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편집자에 따르면, <욕망해도 괜찮아>(창비 펴냄)의 서평은 애초 내가 아닌 다른 몇 분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하지만 청탁이 가자 대개가 '그렇게 착한 분의 책을 비판적으로 읽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하고 고사했다고, 그래서 내게 차례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매체와 필자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이야기를 굳이 지면에 옮긴 이유는 바로 그것이 이 책 <욕망해도 괜찮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반성하고, 그렇게 얻은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조곤조곤 전달하는 저자 김두식의 새 책은, 착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책과 저자의 '착함'은 저자가 문제 삼고 있는 주제의식보다 더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 <욕망해도 괜찮아>(김두식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이러한 배경 설명이 없어도 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욕망과 원칙, 도덕, 율법 등의 대립에서 욕망의 편을 들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솔하게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커밍아웃한 게이이면서 공화당 지지자인 피터 고메즈 목사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자신은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알기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224쪽)는 이야기 등이 그에게, 영혼 아래 깔려있던 육체와 자기의식과의 관계를 되묻게 한다. 하여 그는 조심스럽게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을 넘어, "한명의 남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 한명의 여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225쪽)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색'과 '계'의 대립이 이토록 명백한 경우, 다시 말해 구체적인 인간의 욕망이 도덕적, 종교적 원칙 혹은 사회적 통념과 대립하는 경우, 김두식은 그것을 한없이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자 한다. 40대에 진입했거나 넘어선 성공한 아저씨들이 젊은 여성과의 육체적인 관계를 갈구하는 것은, 어렸을 때 사랑하고 싶었던 소년들이 눈을 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정아와 변양균 사이에 오고간 그 수많은 밀어들을 곱씹으며 김두식은 말한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았을 때 똥아저씨(편집자 : 신정아가 부르던 변양균의 애칭)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중년 남성이 얼마나 될지 묻고 싶을 뿐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돌을 던질 자격이 없습니다." (75쪽)
성경의 기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 앞에서 성경을 읽는 목사의 기준에 맞춰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억압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는, 자신이 아무리 일탈하려 애쓴다 한들 '성벽 안'에서 '성벽 밖'을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주로 육체로부터 비롯되는) 욕망과 매 순간 직면하고 타협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므로 김두식은 자신에게, 또 독자에게 말한다. '욕망해도 괜찮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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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인간의 욕망이 온전히 섹스에 대한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성적 쾌감 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욕망한다.
어떤 부자가 이른바 '트로피 와이프'와 결혼한다고 치자. 물론 젊고 새로운 아내는 기존의 파트너에 비해 더 나은 성생활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본인의 재력을 과시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의 부인을 부러워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것 역시, 어쩌면 섹스 그 자체보다 더 큰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욕망의 문제로 넘어갈 때, 김두식은 결코 태연하지 못하다. 검사 출신 로스쿨 교수이며 국내에서 손꼽히는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집필실에 앉아 책을 쓰고 있으면서도, 어린 시절 "중산층의 끝자락"에서 느꼈던 '계층 차이'에 대한 콤플렉스를 너무도 솔직하게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그는 굳이 손창섭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신의 희작'에 대한 이야기에 한 꼭지를 할애한다. 손창섭이 자신의 개인적 일대기와 가족사를 기술했다고 알려진 그 소설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일본에 살고 있던 손창섭의 부인 우에노 치즈코 여사는 말한다. 작가 자신을 포함해 실존 인물의 이름이 들어가지만 내용물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김두식은 그 이야기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이 기술하는 본인의 가족사 역시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는 포석을 깐다.
김두식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평생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평교사로 일하며 국민윤리를 가르쳤다. 해방 직후 경성사범학교,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한 남매 중 일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대단한 엘리트 집안인 셈이다. 그런 어머니는 1960~70년대 한국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유통되던, "당시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연세대 김형석, 숭실대 안병욱 교수 같은 분"들이 "기독교와 유교의 전통적 가치를 잘 포장해서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지 설파"(148쪽)한 것과 같은 그런 내용을 삶의 신조로 삼았다.
하여 흔히 '투기'라 부르는 고성장 시대의 자산 가치 상승에 편승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고, "누나와 형의 어린 시절에 아예 숫자와 돈을 가르치지 않"(149쪽)을 정도로 엄격하였다고 김두식은 회고한다. 물론 지적이고 엄격한 집안 분위기 탓에, 사법 시험 합격 후 현재 법대 교수인 김두식처럼, 그의 형도 이른 나이에 미국 유학 후 박사 학위를 따고 현재 모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진다.
외형으로만 보면 우리 형제는 친구들보다 훨씬 나은 형편입니다. 100퍼센트 장학금으로 스물일곱 살에 미국에서 박사를 딴 후 서른한 살에 교수가 된 형이나 스물네 살에 사법 시험에 합격한 저나 중산층의 꿈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억세게 운도 좋았기 때문에 불평할 건더기라곤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이런 '사'자 가족의 '사자 가죽'이 들통 나는 날이 찾아옵니다. (158쪽)
김두식의 어머니가 암 진단과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만약 어머니가 1인실 병실에 한 달간 입원하면 치료비 포함 총 1000만 원가량 나오고, 형과 김두식의 월급을 다 합쳐도 그런 액수는 감당할 수 없다. 다행히도 6인실이 빨리 비어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학교를 나오고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는 친구들 중에는 그런 고민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 이르러 김두식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일찍이 투기에 참여하지 않은 대다수의 한국 중산층,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강남뿐 아니라 어디에도 내 집 마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158쪽)닌데, "어머니로 상징되는 중산층은 규범을 만들고 바꿀 의지도 힘도 없으면서 규범의 화신처럼 살아온 사람들"(156쪽)이기에, "기독교 쪽에서 어머니가 이끌던 모임의 구성원 다수는 그 유명한 S교회의 권사님들이었"고 "대부분 그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유명한 아파트에 살고 계셨"(160쪽)다는 현실 앞에서, 김두식은 속된 말로 '멘붕'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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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김두식이 말한 '사자 가죽'이 무엇인지 설명해보자.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이 쓴 엽편 소설의 제목이다. 간단히 말해,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당나귀가 주제를 모르고 설치다가 흠씬 얻어맞고 쫓겨난다는 내용이다. 김두식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바로 이렇게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1인실 사건'을 통해 당나귀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하여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당나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결국 욕망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164쪽)
그렇다면, 그 '욕망의 인정'은 어떤 실천적 해법으로 귀결될까? 사실 '진짜 정답'은 김두식이 아니라 책에서 언급된 그의 부인이 말하고 있다. 2012년 현재의 부동산 상황을 볼 때 빚을 내서 강남으로 들어가는 것은 '미친 짓'일 테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발품 팔고 안면몰수해가며 '좋은 투자처'를 알아보고 다니는 것, 즉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의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 당장이라도 빚을 지면 강남의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재력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들이 '투자'라 부르는 것을 '투기'라 일컫는 어머니의 가치관이 그를 지배하고 있고, 또한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자부심도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검토한 '중산층의 은밀한 욕망 : '사(士)'자 가족 vs. '사자 가죽'(Lion's Skin)' 외에도, 성북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다음 장 '색의 인간, 계의 인간 : 성북동과 형'에도 같은 갈등의 구조가 끝없이 등장한다. 꾸준히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강변하고, 자신의 집이 "이래저래 그곳은 전형적인 중산층의 '끝자락'"(178쪽)이었다고 회고하는 모습에서, 어떤 강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끝없이 강조하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계'가 자신을 지금도 지배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김두식은 (김두식이 아닌 우리 사회의 진짜) '중산층'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재산 증식의 경로를 택하고자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엉뚱한 길을 택한다.
"이 일을 겪으면서 어머니로 상징되는 자존심 있는 중산층 문화가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개혁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너무 개인의 규범만을 강조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163쪽)다는 고백은, '그러니까 저는 더 이상 착한 척 그만 하고 부동산을 쑤시고 다니며 돈 굴릴 구석을 찾겠습니다'가 아니라,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규범의 화신 노릇하던 것을 빨리 그만두고 다른 당나귀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164쪽)라는, 일종의 연대 투쟁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자와 맞서 싸우는 대신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자의 규범을 다른 당나귀들에게 강요하는, "'사자 가죽을 쓴 논객 당나귀"(164쪽)에 대한 비판을 던져놓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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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사태를 좀 더 명료하게 인식해보도록 하자. 그의 어머니는 결코 '중산층'이 아니었다.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소득 중위로 보느냐, 자산 중심으로 보느냐, 혹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의식에 따라 분류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누어지지만, 일본의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1950년대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교에 남매가 모두 입학하는 집안이 '중산층'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그의 어머니는 본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다.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자산 증식 과정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한 경제적 몰락 혹은 본전치기가 그의 어머니를 중산층으로 만들어준다고 볼 수는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새로운 가치에 적응하지 않은 채 도도하게 몰락해가는 남부의 귀공자 애슐리 윌크스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김두식의 어머니가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아들의 책을 나누어주는 것은 결코 '은근한 자식 자랑'이 아니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가 되었으면서도 사자들 앞에서 짐짓 위세를 부리기 위한 애처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반대로 인식하고 있다.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없이 선하게 살고 있는 자신의 둘째 아들, 그 아들의 책을 나눠줄 때, 어머니는 위선적인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죽비를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머니 당신은 그렇게까지 의식하고 있지는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아파트 사고 땅 투기해서 돈 모은 너희들과 달리, 내 아들은 나의 반듯한 삶을 보고 너무도 훌륭하게 자라났고, 그리하여 그 말 많고 예수 안 믿는 진보주의자들 틈에서도 꿋꿋하다고, 어머니의 손에서 친구들로 건네진 책들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전형적인 몰락 귀족의 '에고 트립'이다. 이른바 상징 자본 및 도덕적 우위를 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카메라 상가 앞에서 라이카 카메라를 바라보던 그는, 문득 "삼선교에 있던 '아카데미과학' 유리창 안의 장난감을 넋 놓고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87쪽)과 자신의 현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의 "중산층의 빠듯한 살림"(87쪽) 때문에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는 아내의 허락을 얻어 그 소년의 해묵은 한을 달랜다.
어려서 만족하지 못했던 소년들은 40대가 넘어 사회적 성공을 통해 안정을 찾게 되면 못다 핀 꽃을 피워낸다. 신정아의 애인이었던 '똥아저씨'나 '덩 여인'에게 휘둘린 '허 영사' 등은 그것을 중년의 섹스로 풀어냈다. 아카데미과학 프라모델을 가지고 싶었던 소년 김두식은 그 욕망의 대리 충족물로 라이카 카메라를 발견했지만, 그런 식으로 해소된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닐 것이고, 그리하여 한 권의 책에서 수십 번도 넘도록 '나는 중산층입니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가치관을 아주 제대로 이어받았고, 그래서 무리하면 강남이라는 성채에 진입할 수도 있지만 부러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과 수많은 '계'의 노예들을 위한 책을 쓰고, 그 속에서 끝없이 '나는 중산층의 자식이었기에'라며 여운을 남긴다. 저자는 결코 그러한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이 책에는 '엄마가 눈 딱 감고 강남에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보다 더 잘 사는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껴야 했다'라는 일종의 원념이 바탕에 깔려 있다.
'나는 왜 라이카 카메라를 욕망할까?'가 아니라, '엄마는 왜 강남의 아파트를 욕망하지 않았을까?'가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저자의 무의식이 보여주는 진짜 질문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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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사회, 혹은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의 자녀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어릴 적에는 자기 집보다 더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 싶어 한다. 어린 시절의 김두식이 느꼈지만 끝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한 그 욕망은, 사실 사춘기 소년의 성욕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욕망, 즉 소유욕이나 권력욕 등에 대해서도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도닥여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도 괜찮은 걸까? '동성애자인 너의 파트너의 육체를 욕망해도 괜찮아'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네 아버지가 네 명의로 사놓은 신도시 개발 택지 구역을 욕망해도 괜찮아'는 과연 같은 수준의 의미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마이클 샌델 식으로 대답해보자. 자유주의적 정의관에 따르면, 자유로운 두 명 이상의 성인이 합의 하에 섹스를 하는 한 전자는 괜찮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러한 투기 행태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곤란하다. 공리주의적 정의관으로 생각해보면, 동성애자가 섹스를 하는 것은 쾌락을 증진시키면 증진시켰지 저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도시 투기는 좀 더 면밀한 사회 편익의 계산 후에 따져보게 될 것이다.
문제는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이다.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은 공동체의 가치 기준이 곧 정의의 표준이 된다는 것인데, 만약 그 공동체가 김두식의 어머니께서 권사로 계시는 곳 같은 '강남 대형 교회'라면, 우리는 정반대의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공동체의 가치 기준인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안 되지만, 땅을 사서 돈을 버는 것은 공동체에서 널리 인정되는 투자 기법일 뿐이므로 용인된다(좋은 투자 정보를 나와 공유하지 않는 것은 나쁜 행위일 수도 있다).
욕망은 각자의 변수와 상수를 지니고 꿈틀거리는 n차 방정식이다. 세상에 그냥 괜찮은 욕망은 없고, 그냥 안 되는 욕망도 없다. 어떤 욕망은 긍정적이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욕망 위에서 비로소 버티고 서있는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문화방송(MBC) 사장 김재철과 무용가 J씨의 관계를 살펴보자. 그것은 김두식이 말한 '늙은 소년'의 로맨스이지만, MBC 노동조합의 폭로에 따르면, 수십억 원 규모의 비리 사건이다. 김재철은 순수한 소년의 욕망을 뒤늦게 꽃피운 것일지도 모르고, 무용가 J씨가 김재철과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후자는 전자의 법인 카드와 방송사 예산 책정 능력도 깊이 사랑했고, 소년은 소녀에게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모든 욕망이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모든 욕망과 그 욕망들의 관계 역시 전적으로 순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두식이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단순한 제목의 책을 써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앞서 우리가 사고실험을 해본 바로 그런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을 지닌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돈은 욕망해도 괜찮지만 섹스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아니 그런 가치관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이 책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외치고 있다. 아니, 당신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게 욕망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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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두식이라는 한 독실한 개신교 신자의 내밀한 자기고백의 기록이다. 게다가 이 서평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착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 내놓는 자기고백의 기록인 탓에, 이 책은 독특한 울림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
일단 좋은 점부터 이야기해보자. 비록 '엄마가 미리 땅을 사뒀더라면!' 같은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고, 그것을 노골적인 은폐라고 나는 해석하였지만, 한국어로 쓰인 책 중 이 수준까지 자기 자신을 밀어붙인 고백록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심지어 출판사 편집자들이 내놓은 코멘트마저도 자기비판과 성찰의 단서로 삼는다.
제가 말한 공정성도 어디까지나 공부 잘한 아이들을 위한 공정성이었을 뿐입니다. 편집팀의 조언대로, 그렇지 못한 중산층이나 산동네 친구들의 성장담을 넣으려 해도 막상 기억나는 친구가 없습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을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점에서는 저나 부자동네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단 거죠. (196쪽)
전후 맥락을 좀 더 설명해보자. 저자는 성북구의 중산층 끝자락에 사는 자신에게 세상이 완벽하게 공정한 곳은 아니었다고, 으리으리한 양옥집 속에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사는 귀공자와 귀공녀의 세계에 한 발 들여놓고 큰 소외감을 느꼈노라고, 거기에 끼지 못한 자신의 친구들은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대기업 사원이 된 후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출판사의 편집자가 한 마디 촌평을 날린 것이다.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 친구들은 어디 있냐고 말이다.
그 질문을 듣고 김두식은 얼굴을 붉히며 반성한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는 자신의 한계 앞에서 솔직하게 부끄러워하고 개선해나가고자 노력한다. 동시에 그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 저자는 그 모든 '문제'들을 오로지 '내 영혼의 문제'로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두식이 더 가난하고 공부 잘 못했던 친구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는데 성공한 당나귀와 '사자들'로 세상을 나누어서 보는 것은, 그가 자기 성찰을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이 책에서 강박적으로 말하는 "평범한 중산층"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로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한국 사회의 표준적 화법 속에서 "평범한 중산층"이란, 수도권의 4년제 대학 졸업 후 약간의 난관을 겪은 끝에 대기업 혹은 그에 준하는 직장을 얻었지만, 단지 강남 아파트 혹은 그와 비견할 만한 자산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요즘은 강남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달랑 집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며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일에 거리낌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들은 결코 평범하지도 않고 사회의 중간층을 구성하고 있지도 않다. 소득과 교육 수준 등을 골고루 따져보면, 대한민국 상위 10퍼센트에는 당연히 속할 수밖에 없고, 사실 그보다 더 높은 사회 계층을 구성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것이 '평범'하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너무도 많은 이들을 '서민'이라는 경계적 범주로 몰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 , 계층적, 담론적 차원에서 논의해볼 만한 문제이다.
하지만 김두식과 같이 '양심적'인 중산층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선을 안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돌린다. 왜 나의 눈에는 내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지, 그것을 타인의 시선에서 검토하지 않고, 다만 '나의 삶을 함부로 평범하다고 말한 나는 나빠'라고 성급한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유를 알기 전에 반성하고, 원인을 해결하기 전에 회개한다. 이 책은 그러한 중산층-지식인-개신교 신자의 의식 구조에서 결코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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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멘토가 너무 많아 숨쉬기 힘든 요즘"(7쪽)을 한탄하며, "40대 중반에 이른 저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람"(7쪽)이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솔한 고백이다.
하지만 과연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 김두식을 '멘토'로 인식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특히 젊은 남성 개신교 신자라면, 이 책에서 등장하는 구체적인 사례와 그에 따른 내면의 변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나도 이렇게 솔직하게 반성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책은 '기독교 신자의 고백록'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고, 그 속에서 김두식은 그 누구보다 더 크고 강력한 멘토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 멘토에게서 배울 점과 배우지 말아야 할 점을 이제 모두 알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욕망에 최대한 접근하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그 욕망을 오직 '반성의 대상'으로만 삼을 뿐, 욕망끼리의 함수 관계나 욕망의 사회적 형성 과정에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동시에 욕망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도 이 책은 아무런 답변을 해줄 수 없다.
<욕망해도 괜찮아>는 나의 욕망을 억누르는 죄를 지었던 나를 반성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물이다. 방금 표현된 바와 같이, 애초에 죄와 욕망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이상, 아무리 애를 쓴다 한들 그 속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기독교적인 고백록의 맥락 속에서 모든 것은 신과 나의 대화이고, 결국은 그 말씀을 어떻게 올바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로 모든 문제가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몇몇 '타인'들이 제거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저자 김두식이 뼈아프게 말한 것처럼, 그는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던 친구들은 아예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렸고, 내밀한 자기반성의 과정에서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들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조차 '자기반성'의 소재일 뿐, 그로부터 어떤 사회적 인식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어머니의 아들을 납치한 범인은 혼자 하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용서까지 받고 돌아온다. 절대자로서의 신과 그 신 앞에서의 고백과 끝내 거부할 수 없는 용서와 모든 것을 품어주는 예수의 사랑이 주제가 되는 한, 반성의 과정에서 되레 '이웃'이 지워지는 이 문제는 장르에 내재한 것으로, 결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솔직하게 살자'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감히 요약한다면, 이 책을 읽고 그 내용에 공감하게 되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더 솔직해질 때에도 어떻게 우리는 서로 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 헌법의 전문가인 김두식이, 또 한 번의 사색 끝에 그 문제에 대해서도 대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면, 독자들로서는 그저 고마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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