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봤더니 이게 모두 유럽의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논리였어' 하는 깨달음은, 고전으로 떠받들어지고 그걸 모르면 무식하다고 평가받는 서구 근대철학을 거꾸로 반격하게 한다. 칸트, 헤겔, 마르크스…, 이름만 들어도 근대 서구의 자아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 사상의 진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내면에 사실은 비 서구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자아를 당연하게 여기고 합리화하는 논리가 숨겨져 있다면? 그래서 사실은 해방이 아니라 노예가 되는 길이 그곳에 은닉되어 있다면?
여성의 고통을 치유하고 여성의 주체적 입지를 세우는 일에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온 대표적인 여성학자 임옥희는 그런 차원에서 가야트리 스피박의 <포스트 식민 이성 비판(A Critique of Postcolonial Reason)> 텍스트를 다시 읽어나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성이라는 이른바 "하위주체(Subaltern)"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의 모색이다. 이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현실'을 증언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그 현실이 전복시켜야 할 체제라면 그 전복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로 설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같이 금융 자본주의의 지배 질서가 여성을 더더욱 착취하는 상황, 자본의 회전 공간에서 폐기처분해도 되는 대상(disposable)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그걸 지원하고 있는 논리나 사상을 마치 그 반대 진영에 속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 논리와 사상과 손을 잡는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바로 여기에서 스피박과 임옥희가 겨냥하는 바가 일치하게 된다. 가령 "영문학의 고전들이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불후의 명작이 아니라, 제국의 발명에 이바지하고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게다가 이런 지점에 대한 인식이 없는 채로 페미니즘이 여성 문제를 발언한다면?
페미니즘이 딛고 서 있는 땅은?
▲ <타자로서의 서구>(임옥희 지음, 현암사 펴냄). ⓒ현암사 |
자유와 해방을 위해 열심히 서구 근대 이론의 학습에 몰두한 이후 그 결과가 서구 제국주의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헌신해버리는 모순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기가 찰 노릇이다. 따라서 유럽의 근대가 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문명화시켜야 할 "타자"로 만들어버린 논리를 역전시켜, 바로 그 유럽을 "타자"의 자리에 세워 그 정체를 검토해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대단히 난해한 논법과 문장으로 전개되는 스피박의 책이지만, 이런 기본 입지를 파악하면 임옥희가 어째서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스피박 텍스트 읽기에 의미를 두었는지 알게 된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식민지 시대가 종료된 이후에도 유럽의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헤게모니는 계속 발동되고 있고. 그것은 유럽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식민지의 고통을 겪어낸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목소리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식민지 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포스트 식민 이성" 내지는 "탈 식민주의 이론"에도 유럽은 "중심"이고 그 외의 문명권은 "주변화된 타자"로 설정된 구도가 엄존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격파해내지 않으면, 정작 자기 목소리로 말해야 할 사람들은 언제나 침묵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스트 식민 이성을 앞세우는 이들이 대신 자기 사정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정작 그 자신은 은폐되거나 소멸되던지 아니면 망각되어버리고 더더욱 주변화되는 모순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1세계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지만, 이런 포스트 식민 이성의 논리에 벗어나 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책의 저자 임옥희가 스피박의 입장을 요약했듯이,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3세계 자매들 위에 군림하는 백인 여성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토착 정보원"의 재생산
뿐만 아니라 3세계에 속하는, 유럽 인문정신을 교육받은 이들은 제국에 자신의 종족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자신의 종족이 계속해서 유럽의 하위주체로 남게 하는 일에 공모자가 되는 이른바 "토착 정보원(Native Informer)"이 되고 만다. 제국의 유지에 이들의 존재와 역할은 핵심적이다. 따라서 토착 정보원을 재생산해내는 구조와 논리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절하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직접 말하고, 그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질서에 대해 저항하고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은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울 것이다.
스피박의 <포스트 식민 이성 비판>에 대한 정밀한 읽기를 시도한 임옥희의 시선은 텍스트 읽는 작업에 몰두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스피박의 저서와 우리의 현실을 이어내는 그녀의 태도는,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문제에 담겨진 정치성을 제거해버린 것을 극복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임옥희는 1970년대 말 동일방직 사건의 주체들이 <우리는 정의파다>라는 이혜란 감독의 다큐를 주목하면서, "당사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하위주체의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를 통해, 서구적 근대가 지배해온 자본의 논리를 깨뜨려 나가는 운동의 힘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근대 철학이 상정하고 있는 주체적 사유의 자아에 담긴 문제를 목격하게 된다. 임옥희는 스피박이,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 주체는 유럽인을 내세우고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며,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정신사적 발전에서 비 서구는 배제되어 있거나 주변 내지는 정체(停滯)된 본질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걸 지지한다. 더군다나 칸트는 여성은 "교육시킬 수 없는 존재"라고 이해했다는 점에서, 이렇게 된다면 철학은 여성에게 불가능의 영역이 된다. 문명과 야만의 구별은, 동서의 경계선만이 아니라 젠더의 수준에서도 확정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철학의 시선은 인간 이해의 왜곡과 폭력에 다름이 아니게 된다. 제국의 논리에 폭력이 숨어 있는 까닭이 달리 있지 않다.
엔리크 뒤셀과 스피박
이걸 데리다식으로 해체(deconstruction)하지 않으면 비 서구를 문명화시키는 기획을 앞세우는 서구 제국주의의 공리에 지배당한다는 경계심을 보이는 스피박의 논리는, 오늘날 우리가 치열하게 학습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 서구의 근대에 뿌리를 둔 일체의 인문지식에 대해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그 긴장은 <1492년 타자의 은폐>(박병규 옮김, 그린 비 펴냄)에서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점검한 해방철학자 엔리케 뒤셀이 명쾌하게 정리한 대로, "사유하는 자아(ego cogito)"에서 "정복하는 자아(ego conquiro)"로 바뀌어버린 현실과의 대치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미숙한 상태에 있는 인류가 있다면서 이를 문제 삼았는데, 그 "미숙한 인류"가 바로 유럽에 의해 "타자"로 설정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인들이고 따라서 이들이 칸트의 말대로 "나태하고 비겁하다"면, 이들을 정복하고 지배한 자들은 부지런하고 용감했던 것일까?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은 발견의 사건으로 조작되고, 이 발견의 사건은 유럽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 질서 내부에서 비 서구를 타자로 발명한 결과라는 엔리크 뒤셀의 관점은 스피박의 포스트식민주의 이성 비판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 제국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파고들었던 이크발 아마드(Eqbal Ahmad)나, 문학 속에 담겨진 제국의 논리를 비판해온 아이자즈 아마드(Aijaz Ahmad)도 임옥희가 제기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피박과 함께 읽어나면서 논의를 확대해나간다면, 오늘날 우리의 인문지식과 지평에 대해 비판적 담론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를 토대로 페미니즘에 부정의 철학 내지는 변증법적 접근을 시도했던, 트로츠키의 비서이기도 했던 라야 두나예브스카야(Raya Dunayesvskaya)는 아마도 이런 스피박의 시도에 대해 바로 그런 해체철학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유산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인문정신이 우리의 생생한 현실과 어떻게 만나 새로운 불꽃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사라져가는 현재의 역사를 향해(Towar A History of the Vanishing Present)"라는 부제가 붙은 스피박의 원저를 힘겹게 읽어내던 기억이 새롭다. 이름 없이 공식사에서 배제되어가는 존재를 되살려 내는 스피박에 대한 임옥희의 끈질기고 정밀한 읽기는 스피박의 <포스트 식민 이성 비판> 읽기를 훨씬 용이하게 도와준다. 임옥희의 <타자로서의 서구>를 읽는 일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는 하나, 그녀의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녀가 안내하는 스피박의 세계와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접점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문정신에 대한 갈망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문정신에 대한 비판적 검증의 기회를 갖게 한 임옥희의 저서는 우리를 "창조적으로" 긴장하게 할 것이다. 역습의 쾌감 이후, 기존 사유의 해체를 통한 재구성의 노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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