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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SF 전설' 나온다면, 이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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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SF 전설' 나온다면, 이 남자다!

[親Book] 배명훈의 <은닉>

나는 어지간해서는 아는 사람의 책에 대해 공개된 자리에 글을 쓰지 않는다. 단순하고 조금쯤 유치한 이유에서이다. '주례사 비평'이라는 말이 있다. 친분이 있는 사람이 만든 책에 안이한 찬사를 늘어놓는 경우를 일컫는 말인 모양이다. 글 쓰는 일이 업인 입장에서는 자기 손으로 써낸 글이라면 그것이 서평이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힘이 바짝 들어간 귀한 내 글이다.

보통 재미없게 읽은 책에 대해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가타부타 글까지 쓸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으니, 서평을 쓴다면 대개 남에게 소개하고 싶을 만큼 괜찮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공개적인 인연이 있는 작가의 글을 칭찬하는 순간 '주례사 비평'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쓴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으면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나, 작가로서의 내 자의식은 내 글이 온전히 내 것으로 읽히지 않는 경험 앞에서 초연하기에는 너무 똘똘 뭉쳐 있다. 그러느니 안 쓰고 만다.

그럼에도 소중하게 가꿔온 콩알만한 자의식이야 아무래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쓰고 싶을 때가 온다. 내가 무슨 말을 들어도 좋으니 그냥 너도 걔도 쟤도 이 책을 봤으면 싶을 때가 있다. 정말 좋은 책, 이 세상에 계속해서 태어나고 있는 수많은 좋은 책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좋은 책을 만났을 때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배명훈의 신작 장편소설 <은닉>(북하우스 펴냄)에 대해 쓰기로 결심했다.

▲ <은닉>(배명훈 지음, 북하우스 펴냄). ⓒ북하우스
연방의 킬러인 주인공은 십 년을 일하고 일 년 휴가를 받는다. 사람 죽이느라 고생했으니 몸 좀 쉬라는 휴가가 아니다. 여생도 새까만 사람으로 살지, 아니면 이쯤에서 삶을 끝낼지를 결정하라고 주어진 시간이다. 이 귀한 휴가가 아직 일곱 개월이나 남았는데 시커먼 사람이 나타난다. 연극표 한 장. 뭘 좀 보고 와서 보이는 대로 말해 달란다. 칼이 아니라 혀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라는 낯선 지시.

주인공은 지시를 따라 <랑페의 결백>이라는 밀실 추리극을 보러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은경을 만난다. 연방영재학교에서 가장 특별했던 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권력자 장무권의 숨겨진 딸. 장무권이 장악하고 있던 전략무기네트워크의 후계자일수도, 아무것도 아닌 젊은 여자일지도 모르는 존재. 숙청의 바람에서 살아남아, 차가운 이국땅에서 입을 꾹 다물고 시체를 연기하고 있는 은경을 발견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휴가는 끝난다.

<은닉>은 바로 앞에 나온 같은 작가의 두 권짜리 장편소설 <신의 궤도>(전 2권, 문학동네 펴냄)와 아주 다른 작품이다. 이 책은 <신의 궤도>보다 가볍고, 어둡고, 빠르고, 작다.

시간적으로 이 책은 주인공이 김은경을 다시 보고, 역시 연방영재학교시절부터 친구(?)인 진짜 천재 조은수를 찾고, 김은경의 목숨을 처음에는 혀로, 나중에는 팔다리로, 그 다음에는 온 몸과 시선으로 지켜내려고 뛰어다닌 짧은 시간을 다루고 있다. 공간적으로도 이 책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 앞에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작다.

적당한 크기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란 무척 어렵다. '지금 여기'를 벗어난 시공간을 다루는 과학소설(SF)의 경우 더 그렇다. 적당히 작은 이야기를 빚어내지 않으면 출판하기 어려운 시장의 현실도 외면할 수 없는 장벽이다. 배명훈은 <은닉>을 통해 자신이 '이야기의 크기를 조절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해낼 수 있는 작가임을 보여준다.

배명훈의 전작들, <타워>(오멜라스 펴냄), <안녕, 인공존재>(북하우스 펴냄), <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이병량 그림, 킨더랜드 펴냄), <신의 궤도>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훌륭한 책들이었다. 작가 본인은 재기발랄하다거나 발칙하다거나 새롭다거나 하는 수식어에 슬슬 질려 가는 모양이지만, 나는 배명훈의 등장이라는 사건 자체에 한국의 독자들에게 독서의 시공간을 확장하는 '새로운' 경험인 측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은닉>을 읽고는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작가의 어떤 전작들과도 다른 속도감을 갖고 있는데, 특히 <신의 궤도>의 압도적인 스케일을 보았던 독자에게 강렬하게 부딪히는 새로움이 있을 것이다.

<은닉>은 배명훈의 책 중 가장 장벽이 낮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과학소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과학소설이라고 불러도 좋고 첩보물이라고 해도 좋고 스릴러라고 해도 딱히 틀린 덴 없고, 판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이 품을 수 있는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은닉>은 매우 빠른 책이기도 하다. 문장과 이야기의 속도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긴박하지만 숨 막히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다.

<은닉>을 사면 '배명훈 매뉴얼'이라는 소책자를 주는데, 거기에는 'SF 분야의 전설로 떠오르는 작가'라는 찬사가 쓰여 있다. 매뉴얼을 먼저 펴 보았을 때에는 민망할 만큼 요란한 수식어다 싶어 "와, 벌써 전설 코앞?"하고 웃었지만, <은닉>까지 오고 나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배명훈은 한국 SF의 전설이 될 작가이다. 배명훈이 다음에는 무엇을 보여줄지 몰라도, 뭔가 더 있으리라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린다.

독자로서 이런 작가와 동시대 같은 언어권에 살며 신작을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이상의 기쁨이 있으랴. 작가로서는, 글쎄, 자의식이고 주례사고 다 됐고, 나 전설하고 아는 사이다! 이렇게 훌륭한 소설을, 누구에게나 거침없이 추천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빚어내는 사람 얼굴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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