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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도 이건희도 몰랐던 자기 계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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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도 이건희도 몰랐던 자기 계발법!

[親Book] 찰스 부코스키의 <여자들>·<팩토텀>

나는 두 발을 딛고 일어나 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잠시 후 기분이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일 뿐이었다. 나는 술이 필요했고 거액의 생명 보험이 필요했다. 휴가가 필요했으며 시골에 있는 집이 필요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코트 하나와 모자 하나, 총뿐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 사랑>(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 347쪽)

그래도 필립 말로는 운이 좋은 편이다. 나 역시 술이, 거액의 생명 보험이, 휴가가, 시골에 있는 집이 필요하지만 싸구려 코트조차 갖지 못했다. 가진 거라곤 결국에는 지고야 마는 야구팀의 로고가 새겨진 더러운 모자뿐. 만약 총이 있었다면 진즉 방을 나서 그 팀의 숙소를 찾아갔겠지. 아홉 시 뉴스에 얼굴이 나갈 수도 있었을 거다.

나는 두 발을 딛고 일어나 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별 수 없이 냉장고를 연다. 언제나 맥주 하나쯤은 품고 있는 냉장고다. 사실은 몇 개. 그렇다고 7월 8일로 예정된 반상회를 마친 후 이웃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일 정도는 아니다. (반상회의 주제는 계단 청소에 대한 것이고, 며칠씩 밖에 나가 들어오지 않거나 집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는 주제다. 이게 바로 내게 시골에 있는 집이 필요한 이유다.)

잔을 들어 맥주를 따른다. 지난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선물 받은, 다소 신경질적인 얼굴의 알베르 카뮈가 그려진 유리잔이다. 노랗게 질린 채 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생각이라고? 거짓말이다. 한 잔 술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마시고 또 마시며, 카뮈의 입장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다시 마실 뿐이다. 잔을 깨끗이 비운 후에야 비로소 생각한다. 냉장고에 가야겠다는, 딱 그 정도의 생각.

그래서 다시, 한 잔의 술이다. 불필요한 말이다.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은 언제나 한 잔의 술인 것이다. 당신과 나와 그와 그녀가 모두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은 채 시작하기도 전에 가뭇없이 사라지겠지만, 어느새 또 다른 오늘로 채워질 테고, 우리 또한 다시금 잔을 채운다. 우리 앞의 한 잔을. 그러니 건배! 어쩌면 당신은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당신을 위한 어느 잘생긴 <아저씨>의 충고.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겐 힘이 없고, 당분간 총을 가질 생각도 없으니까.

대신 나는 다른 아저씨를 떠올린다. 지갑을 잃어버린 아저씨, 말보로만 피우는 아저씨, 죽으려 했지만 죽지 못한 아저씨, 끈질기게 들이댄 끝에 선배 형의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던 아저씨를. "우리 정말 죽어버릴래요. 죽을 마음만 있으면, 반년쯤만 살다 죽을래요. 그럼 정말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은데"같은 말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아저씨이고, 여관방을 먼저 나서려는 그녀에게 지갑이라도 놓고 가라고 말하는 아저씨이며, 선배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다시 만난 그녀에게 다시 치근대다 "자긴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이라고 혼나는 아저씨다. 영화 <극장전>의 동수 이야기다.

영화가 끝날 무렵, 동수는 선배의 병실을 찾는다. 이제 막 죽을 고비를 넘긴 선배는, 그러나 앞으로도 몇 번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선배는, 그 중 어디에선가는 끝내 주저앉고 말 선배는 말한다. 아프다고, 아파서 죽을 거 같다고, 그런데 죽고 싶지 않다고, 정말로 죽고 싶지가 않다고. 내내 선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던 동수는 끝내 무너진다. 눈물을 흘린다. 흘리며 말한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내가 미안하다고, 형은 죽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병실을 나온 동수는 어느새 마른 눈으로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한낮의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거 같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며, 나 역시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슨 생각?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 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지금까지 나는 너무 많은 담배를 피워왔고, 그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든다. 왜 아니겠는가. 나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게 이제야 밝혀졌는데. 시대의 요구를 거스르지 않는 인간이,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을 수도 있는 인간이, 자기를 계발함과 동시에 국민건강을 증진시키는 인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생각한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거 같다는 생각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담배도 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언젠가 <시크릿>이나 <꿈꾸는 다락방> 같은 책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는 담배를 사랑한다. 도무지 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단 말이다. 그러자 문득 술부터 끊어야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 또 다른 아저씨, 유럽에 사는 빅토르 씨가 그랬던 것처럼.

"의사가 약을 처방해주면서, 내가 담배를 계속 피우고 운동을 안 하면 아무 효과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 그런데 나는 담배를 끊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게다가 나는 그럴 의지력도 없고. 알코올 중독자에게 의지력으로 술을 끊어보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처방이야. 그러니 내가 담배를 끊으려고 한다면, 나는 우선 술부터 끊어야 할 거야.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어. 담배를 피우면서도, 나는 담배를 끊지 않으면 혈액순환이 완전히 멈추고 다리가 썩어서 발이나 어쩌면 다리 전체를 절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타인의 증거>(용경식 옮김, 까치 펴냄) 131쪽)

이건 분명 멍청한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생각은 생각이다. 그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그를 이끈다. (전적으로 어느 자기 계발서 저자가 한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의미로서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기치로, 국가의 안녕과 그 자신의 구원에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그를 데려가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심오한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난 이제 쉰 살밖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난 책 한 권쯤 쓸 수 있을 거야. 여러 권도 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같은 책, 133쪽)

아, 가련한 빅토르 씨! 마침내 그는 깨달았지만,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누나가 살고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한 그다. 생활에 치어 다락 한 구석에 치워두었던 꿈, 한 권의 책을 쓰고야 말겠다는 가련한 꿈을 위해서. 하지만 그는 결국 술을 끊지 못했다. 담배를 끊지도, 동생이 위대한 작가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누나를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생각이 모자랐던 탓이다. 그래서 그는 누나를 죽인다. 그에게 "넌 안색이 너무 나빠. 눈가에 달무리가 졌어. 얼굴은 창백하고 배가 너무 나왔어.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구나. 운동을 해야지. 밖에도 좀 나돌아다니고, 좀 건전하게 살아봐"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던 누나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주옥같은 자기 계발서들에 비하면 충고라고 할 수도 없는 미미한 충고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나를 죽이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 단 한 권의 자기 계발서가 있었더라면! 왜 누구도 진작 그에게 <시크릿>이나 <꿈꾸는 다락방>과 같은 자기 계발서를 권하지 않았던가? 유럽이란 곳은 그토록 정이 없고 그토록 따뜻함이 없으며 서로를 돌볼 줄 모르는 비인간적인 곳이었던가? 백번 양보해서 그런 책이 미처 번역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의 출판계에는, 아니 문화에는 '힐링'이나 '위로', '공감' 같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쩌면,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의 나이 탓일 지도 모르겠다고. 망망대해의 나침반처럼 언제나 우리 삶의 지침이 되어주는 저 자기 계발서들을 보라. <20대 공부에 미쳐라>라고 했다.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라고,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라고도 했다. 어디에도 50대의 공부를 위한 조언은 없는 것이다.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제목의 책도 있지만, 이건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이나 취업을 대비하는 취업 준비생들에게나 하는 말이다(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공부와 죽음의 상관관계를 따져본다면 분명해질 문제이며, 이 사회의 '어른'들이 얼마나 공부하고 계신지는 또 다른 문제다). 헝가리 출신의 구루 루카치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고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반면 빅토르 씨처럼 자신을 인도할 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결국 빅토르 씨의 문제는 비단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일 당장 50대의 공부를 위한 자기 계발서가 나오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우리 출판계의 문제,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란 말이다.

아니, 아니다. 아무래도 말이 헛 나온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일은 벌써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에서는 본 적 없지만. 아무려나, 내게는 이런 거창한 시시비비를 따질 자격도 여유도 없다.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기고하지 않을 때만 자유로운 자유기고가이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명제를 스스로 증명하는 팀의 팬이다. 그러니 그저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것이 잘못이라면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아니, 이것도 아니다. '우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결국 모두 내 탓이고, 내 잘못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술잔을 비운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래봤자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는다. 반사회적 행위를 하고 있는 부담만 더해질 뿐. 나는 궁금하다. 왜 자기 계발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내려주지 않는 건가?

그렇지만 이건 너무 괴로운 생각이다. 인간은 이렇게 끔찍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적인 인간들과는 거리가 멀단 말이다. 비록 지금 내 앞의 술잔엔 술이 반밖에 남아있지 않다고는 해도.

그래서 나는 책을 집는다. 무릇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생각해야 하고, 남자라면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생각해야한다. 그들은 다른 훌륭한 인물들이 그렇듯 수많은 책을 읽었다. 읽었다고 한다. 나는 여자도, 그렇다고 스물일곱도 아니지만 성공하고 싶다. 적어도 실패하고 싶진 않다. 솔직히 말해 세상에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리딩(reading)하면 리드(lead)한다. 라임(rhyme)이 맞는 말이 대개 그런 것처럼, 이것 또한 객관적인 '팩트'다. 요즘 유행하는 모든 자기 계발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고, 부족한 부분은 자기 계발서로 보충한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이 무슨 멘토라도 되지 않는 한,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 <여자들>(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그래서 책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책을 집는다. 지푸라기라도 집는 심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아무 책이나 들어 마구 페이지를 넘긴다. 자기 계발서가 아니라도 좋다. 당뇨병 환자에게 때론 사탕이 약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찾았다. 바로 이런 구절이다.

술병을 들고 침실로 갔다.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서 침대에 들었다.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뭐가 되었듯 맹목적으로 눈앞에 있는 걸 움켜쥐려 한다. 공산주의, 건강식품, 선(禪) 사상, 서핑, 발레, 최면술, 집단 상담, 난교, 자전거 하이킹, 허브, 가톨릭주의, 역도, 여행, 금단 현상, 채식주의, 인도, 회화, 글쓰기, 조각, 작곡, 지휘, 배낭여행, 요가, 성교, 도박, 음주, 어울려 다니기, 프로즌 요구르트, 베토벤, 바흐, 부처, 예수, 초월적 명상, 습관성 약물 투약, 당근 주스, 자살, 수제 양복, 제트기 여행, 뉴욕. 그러다 이 모든 게 증발하고 떨어져 나간다.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을 찾으려 한다. 그나마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나는 선택을 했다. 보드카 병을 들어 쭉 마셨다. 러시아인들은 뭘 좀 아는 사람들이다. (찰스 부코스키, <여자들>(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 252쪽)

그래서 나 역시 선택을 했다. 맥주잔을 들어 쭉 마셨다. 부코스키는 뭘 좀 아는 사람이다. 나는 몇 병째의 맥주를 땄고, 책장에 꽂힌 부코스키의 다른 책을 찾았다(이거야말로 바람직한 독서법이라고 나는 배웠다). <팩토텀>(석기용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그리고 나를 위로할 또 다른 구절을 찾았다. 나의 죄책감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성공을 향한 새벽 세시의 자유로 나를 인도할 그런 구절을.

▲ <팩토텀>(찰스 부코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 나도 좋은 사업 구상을 떠올리고, 그걸로 사업 자금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 나도 사람을 쓰고 내쫓을 수 있으리라. 나도 책상 서랍에 위스키를 보관해둘 수 있으리라. 나도 사십 인치짜리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씰룩대는 그 모습만 봐도 골목길의 신문팔이 소년이 바지 안에 싸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만한 마누라를 얻을 수 있으리라. 나는 그녀 몰래 바람을 피울 수도 있고 그녀는 알면서도 내 집에서 부유함을 누리며 살고 싶기에 모른 척하고 있으리라. 나는 내칠 만한 이유가 없는 여자들을 내칠 수도 있으리라.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게 전부다. 희망. 사람을 낙담시키는 것은 바로 희망의 결핍이다. 나는 뉴올리언스 시절을 기억했다. 그 무렵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 일주일 내내 하루에 오 센트짜리 막대사탕 두 개만 빨며 지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威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동전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0.5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모든 것이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야 사람은 더 현명해지고 동료 인간의 피를 짜내고 그를 태워 없애기 시작한다. 힘없는 남자들, 여자들, 어린이들의 부서진 육신과 삶 위에 나의 제국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내내 그들 앞에서 나의 제국을 으스댈 수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91쪽)

비록 내겐 0.5리터들이 위스키가 없지만 0.5리터들이 맥주가 있다. (꿀꺽꿀꺽) 무엇보다 내겐 희망이 있다. 책이라는 이름의 희망이!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돈을 모을 수 있고, 좋은 사업 구상을 떠올리고, 그걸로 사업 자금을 뽑아낼 수 있으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제국을 으스댈 수 있으리라! (꿀꺽꿀꺽) 하지만 너무 으스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앉은 채로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심장이 뛰었다.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짐짓 겸손한 태도로 잔을 든다. 허공을 향해 건배를 한다. 다음 잔을 위해서, 저 어디에선가 기다리고 있을 나의 미래를 위해서. (꿀꺽꿀꺽꿀꺽)

그런데 문제가 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너무 많은 술을 마신 것 같다. 이미 마감일의 아침이 밝았고, 나는 자유롭지 않은 자유기고가의 운명을 다시금 상기한다. 나는 아프고 곤경에 처했다. 굳이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머리는 더더욱 아파지기만 했다. 만약 내게 총이 있다면 차라리 머리를 쏘아버리고 싶은 정도의 두통이다. 어느덧 더러워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뮈도 말한 바 있지 않던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아니, 아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내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긋지긋한 카뮈의 얼굴을 감싸 보이지 않게 만든 후, 이미 식어버린 맥주를 들이킨다. 그리고 생각한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비록 지금은 아플지 몰라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설령 괜찮아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아프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잠시 후 기분이 좀 나아진 나는 다시금 생각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희망과 더러운 모자, 몇 권의 자기 계발서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 역시 운이 좋은 편이라고. 잠을 못자 어지러울 오후가 되면 나는 그것들을 걸치고 항상 지기만 하는 나의 LG 트윈스를 응원하기 위해 방을 나설 것이다.

*

"비꼬는 남자는 멋이 없어, 커티스"
(이상우, '비치', 계간 <문학동네> 71호 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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