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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은 신이었고, <키노>는 성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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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성일은 신이었고, <키노>는 성전이었다!"

[드디어 만난 100] <키노>·<Film 2.0>…

2010년 7월 31일 창간호를 낸 '프레시안 books'가 2년 만에 100호를 냅니다.

이번 프레시안 books는 100호 그리고 2주년을 자축하면서 숫자 '100'을 열쇳말로 꾸몄습니다. 또 100호를 내면서 프레시안 books 100년을 상상합니다. 2013년 100주년을 앞둔 일본의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을 찾아가고, 100년이란 시간을 견딘 서점, 도서관 등을 둘러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필자는 자신의 추억과 '100'을 엮은 글을 선보입니다. 여러분도 프레시안 books가 펼쳐 나갈 100년을 함께 지켜봐 주세요. <편집자>

Happiness in Magazines

행복은 잡지 속에 있다. 블러(Blur)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의 말이다. 정확하게는 다섯 번째 솔로 앨범의 타이틀이지만. 아무려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장이다. 유광종이에 인쇄된 화려한 '명품'을, 음식을, 휴양지를 보라. 흠잡을 데 없는 모델들의 몸매와 빛나는 미소도. 그곳에 행복이 없다면 대체 어디에 행복이 있단 말인가?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린다. 그녀의 상자에서 나온 온갖 불행과 끝내 움직이지 않던 희망을. 잡지도 마찬가지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풀려난 질투와 선망이 아무리 우리를 괴롭힌대도 행복은 꼼짝하지 않는다. 손닿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불행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다. 희망의 팔짱을 끼고, 화사하게 웃으며.

나는 기다린다. 언젠가 행복이 제 발로 걸어올 그날을. 나는 일단 녀석의 면상을 한 대 갈겨줄 생각이다. 그때도 웃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때 행복은 잡지 바깥에 있었고, 잡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투명한 비닐포장처럼. 누런 정기구독 우편봉투처럼. 매달 25일이면 행복은 어김없이 나를 찾았다. <어깨동무>와 <소년중앙>과 <보물섬>과 <만화왕국>과 함께.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책이라도, 아니 그런 책일수록 틀림없이 끝은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면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

슬퍼서 그런 건 아니다. 서러워서도 아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언제까지고 그들의 세상에 머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내게 잡지는 하나의 약속이었다. 끝없이 이야기들을 들려주겠다는 약속. 설령 하나의 연재가 막을 내리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빈자리는 어느새 다른 이야기로 채워졌다.

완벽한 세상. 정기구독이 끊어질 염려도 없었다. 아버지는 만화가였고, 아버지가 만화가인 한 그들은 공짜로 잡지를 보내줄 테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영원히 만화가일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행복한 나날이라도, 아니 그런 나날일수록 틀림없이 끝은 있게 마련이다. <아이큐점프>와 <영점프>라는 이름의 날렵하고 세련된 (격)주간지들의 등장과 함께 두툼하고 투박한 월간지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기존의 잡지들이 하나 둘 폐간되었고, 새로운 회사들은 아버지에게 잡지를 보내지 않았다. 야박하다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았으니까.

설령 그들이 잡지를 보냈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집을 가득 채운 과월호 더미를 뒤로한 채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만화가가 아닌 아버지가 마침내 무엇이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100-1 (1)

빈자리는 무엇으로든 채워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월간지가 내게 남긴 교훈이었다. 엄마는 컴퓨터를 선택했고, 무리한 지출이었던 만큼 빈자리는 손쉽게 채워졌다. 나는 컴퓨터 잡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이컴>과 <헬로우 PC>라는 이름의 월간지.

한 달에 만원 남짓한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내겐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막내외삼촌이 있었다. 온종일 서점에 눌러 앉아 어른이 보기에도 어려운(당시에는 그랬다) 컴퓨터 잡지를 파고 있는 조카가 삼촌의 눈에는 얼마나 대견하게 보였겠는가(그렇게 대견한 조카가 내겐 없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여드름 가득하던 스무 살에 무작정 상경해 서점을 시작한 삼촌이다. 몇 년 후 찾아온 IMF 경제위기에 직접 서점을 하겠다고 나선 건물주에게 삼촌은 20년 가까이 꾸려온 가게를 권리금도 없이 내줘야했다. 그 후 변두리 대학가에 도서대여점을 열었고, 짧은 호황을 맛본 후 스캔본의 범람과 함께 기나긴 불황을 맞게 된다. 설상가상 홍대의 부상으로 학생들이 빠져나가 상권 자체가 몰락했지만, 삼촌은 여전히 도서대여점을 지키고 있다.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직 IMF까지는 몇 년이 남아있었지만, 삼촌의 피땀을 빨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매달 두 권의 잡지를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용돈(엄마가 주는 것보다 더 많았다)까지 쥐어주는 삼촌이 안쓰러웠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컴퓨터 잡지를 포기하기로 했다. 거짓말이다. 단지 관심분야가 바뀌었을 뿐이다. 중학생이 되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마이컴>이나 <헬로우 PC>라는 이름은 폼이 안 난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그렇다면 역시 음악이지. '중2병'에 걸린 누군가가 말했다. 아마 나였던 거 같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 그중에서도 팝을 다루는 잡지라는 생각이 들었다(중2가 된 나는 일 년 동안 배운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팝송을 듣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잡지들을 들춰보며 고심한 끝에 선택한 건 <핫뮤직>. 실은 도 집어 들 생각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때 삼촌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던가.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니건만 저 홀로 눈뜬 수집가의 본능이 이렇게 속삭였던 것이다. 잡지를 모으려면 창간호부터 모아야 하는 법이라고. 그러기엔 <핫뮤직>의 역사가 너무 길었다. 가련한 삼촌은 내게 어김없이 용돈을 쥐어줬지만, 과월호를 모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다.

나의 <핫뮤직>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때마침 새로운 음악잡지가 창간한 것이다. <핫뮤직> 초대 편집장 출신의 성우진이 만든 <월드 팝스>가 그것. 나로서는 애착을 갖고 모으기 시작한 첫 잡지인 셈이다. 한마디로 첫사랑이었고,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오래가지 못했다. 열 권 남짓한 과월호만 남긴 채 갑자기 폐간된 것이다. 참으로 잔망스러운 잡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 성우진이 심기일전해 만든 <락킷>은 <월드 팝스>보다 고작 한두 호를 더 발간했을 뿐이고, 가장 사랑했던(심지어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던) 성문영의 <서브> 역시 2년을 넘기지 못했으며, 그 뒤를 이은 <비트> 또한 허무하게 사라졌다. 바야흐로 21세기가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키노>가 남아 있었다. <월드 팝스>와 <락킷> 사이에 모으기 시작한 영화잡지다. 기껏해야 동네 비디오가게에 죽치고 있거나, 일요일 정오의 TV 영화 프로그램을 챙겨보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열혈남아>의 스텝프린팅 기법은…"이라고 서두를 떼기만 해도 형님으로 모실 준비가 되어 있던 고등학생에게 정성일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기사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키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뿐이었다(아마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비록 창간호부터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헌책방을 돌며 과월호를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공씨책방'을 비롯한 신촌의 헌책방을 돌다보면 책등에 빨간 스프레이가 칠해진 과월호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사이사이의 몇 권만은 구할 수가 없었지만.

그 사이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나날을 살았지만, 매달 <키노>를 사는 일은 잊지 않았다. 잡지가 쌓이는 것에 반비례해 잡자를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세상엔 성경을 읽지 않고도 훌륭한 신자가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 당시의 여자 친구에게 매달 <키노>를 사라고 신신당부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도사였다. 하지만 <키노>는 2003년 7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한다. 그 소식을 들은 건 같은 해 9월, 두 번째 휴가에서였다. 100에서 하나가 부족한 99호였다. 여자 친구가 이별을 통고한 것은 몇 달 후의 일이다.

100-6

제대 후 한동안은 헌책방에 들를 때면 잡지 코너를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대신 나는 다른 잡지들을 찾았다. 에서 까지 분야도 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잡지를 모으는 일은 그만두었다. 같은 잡지를 연이어 사는 일도 드물었고, 한 번 읽은 잡지는 그대로 버려두곤 했다. 과방에, 강의실에, 지하철에, 버스에, 커피숍과 술집에. 자연스럽게 얄팍한 주간지(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키노>는 취직 후 영화를 사랑하던 친구 C에게 줘버렸다. 나보단 그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었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기분은 아니었다. 대체로 덤덤했고, 아주 조금 속이 울렁거렸을 뿐이다.

C는 그후 영화 제작부에 들어가 최저 임금보다 못한 급여를 받으며 몇 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결코 가볍다고는 할 수 없을 사고를 치고 그때까지 받은 급여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물어낸 후 영화계를 떠나야 했다. 지금은 옆 동네에서 작은 당구장을 운영하며 술만 마시면 지난 이야기를 들먹이곤 한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인터넷 서점의 MD가 되었다. 이력서에 희망연봉으로 1850만원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월급으로 매달 150만원을 받고, 남은 50만원으로는 책을 사면 좋겠다는 계산이었다. 멍청한 생각이다. 나는 150만원보다는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50만원보다 훨씬 큰돈을 책값으로 쓰게 될 예정이었다.

다시 잡지를 모으기 시작한 건 입사 후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나는 두 가지 고민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그만둬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하나, 매달 나오는 월급에 길들여져 평생 고분고분하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또 하나였다. 이게 무슨 멍청한 생각이란 말인가?

그때 눈앞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잡지 몇 권이 보였다. 당시 종종 사보던 이었다. 얄팍한 주간지를 미처 읽기도 전에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난 것이다. '김영진의 러프컷'만 골라 읽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좀 더 멍청한 생각이 떠올랐다. 주간지가 100권이 모이면 회사를 그만두자는 생각. 이 이야기의 가장 멍청한 부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정말로 을 꽂아두기 시작했다. 업무용 서가에 한 권, 다시 한 권씩. 그것도 업무라면 업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서가를 보며 스스로를 달랬다. 멍청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해야겠다. 제 아무리 요란한 충고와 협박과 분석과 위로로 무장한 자기계발서라도 책장을 덮는 순간 가뭇없이 사라지게 마련. 하지만 은 그곳에 있었다. 자신만의 속도로 몸피를 늘려가면서, 부정할 수 없는 물성을 지닌 채 눈앞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94권이 모였다. 약속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사내 공용폴더에 접속해 사직서를 찾았다. 어느새 2년이 더해진 사회생활이 내게 가르친 프로세스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멍청이였다. 양식의 빈칸을 채운 후에도 차마 보낼 수가 없어 한 주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95권이면 5주가 남았다는 이야기다. 모자란 시간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 주를 보냈다.

제법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출근길 지하철 매점을 찾았다. 아직 은 나오지 않았다. 마음을 조금 더 단단하게 먹고, 퇴근길 지하철 매점을 찾았다. 아직도 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며칠 동안 매점과 편의점과 서점을 찾겠지만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었다. 은 영원히 나오지 않을 테니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은 폐간되었다. 누군가 내게 장난을 치는 걸까? 하지만 내겐 장난을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누구보다 먼저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책장에 꽂힌 94권의 을 버리기 시작했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쌓인 잡지를 버리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몇 분 걸리지도 않았지만 속이 울렁거려 몇 번이나 침을 삼켜야 했다. 침은 진득했고 비린 맛이 났다. 2008년 12월의 일이다.

그 무렵 지하철에 붙은 해직기자들의 성명서를 본 기억이 난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100-1 (2)

다시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을 마지막으로 나는 영화잡지를 보지 않았고, 다른 어떤 잡지도 보지 않았다. 업무와 관련해 몇 권의 잡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보진 않았다. 가끔 멋진 배우들이 표지를 장식하는 남성지를 들춰보긴 했다. 하지만 읽지는 못했다. 눈이 시려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우스운 일이다. 군대에 있을 때나 대학교를 다닐 때 종종 보던 잡지가 아닌가.

나는 아마 숫자를 생각했던 것 같다. 복잡한 계산을 하기도 했겠지. 실은 단순한 산수였을 것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단어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며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행복.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행복. 광택지에 인쇄된 행복.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종종 들춰보곤 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원고를 청탁하는 전화였다. 영화주간지에 격주로 들어갈 원고라고 했다. 내가 가끔 보던 잡지였다. 최소한 몇 번은 본 잡지였고, 내가 한번이라도 돈을 내고 구입한 잡지에서 원고를 청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의 원고를 쓴 나는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럴싸한 이유를 지어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분명한 건 열 번째 원고를 쓸 무렵에 나는 더는 회사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뭐랄까, 앓던 이가 빠진 것과 비슷할 것이다. 비슷하겠지만 결코 시원한 기분은 아니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편해졌다고 느낄 뿐이다. 하지만 그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나는 혀를 움직여 이가 있던 자리를 더듬는다. 무의식중에 하게 되는 일이다. 더듬고, 더듬은 끝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출렁인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과 비슷하다. 앓던 이라지만 이는 이다. 있었던 것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빈자리.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오래된 교훈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빈자리는 무엇으로든 채워지게 마련이라고.

나는 이런저런 매체에 서평을 가장한 잡담을 쓰며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매주, 그리고 매달 같은 날에 배달되는 잡지도 받는다. 마치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내 글이 실린 잡지를 받는다는 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나도 모르게 넘긴 책장에서 풀려난 후회와 좌절과 온갖 회한이 나를 괴롭히고, 꼼짝도 하지 않는 건 원고다. 다른 누군가의 원고이길 간절히 바라지만 꼼짝없이 내가 쓴 글이다. 고칠 수도 무를 수도 없다. 버린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저 묵묵히 쌓아놓을 수밖에. 언젠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건 영화주간지다.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격주로 배달되던 잡지를 나는 침대 발치의 상자에 고스란히 모아두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그곳에는 403호에서 501호까지, 모두 99권의 <무비위크>가 있다.

100

이제 남은 건 100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프레시안 books를 위한 자리다. 나는 지금 프레시안 books의 100호를 기념해 박수를(짝) 치며(짝) 이 글을 쓰는 중이고(짝짝), 원고 마감 시간을 이미(짜작) 넘긴 상황이다(짝). 그러니 짧게 말해야겠다(짝짝).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처럼 나는 100과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프레시안 books 덕에 비로소 100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그러니 먼저 감사를, 다음으로 축하를 드린다.

마지막으로는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의 한 구절을 인용할 생각이다. 153개의 짧은 장으로 이루어진 에세이집의 100번째 장을 아도르노는 이렇게 시작한다.


▲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김유동 옮김, 길 펴냄). ⓒ길
해방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경우 사람들은 '인간적 가능성의 실현'이나 '풍요로운 삶'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된다. 그러한 질문이 불가피하다고 인정되면서도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그러한 의기양양한 대답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이러한 대답은 삶을 만끽하려 들었던 1890년대의 수염이 텁수룩한 자연주의자들 같은 사회주의자의 이상형을 연상시킨다. '아무도 더 이상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가장 소박한 답변만이 부드럽게 들린다. 다른 답변들은 모두 인간의 욕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태나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굴러가는 '생산' 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간 행태를 상정하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인간과 같은 소망상에마저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 배어 있는데,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물신주의에는 제약과 무기력, 항상 똑같은 것이 만드는 불모성 같은 것이 감초처럼 따라다닌다. 시민사회의 '무역사성'의 일부지만 그를 보완해주는 개념인 역동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위치로 부상되었지만, 이 개념은 생산법칙에 대한 인류학적 반사로서 해방된 사회에서는 그 자체가 욕구와는 비판적으로 대치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구속받지 않는 행동, 중단 없는 생산, 포만감을 모르는 빵빵한 배, 신명나는 일거리인 자유 같은 관념은 시민사회의 자연 개념을 먹고사는데, 이 자연 개념은 예로부터 항상 오직 사회적인 폭력을 변경 불가능한 것, 건강한 영원성의 일부로 선전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100. 물 위에 누워',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김유동 옮김, 길 펴냄), 208~209쪽)

아도르노의 말이 이 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지금부터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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