벅된 오해의 소산으로 본다. 그는 유교와 동아시아의 인간관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개인이 아니라 사이를 중시하는 관계적 존재에 바탕을 둔다고 보고 있다. 관계적 존재 양상은 대칭적 관계와 비대칭적 관계로 구분될 수 있다. 맹자의 의의는 관계적 존재의 발견 자체에 있지 않고 관계의 비대칭성을 대칭성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데에 있다. 성선과 정전은 각각 인성과 사회 제도에서 관계의 대칭성을 확보하려는 기초일 것이다.

하지만 상황, 세력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관계의 비대칭성이 대칭성을 압도할 때 '국가주의적 유교', '황도(皇道)유교', '민족주의적 유교', '애국주의적 유교', '국학적 유교', '국교적 유교' 등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국가주의적 유교는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의도적 해석의 일환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유교 연구는 이제 불순한 '오해'(誤解)와 순결한 '정해'(正解) 타령을 벗어나서 그냥 각자의 유교를 주장하며 경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 외국 연구자만큼이나 국내 연구자의 성과를 검토하여 더불어·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

사족. 여(與)와 려(厲)는 한국어 두음법칙을 고려하면 발음이 근사하지만(129~130쪽) 중국어 음을 고려하면 운이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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