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출신의 엔리케 두셀은 해방 철학자로 알려진 동시에,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에 대한 연구로 이름이 높다. 그는 서구 식민지 이론이 비서구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영혼을 착취하고 기만하는 구조를 지속적으로 폭로해왔다.
들뢰즈, 라캉, 가타리 등의 이론이 인문학의 주류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시대에, 엔리크 두셀은 주변부에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엔리크 두셀을 주목하는 순간, 우리는 읽어내기조차 쉽지 않은 프랑스 철학의 택스트에서 해방되어 매우 명쾌한 어조로 우리의 의식을 뒤덮고 있는 쇠 항아리를 벗겨낼 수 있게 된다.
<1492년 타자의 은폐>(엔리케 두셀 지음, 박병규 옮김, 그린비 펴냄)는 "아메리카라는 개념의 발명(The Invention of the Americas) "이라는 원제와 "타자의 소멸과 근대성 신화(Eclipse of the "Other" and the Myth of Modernity)"라는 부제를 달고 1992년 나온 책이다. 말하자면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500주년 기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인 셈이다.
두셀은 바로 이 사건이 유럽의 근대성을 창출한 시대적 출발점이자, 유럽 이외의 지역에 대한 "타자" 개념이 형성되고 이를 유럽의 지배질서를 만들어내는 사상적 기초로 삼아나간 기원적 연도라고 본다.
"1492년은 근대성이 '탄생한' 해이다. 그러나 근대성이 탄생한 때는 유럽이 타자를 마주하고, 타자를 통제하고 타자를 굴복시키고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였다. 또 근대성을 구성하는 타자성을 발견하고 정복하고 식민화하는 자아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던 때였다."
"정복하는 자아"를 직시하다
여기서 우리는 유럽 근대철학의 "생각하는 자아(ego cogito)"가 사실은 "정복하는 자아(ego conquiro)"와 그대로 일치하거나 결합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두셀은 바로 이점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콜럼버스의 "발견"은 사실상 그 발견된 대상을 "은폐"하는 인식의 변환을 거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어로 표현하면 "discover"가 아니라 "cover"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유럽이 발견했다고 하는 타자는 독자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유럽에 의해 존재로 판명되거나 그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 <1492년 타자의 은폐>(엔리케 두셀 지음, 박병규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
하지만 이들은 아주 오래 전 아시아에서 건너왔다는 점에서, 서구의 위치에서 바라보자면 그야말로 극동 "아시아"가 되는 격이라는 것이다. 그 아시아는 유럽이 자신의 문명에 대한 자각과 정체성을 깨닫기 훨씬 이전에 독자적 문명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문명체계를 파괴한 장본인은 바로 유럽 정복자라는 점에서, 문명 부재의 상황을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인들은 이러한 정복과 침략, 파괴와 약탈을 철저하게 호도한다. 이들의 논리는 모두를 위한 선행으로 포장한 근대성을 앞세운 폭력일 뿐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타자에게 행사하는 지배란 실제로는 야만인을 문명화하고 발전시키고 '근대화'시키는 해방이자 '이익'이고 '선'이다. 이것이 '근대성 신화'이다. 무고한 사람(타자)을 희생시키고, 그 원인을 희생자의 책임으로 돌리며, 근대 주체는 살해 행위와 관련하여 무고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피정복자(피식민지 주민)의 고통은 근대화의 대가, 불가피한 희생으로 해석된다."
다 너를 위한 것이야, 하면서 때리는 자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이 있지 않는가? 일제 식민지 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나, 박정희 유신체제를 정당화시키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주장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겨 있는 폭력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으며, 희생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는 식으로 호도한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스스로가 남북 대치관계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아직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누릴 만큼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필요한 방식이라는 주장을 폈던 바 있다. 서구의 근대성 논리에도 이러한 주장은 장착되어 있다. "미성숙한 존재들을 문명화시킬 책임"을 지닌 서구가 이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된다.
따라서 1492년은 서구와 비서구가 서로 문명사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한 세계가 종말을 고했다. 그러므로 '두 세계의 만남'이라는 표현은 입에 발린 말이고, 공허한 말장난이다. 두 세계 가운데 한 세계는 근본 구조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만남'이라는 개념은 은폐적이다. 인디오 세계, 타자세계에 대한 유럽 세계와 유럽 자아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럽 근대의 기원에 숨겨진 논리에 대해서 두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낸다.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설명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합리성이지만, 타자를 희생시키는 폭력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신화이다."
서구의 근대성이 이성의 합리성을 깃발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전 시대의 신화와 대립되면서 동시에 비서구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고 신화적 본질과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의 죄를 없는 것으로 만들고 "비서구의 문명 이전 상태를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일본은 그렇게 해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미국은 그런 방식으로 1945년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의 민주주의를 통제·관리하려 들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정권들 모두가 희생자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자신의 폭력을 교묘하게 제도화시키며, 그 사실이 드러나면 문명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합리화한다.
얼마 전 박근혜가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대한 사과" 운운도 동일한 맥락이다. 폭력의 행사는 본의 아니었으나, 그 목적은 "산업화"라는 문명적 수준의 격을 갖춘 것이라는 논리가 그 안에 담겨져 있지 않은가?
철학의 해석학적 임무
엔리케 두셀은 발견이 은폐가 되고 정복과 침략이 문명으로 해석되는 구조를 파산시키고, 바로 그렇게 은폐된 존재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철학의 해석학적 임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두셀의 주장은 실로 모든 정치행위에 작동해야 하는 논리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의 목소리가 되고, 부당하게 존재가 부인당한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불러내고 배제당한 이들을 다시 무대 안으로 호명하는 노력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출발점이다. 아닌가? 지배 권력이 자신의 목표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누군가를 "못난 타자"로 만들면서 끊임없이 희생시키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기만과 폭력은 그칠 수 없다.
두셀은 유럽의 근대성 신화와 논리를 이렇게 압축한다.
"근대성의 이성적 핵심은 인류를 문화적, 문명적 미숙함의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로서의 근대성은 세계적 지평에서 피착취 희생자로서 주변부 세계, 식민세계의 남성과 여성을 제물로 바치며, 이들의 희생을 근대화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희생, 비용이라는 논리로 은폐한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전근대적 상황을 혁명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비서구에 이 근대성이 접합되는 순간, 그것은 폭력적인 신화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비합리적 신화는 해방행위를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두셀은 위계질서의 착취구조를 폭로하는 <피라미드 비판>이라는 책을 쓴 옥타비오 파스와 마르크스의 <자본>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이렇게 맺는다.
"새로운 신을 위해 새로운 제단에서 희생된 사람은 1492년 이래 식민화된 민중, 세계 주변부 민중이었다. (…) 실제 역사에서 정복, 억압, 예속, 강탈, 살인, 한 마디로 폭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이것을 명확히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당한 폭력과 그 폭력의 주체, 그리고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모든 정의는 이걸 발견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은폐되어 있던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첫 출발은 지배 권력이 행사한 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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