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연인이 필요하니까 너를 사랑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연인이 필요하니까 너를 사랑했다!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테>

석은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왜 헤어졌는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았다. 그녀는 그에게 늘 물었다. 날 사랑하니? 반복되는 그 질문에 석은 할 말을 찾지 못하여 매번 대답을 회피했다. 결국 사랑의 믿음을 갖지 못한 그녀는 이별을 고했고, 석은 붙잡을 수 없었다. 사실 조금, 아니 상당히 피곤했다.

친구들은 거짓말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해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석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을 몰랐다. 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단지 사랑할 여자가 필요했을 뿐이었을까? 그녀는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인 사람일까? 솔직히 반드시 그녀여야 하는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한다. 난 단지 연애가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남들이 다 하니까 안 하면 바보 될 것 같아서. 그녀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으려면 뭔가 더 대단한 마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찢어지게 아픈 마음은 도대체 뭐지?

대답 없는 질문 사이를 방황하던 석,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떼>(민용태 옮김, 창비 펴냄)를 읽는다. 너무나 잘 알려진 고전인데다 수많은 일화들이 유명해졌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돈 끼호떼의 사랑 이야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얼간이 같은, 그러나 찬란하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품은 심오한 뜻을. 책장을 덮으며 석은 그녀에게 다시 연락하겠다고 결심한다. 그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지 나는 모른다.

그녀 혹은 지순한 사랑, 필요해서 창작한 나의 마스터피스

▲ <돈 끼호테 1>(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창비 펴냄). ⓒ창비
누군가 말했다. 돈 끼호떼의 사랑만큼 지고지순한 사랑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고. 많은 인물들이 둘시네아를 향한 그의 순정을 꺾어 버리려고 숱하게 유혹하거나 장난을 건다. 그가 그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들은 자못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랑이 탄생한 경위는 시시하다 못해 실소를 자아낸다. 그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랑하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대로 시골 양반 끼하다는 기사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 그대로라고 믿은 나머지 방랑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출행을 준비하면서 그는 기사소설의 모범을 따라 구색을 맞춘다. 무기를 닦고, 투구를 수선하고, 말에게 로신안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기 이름도 돈 끼호떼로 결정하자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이제 남은 일은 사랑할 귀부인을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귀부인이 없는 기사는 잎사귀도 열매도 없는 나무요, 혼 없는 육체였기 때문이다.(1권 48쪽)

이윽고 그는 이웃 마을 농사꾼 처녀 알돈사 로렌소를 생각해 내고, 그녀에게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라는 이름을 주며, 그녀를 향한 사랑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돈 끼호떼의 지순하고도 경건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기사소설의 모범대로 구색을 맞추어야 했다. 모든 기사가 사랑하는 귀부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역시 그녀를 필요로 했다. 그는 사랑할 귀부인의 자리를 먼저 설정하고 그 이후에 둘시네아를 그 자리에 앉힌다. 여기에서 일의 선후가 중요하다. '사랑할 여자'라는 자리의 요구가 사랑 그 자체보다 먼저 왔다.

돈 끼호떼의 고결한 사랑은 필요에 의해 창작된 것이었다. 방랑 기사를 모방할 필요, 귀부인을 가질 필요. 그의 사랑이 불순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상대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굴복하여 불가항력적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흔한 이야기는 많은 경우 사실과 다르다. 대체로 우리를 급박하고 애타게 만드는 것은 상대 매력의 불가항력성이 아니라 자리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희로애락을 공유할 사람, 나를 인정하고 지지해 줄 사람, 자기 전 긴 포옹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아니면 지금 내 곁의 지긋지긋한 사람을 떠날 수 있게 안전판 노릇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등등을 먼저 요구하며,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그 다음에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수배한다.

사랑의 요구는 사랑 그 자체를 제조해 낼 뿐 아니라 상대의 매력도 창작해 낸다. 사랑에 빠졌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상대가 아니라 '연인'이라는 자리, 더 정확하게는 지금 필요한 '한 두름의 미덕의 뭉치'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사랑도 돈 끼호떼의 그것처럼 찬란할 수 있다.

또한 사랑의 비밀 중 하나는 상대의 자의성 혹은 우연성이다. 애석하게도 그 자리의 주인으로 당첨된 사람은 반드시 거기에 앉아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연히 그 주변에 있었기에 나의 눈에 띄었을 뿐. 게다가 김빠지게도 많은 경우 그는 교체 가능하다. 필연적인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리이다. 그러나 우연은 운명의 다른 말이니, 하필 그 근처에 우연히 그가 있었다는 사실은 곧잘 '운명'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대는 아름다우므로 영원히 아름다우시라, 단 나의 상상 속에서

둘시네아는 돈 끼호떼의 믿음대로 아름답고 고결한 귀부인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는 우람한 몸집에 힘이 장사인데다 목소리도 우렁찬 농사꾼 처녀였다. 산초는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돈 끼호떼의 환상을 비웃는다. 그러나 돈 끼호떼는 환상 속에 살기를 자처하며 이렇게 변명한다.

내가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를 사랑하는 것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공주님만큼 그녀가 훌륭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하네, 그렇고말고. 시인들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사랑하고 칭송하는 그 귀부인들이 다들 실제로 존재하는 여인인 게 아닐세. (…) 대부분 시의 소재로 쓰기 위해 가상의 여인을 만들어 쓴 것일 뿐이야. 그 사람들이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하고, 또 사랑을 할 만한 덕과 용기를 가지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여자들인 것일세. 그래서 나는 알돈사 로렌소라는 그 알량한 여자가 어떠하든 그저 아름답고 정숙하다고 생각하고 믿으면 되는 일이야.(1권 345쪽)

알돈사 로렌소의 현실이 어떠하더라도 자기만 그녀를 아름답고 정숙하다고 믿으면 그만이란다. 헛소리로 들리는가? 헛소리가 아니다. 돈 끼호떼의 광기는 사랑의 비밀 중 하나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사랑은 현실보다는 상상 혹은 환상 속에 존재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환상 속에서 상대를 멋대로 완벽한 사람으로 상상하거나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기에게 칼날을 겨눈 사람으로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근거 없이 희망에 부풀기도 하고 이유 없이 의심하고 질투하며 불행에 젖기도 한다.

대체로 사랑은 고독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상대의 현실이 날 것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기란 대단히 어렵다. 상대의 현실은 '나'라는 프리즘을 거쳐서 전달되므로,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여 그려낸 영상으로 각인될 뿐이다. 상대의 현실은 내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나 다름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영원히 네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현실은 영원히 내가 상상한 현실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 사랑이 이렇게 자폐적인 사건에 불과할진대, 자기가 믿는 대로 상대의 현실을 규정하는 돈 끼호떼의 광기가 과연 광기인가. 행복한 환상을 믿거나 의심을 믿거나, 양자 모두 나에게는 현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 끼호떼의 그것처럼 무조건적인 신앙이라도 거짓은 아니지 않을까.

또한 돈 끼호떼는 둘시네아가 훌륭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진짜로 그녀가 훌륭한지 아닌지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어떻게 훌륭한지 그 세목을 거론하지도 못한다. 그의 말은 이렇게도 번역된다. 둘시네아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 다시 말해, 나는 둘시네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롤랑 바르트도 잘 지적했듯, 사랑에 관한 담론은 동어반복의 세계이다.(<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38쪽 참조) '그를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영원한 우문(愚問)이다. 대체로 그에 대한 답은 이렇다. 그가 그이기 때문에. 또는 내가 그를 사랑하니까. 즉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녀가 아름다운 이유는 내가 그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믿는 이유는 내가 그녀를 믿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담요는 모든 합리성의 규율 혹은 인과의 법칙을 뒤덮어버린다. 그 아래서 근거와 이유를 대라는 명석한 요구는 자취를 감춘다.

모방, 연인이 밟는 여로

돈 끼호떼는 그날 밤 내내 잠을 안 자고 기사소설에서 읽은 대로 마음의 주인인 둘시네아 공주를 생각하며 지새웠다. 책에는 기사가 숲이나 황량한 벌판에서 밤을 보낼 때는 몇 날이고 잠을 안 자고 기사의 귀부인을 사모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권 110쪽)

고된 방랑길에서 산초는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며 나무에 기대어 잠도 잔다. 하지만 돈 끼호떼는 그렇게 마음 편하게 먹고 마시고 잘 수 없다. 기사소설의 모범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귀부인을 생각하며 몇 날이고 잠을 안 잔다는 방랑기사의 모범을 모방하여 돈 끼호떼는 일부러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그는 방랑기사의 모범뿐만 아니라 길에서 만난 그럴싸한 연인의 행각은 모두 모방한다. 가령 수많은 남자들을 가슴 아프게 한 마르셀라의 이야기를 들은 밤에는 어김없이, "남은 밤을 마르셀라를 사랑하는 이들을 흉내내 사랑하는 둘시네아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새"(1권 153쪽)운다.

또한 "지난 세기의 방랑기사들은 모두가 거의 위대한 시인이었고 음악인이었"으며 이 두 가지 매력이 "사랑에 빠진 방랑기사들의 필수요건"(1권 304면)이라고 믿기에 그는 틈만 나면 둘시네아를 기리는 소네트를 짓고 노래 부른다.

사랑은 학습된다. 연인은 모방이라는 길을 밟으며 사랑이라는 여행을 떠난다. 사랑을 시작하는 청년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대로 사랑을 연출해 가기를 무의식적으로 소망한다. 연애에 관한 그의 청사진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배운 것이다. 또한 그가 상대에게 품는 소망 역시 모방된 것이다. 이른바 이상형조차도 학습과 모방의 산물이다.

우리의 소망과 꿈은 사랑이라는 아주 은밀한 공간에서조차도, 기원 텍스트를 가진다. 소망과 꿈에서 '모방된 것'이라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남은 고유한 것과 독자적인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랑하는 사람은 소망과 꿈뿐만 아니라 고뇌도 모방한다. 돈 끼호떼는 소설 속 기사들이 사랑의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나무를 쥐어뜯고 짐승들을 쳐 죽이고 집들을 무너뜨리는 광란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능한 한 대충 그 행각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보이는 행동들을 따라 할 것"(1권 334면)을 결심한다. "난 미친 사람이고, 또 미친 사람이어야 해"(1권 334면)라는 당위는 돈 끼호떼의 앞길을 인도하는 이정표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산자락, 아름다운 초원을 만나자 때를 놓치지 않고 하늘에 하소연한다. "여기 한 연인이 기나긴 그리움과 상상 속의 질투를 이기지 못해 이 거친 초야에 통곡을 하러 왔으니 모든 인간의 아름다움의 극치인, 저 예쁘고 무정한 여인의 가혹함을 내 하소연하려 하노라!"(1권 337면) 미쳐야 한다는 당위를 만든 것도, 고통에 찬 하소연을 하게 만든 것도 방랑기사의 전범을 따라야 한다는 모방 욕구이다.

젊은이들은 종종 사랑 때문에 방황하고 열병을 앓아야 한다는 당위를 느낀다. 공연히 술을 마시고 울고 술병을 깬다. 젊은이의 객기라고 통칭되는 각종 미친 짓들의 기원에는 모방 욕구, 혹은 전범을 따라야 한다는 당위가 있다. 모방의 기원 텍스트는 그가 감명 깊게 읽거나 본 소설이나 영화일 수도 있고, 선배들의 전설일 수도 있다.

젊은이는 일부러 불가능한 상대를 설정하고 보답 받지 못할 사랑에서 오는 고통을 즐긴다. 아니면 연애하는 와중에서도 온갖 불행한 상상을 하며 자신을 괴롭힌다. 이런 고통은 자주, 자발적으로 가공된 것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왜 고통을 가공하는가. 모방하고 싶고, 모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인은 사랑의 감정뿐만 아니라 그 언어 혹은 담론도 모방한다. 사랑의 고통은 막연한 감정적 분위기로 사람을 병들게도 하지만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를 띠고 고문하기도 한다. 가령 연애 시작 전; 그는 나에게 관심이 있을까, 아닐까? 연애 중; 그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걸까, 아닐까? 그는 나의 이런 말과 행동에 싫증을 느꼈을까, 아닐까? 그는 나보다 그의 예전 애인을 사랑하는 걸까, 아닐까? 등등. 이렇게 혼자 갑론을박하며 말들의 싸움을 감내하다 지친 사람은 상담자를 애타게 찾아 헤맨다.

사랑은 감정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번뇌의 말들을 용병으로 거느린다. 구체적으로 언어화된 고민의 목록은 사랑의 번뇌에 관한 한 담론을 만든다. 이 담론은 신기하게도 시공을 통틀어 보편적으로 공유된다. 번뇌의 담론 역시 유구한 모방의 역사를 가지는 셈이다. 선행자의 번뇌 담론을 모방하는 일이 반복되었기에 공유와 보편이 가능했을 터이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소망과 고통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번뇌의 말들, 그 담론의 질서까지 모방한다. 어쩌면 사랑은 사랑의 관습에 참여하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소망하네, 정념의 관객과 전달자를

돈 끼호떼는 방랑기사를 모방하느라 광란한 척 연기하면서 산초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 그대, 이 기사의 하인이여, 내 행운과 불행의 착한 동반자여, 내가 여기서 하려는 행동을 잘 보고 꼭 기억하여 이 모든 것의 원인과 사연을 그 사람에게 읊어주고 이야기해줄지어다!(1권 338면)

사랑에 빠진 자는 매사에 상대의 시선을 의식한다. 더 나아가 자기의 모든 것이 상대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상대 때문에 황홀하고 고통스러운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는 홀로된 곳에서 은밀하게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그 은밀함 중에서도 사랑하는 자는 관객을 바란다. 관객이 바로 그 상대라면 가장 좋다. 아니라면, 관객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상대에게 전달해 주기를 소망한다. 입이 없는 제3의 관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사랑하는 자는 홀로 있을 때조차 제 딴에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연기한다. 그를 위하는 가상한 마음을 가장 지순하게 가꾸고, 고통조차도 미학적으로 찬란하게 변조하거나 장식하며, 그의 감탄을 사리라 짐작되는 행동을 골라서 한다. 이때 그는 자기 모습에 은밀하게 도취하며 상대도 그런 자신에게 매혹되기를 바란다. 나르시시즘과 인정 소망이 교묘하게 뒤얽힌다.

반대로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번뇌를 느끼는, 혹은 고통을 연출하는 사람 역시 그것을 상대가 알아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상대가 나를 긍휼히 여기기를,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듯이 나를 가여워 하기를. 그러니 관객 혹은 전달자를 바랄 수밖에.

사랑에 빠진 자는, 특히 은밀하게 홀로 빠진 자는 자기 감정이 탄로날까봐 두려워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매장될까봐 더욱 공포스러워 한다. 그래서 그는 긴긴 연애편지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혹은 상대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을 의식하고 지인에게 고뇌를 토로한다.

돈 끼호떼는 광란을 연기하는 도중 산초에게 사흘 안에 둘시네아를 찾아 떠나라고 말한다. "그동안 내가 그녀를 위해 여기서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녀에게 그대로 전해주어야 하니까."(1권 339쪽) 전해줄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서 그는 옷을 찢어발기고 무기를 내팽개치고 바위에 머리통을 박치기하려고 한다.(산초는 말렸고 결국 돈 끼호떼는 팬티 바람으로 공중에 발길질하며 두 번 뛰어오르다 두 번 자빠지고 머리를 땅에 박는 기행에 만족하기로 한다. 사실 이 대목은 소설에서 가장 우스운 장면 중 하나이다.)

산초를 보낸 후 돈 끼호떼는 모방 행각을 계속한다. 아마디스 기사를 모방하여, 둘시네아를 기리며 기도를 수천 번 올린다. 그런데 이때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습을 구경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방법을 바꾼다. 둘시네아를 칭송하거나 사랑의 고통을 슬퍼하면서 나무껍질이나 모래 위에 시구(詩句)를 새긴다.

시(詩)는 후일의 관객을 의식하면서 정념을 전시하는 수단이다. 돈 끼호떼는 현재의 관객을 가지지 못했기에 미래의 관객이라도 소망하는 것이다. 구경꾼을 모시지 못한 정념은 절름발이이다.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고, "모든 정념은 결국에 가서는 그 관객을 가지게 마련이다."(<사랑의 단상>, 65쪽) 시는 고독한 정념이 관객을 부르는 간절한 외침이며, 지금 여기에 없는 관객을 소망하는 정념의 고육지책이다.

*사족: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런데 이 난삽한 독후감이 서두의 석의 사연과 무슨 관계가 있죠? 석이 왜 헤어진 그녀를 다시 만나려고 생각했나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짐작할 뿐. 아마도 그는 필요해서 사랑을 창작했더라도, 반드시 그녀여야 하는 이유가 없었더라도, 각종 모방 욕구에 휘둘렸더라도, 제 마음이 아프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증류수가 아니다. 기타 불순한 것들과 뒤죽박죽 섞인 혼합물 그대로가 사랑이라고 긍정하지 않았을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