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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현대와 달리 쾌적한 삼성 공장!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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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현대와 달리 쾌적한 삼성 공장! 그런데…

[철학자의 서재] 김수박의 <사람 냄새 :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사람은 없고 제품만 있는 삼성 전자

1987년 6월은 거대한 격동기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끊으려는 민주 세력의 열망이 절정에 달한 가운데, 결정적으로 불을 댕긴 것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한열 열사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안락한 삶을 누리던 넥타이 부대까지 거리 시위에 동참하면서 마침내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받아들인 6·29 선언을 끌어낸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일주일 동안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이 주관하는 신임 교수 교육에 '끌려' 들어갔다. 전두환 정권 초기부터 처음 대학 교수로 임용되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정신문화연구원에 들어가 1주일 동안 합숙하면서 안보 교육, 경제 교육 등을 받아야 했다. 군부 독재정권은 치졸하게도 교수들을 세뇌시키면 학생 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정신문화연구원을 가리켜 정신병원이라고 불렀다.

사실 나는 1985년에 대학 전임이 되었으니 벌써 다녀왔어야 했지만, 졸업 정원제로 학생이 늘어나면서 새로 임용된 교수 숫자도 많았거니와 개인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고 싶지 않아 요리조리 빼던 중 이번에야말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교육 받으러 들어온 50명 가운데 미리 알던 몇 사람이 뜻이 맞아서 이런 교육 없애자는 토론을 공개적으로 벌이기도 했고, 그 때문인지 그해 여름을 마지막으로 교육이 없어졌다.

그 교육 과정 가운데에는 탈북자와의 대화도 있었고, 비무장지대(DMZ) 방문과 산업 시찰도 있었다. 산업 시찰을 위해 우리가 간 곳은 경인에너지, 포항제철,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그리고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의 방문은 내게 작은 충격이었다. 정말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쾌적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이 방진복이라 불리는 눈처럼 흰 모자와 흰 옷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망치 소리, 기계 소리로 정신이 없었던 다른 기업의 공장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삼성에 노사분규가 거의 없고 현대, 대우 등의 노사분규가 심한 까닭이 이런 작업 환경의 차이에서 오겠구나 하는 무식한 생각을 했다.

이런 무식한 생각을 깬 책이 바로 보리출판사가 펴낸 만화책 <사람 냄새>(김수박, 김성희 글·그림, 보리출판사 펴냄) 다. 이 책의 제목 앞에는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내가 그때 본 깨끗한 환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품을 위한 것이었다. 그 속에는 고장 나면 언제든 버려지는 부품만 있을 뿐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무노조 신화', '반도체 신화'로 이름을 올린 삼성, '국민 기업', '글로벌 기업'이라고 불리면서도 사회 지배층 곳곳에 '삼성 장학생'을 심어 놓고 '특검'마저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거대한 공룡 같은 삼성, 젊은이들이 가고 싶은 대기업의 표본이면서도 탈세와 비리의 대명사이기도 한 삼성, 바로 그 삼성에서 일하다 꽃다운 나이에 백혈병으로 죽어간 황유미 씨의 이야기이자, 딸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거대한 삼성과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이야기이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돈과 권력으로 짓밟는 삼성의 비리에 하수인으로 참여했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양심선언을 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처럼, 우리에게 '국민 기업'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있는 '사람 냄새 없는 기업' 삼성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삼성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어요?

▲ <사람 냄새 :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김수박 지음, 보리출판사 펴냄). ⓒ보리출판사
2003년 10월 당시 속초상업고등학교 3학년이던 황유미 씨는 학교의 추천으로 친구 10명과 함께 설레는 마음을 안고 삼성전자에 입사하였다. 부모는 전문대학이라도 가라고 하였지만 유미 씨는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 제가 벌어 동생 대학 보내겠다고 삼성에 지원을 했던 것이다.

한 달 동안의 교육을 마친 뒤 그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정식으로 배치되었고, 잠시 다른 기계를 거쳐 3라인 3베이에서 일하게 되었다. (베이는 기계 한 대를 부르는 호칭인데, 나도 이 책을 통해 반도체 공정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얻었다.) 1라인에는 모두 24대의 기계가 있었는데 23대는 자동이었지만 유미가 배치된 3베이는 수동이었다. 그 자리는 임신을 한 전임자가 유산을 해서 사표를 내고 퇴사한 자리이기도 했다.

유미 씨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한 달에 한 번 속초 집에 왔고, 일이 힘들다고 하면서도 딸의 자리, 회사원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냈다. 2005년 5월 말 처음으로 몸에 멍이 들고 구토를 하며 어지러움을 느끼는 증세가 시작되었고, 6월 10일 아주대 병원에서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그 병원에는 반도체 사업부 1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또 다른 환자 황민웅 씨가 있었고 그는 7월 23일 사망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삼성 반도체 기흥 공장에서는 노후 라인으로 불리는 곳에서만 백혈병 또는 희귀병 환자가 5명이나 나왔다.

반도체 공정은 며칠에 한 번씩 원판을 화학 약품으로 닦아내야 했는데, 서울대학교 연구진의 발표에 따르면 반도체 공정에 99종의 화학 물질이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화학 물질을 다루는지 알지 못했다. 교육이 있기는 해도 안전 교육이 아니라 일에 대한 교육뿐이었다. 화장을 하면 안 되고, 무스나 스프레이도 안 되고, 뛰면 안 되고, 세 명 이상 모이면 안 되고 하는 교육들은 모두 제품을 위한 교육이었다. 생산량이 많으면 인센티브를 주는 상황에서 불량 없이 많이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것은 예사였고, 더구나 외환 위기 이후 인력을 줄여서 4명이 작업하던 것을 2명이 맡음으로써 노동 강도가 세졌다.

유미 씨는 항암 치료와 골수이식까지 받았고, 식구들 모두가 그의 병 수발에 매달렸다. 개인택시 운전을 하던 황상기 씨는 일도 제쳐놓고 수시로 속초와 수원을 오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유미와 한 조가 되어 같이 일하던 이숙영 씨가 2006년 7월 백혈병 판정을 받았고 그해 8월 사망했다.

치료 과정에서 황상기 씨는 삼성의 과장을 만나 산업재해 처리를 부탁했다. 하지만 과장은 회사와 상관없는 개인 질병이라고 펄쩍 뛰면서 사표를 쓰도록 요구했고, '삼성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주눅이 든 황상기 씨가 그때까지 들어간 치료비 8000만 원 가운데 사내 모금과 보험으로 처리한 부분을 뺀 5000만 원의 치료비 부담을 요구하자, 그 과장은 그러마하면서 사표를 받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병이 재발한 상태에서 찾아와 500만 원을 주고 갔다.

딸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준다던 돈도 주지 않자 황상기 씨는 산재 처리를 요구하며 속초에 있는 한나라당 사무실을 찾아갔고, 한국방송(KBS)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 하나 돕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딸에게 배운 서툰 솜씨로 인터넷에서 찾아내 연결된 곳이 <말>지였다. 그리고 유미 씨는 2007년 3월 6일 아주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운전하는 택시 뒷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안실로 찾아 온 삼성 직원들은 여전히 보상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회사와 상관없는 개인 질병이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2007년 4월 드디어 <말>지에 황유미 씨 기사와 함께 삼성이 백혈병을 은폐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됐지만 삼성 광고에 목을 매는 중앙지들은 하나같이 침묵했다. 그리고 황 씨는 <말>지 기자의 소개로 만난 '건강한 노동세상' 장안석 씨의 도움을 받아 2007년 6월 평택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도 삼성 편이었다. 그 뒤 민주노총 이종란 노무사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현장을 다 바꾼 상황에서의 역학조사와 한 10억 원 정도를 주겠다는 삼성의 파렴치한 제안, 그리고 역학조사를 토대로 산재라 할 수 없다는 'KBS 추적 60분'의 보도가 이어진다.

하지만 마침내 황상기 씨를 중심으로 한 '삼성 반도체 백혈병 진상 규명 대책위'가 발족되어 기흥 공장 앞에서 싸움을 시작했고, 이를 기회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반올림'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2012년 3월까지의 제보자만 155명이고 그 가운데 삼성 노동자가 138명이었으며, 그들이 걸린 병의 대부분은 암이었다. 그 뒤로도 삼성은 직원들을 보내 돈으로 회유하고 언론이나 다른 단체와 접촉하지 말 것을 종용했고 이 일은 2010년 7월 문화방송(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삼성의 산재 신청 포기 종용과 회유'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사람 냄새가 돈 냄새를 이긴다

초등학교 시절 <정의는 이긴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불의와 거짓과 음모를 뚫고 마침내 정의가 이기는 결말의 통쾌함만 아련히 남아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정의가 불의에 지고, 참이 거짓에 무릎 꿇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왜 사람들은 가질수록 강해지고 배울수록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욕심내면서 조금이라도 빼앗길까봐 겁을 내고, 배울수록 옳고 그름 앞에서 우유부단해지는 것일까?

2400여 년 전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다수가 소수를, 귀한 자가 천한 자를,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지배하고 이용하는 현실에 대항하여 싸운 묵자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으면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약자를 위한 방패가 되었고, 세상을 향해 다 같이 사랑하고 함께 나누자고 외쳤다. 물론 묵자가 꿈꾸던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이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람 냄새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람 냄새와 함께 곳곳에서 돈 냄새를 보여준다. 황유미 씨와 황상기 씨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거대 기업 삼성의 겉모습에 도취해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이데올로기를 배치한 것이다. 삼성에 빌붙은 삼성 장학생들, 세계 기업 반열에 오른 삼성의 위상,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불법과 탈법과 무법의 비리,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덮는 돈의 힘을 보여준다. 경영권 승계 과정의 불법 증여, 결말도 석연치 않은 삼성 특검, 그리고 다시 불거진 형제간의 재산 싸움. 어느 것 하나 돈 냄새 아닌 것이 없다.

심지어 황유미 씨 사건과 관련해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반도체 공장 산재 신청에 대해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피해자 가족들은 2010년 1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국정감사 결과,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전자 측에 행정소송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2011년 6월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행정소송 1심에서 법원은 황유미, 이숙영 씨의 사망을 직업병으로 인정함으로써 황상기 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물론 근로복지공단은 1심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고, 황상기 씨는 지금도 산업 재해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 싸움은 거대한 돈과의 지난한 싸움일지라도, 그리고 그 싸움에서 패한다 할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전쟁이다. 이 싸움을 보면서 조선 말 의병 전쟁이 떠올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반도는 의병 전쟁의 도가니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세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오랑캐가 사는 세상이며 마지막 하나는 짐승이 사는 세상이었다. 오랑캐가 사는 세상은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나라였고, 짐승이 사는 세상은 일본과 서양이었으며 오직 조선만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병장들이 남긴 글 대부분에는 '내가 의병을 일으킬 때 이기느냐 지느냐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기껏해야 화승총, 심지어는 칼이나 창 같은 구식 병장기만을 가지고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왜놈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돈'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싸움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고 사람답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래서 이기느냐 지느냐는 문제 밖에 있었던 것이다.

삼성과 싸우는 황상기 씨와 그를 도우러 나선 사람들, 그리고 이런 일을 만화로 그려 낸 김수박 화백과 김성희 화백, 이런 책을 펴낸 보리출판사. 우리는 그 사람들 속에서 2400여 년 전의 묵자를 보고, 100여 년 전의 의병을 본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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