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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그녀의 착각 "내 남자는 옛 애인을 못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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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그녀의 착각 "내 남자는 옛 애인을 못 잊어!"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밀란 쿤데라의 '히치하이킹 놀이'

모든 행복 뒤에는 의혹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107쪽)

경은 스무 살 때 첫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소원은 오직 하나. 남자 친구가 자신에게 완전히 매혹되는 것. 그녀는 그를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은 그녀의 화두가 되었다.

남자 친구의 이상형을 찾기 위해, 그녀는 그의 옛 사랑에 관해 캐묻기 시작했다. 특히 옛 애인의 캐릭터에 유별나게 집요한 관심을 기울였다. 남자는 옛 애인이 오래 전 영화 <베티 블루>의 주인공 같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히스테릭하고 충동적이며 폭발적인 감성의 소유자인데다가 결국 미쳐 버린 베티.

경은 차분하고 평범한 자기 성격이 베티와 정반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 성격이 매력 없고, 베티의 성격은 매혹적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사로잡히며, 나락과도 같은 열등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베티를 흉내 내고자 노력했다. 충동적이고 광기 있어 보이려고 연기했다.

그녀는 영화 <베티 블루>를 보고 또 보았다. 베티를 남자 친구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그 사람인 양 상상하고, 뼈아프게 질투했다. 또 아무리 연기해도 베티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치명적인 좌절에 빠져들었다. (실상 남자 친구는 옛 애인을 극진하게 사랑하지도 않았고, 옛 애인이 베티를 닮았다는 것도 사실과는 다른 남자 친구의 환상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당시 경은 알지 못했다.)

문득 그녀는 자문한다. 내 자신은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혹시 내가 미친 게 아닐까? 그러던 경, 밀란 쿤데라의 <사랑>(김재혁 옮김, 예문 펴냄, 1997년)에 실린 단편 '히치하이킹 놀이'를 읽는다. 읽고 난 후 경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자기가 미친 게 아니라고 안심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히치하이킹 놀이'는 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난 연인들이 하루 동안 겪는 이야기이다. 운전 중 두 사람은 우연히 히치하이킹 게임에 빠져든다. 게임 중 두 사람의 미묘한 심리가 뒤엉키는 양상이 무척 흥미진진하다.

스물여덟 살 남자는 여자들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해 봤다고 믿고 있다. 그는 지금 애인의 되바라지지 않은 순수함을 좋아하며, 특히 그녀가 부끄럼타는 모습을 사랑한다.

그러나 여자는 수줍음을 잘 타는 자기가 싫다. 그녀는 자기 성격에 열등감을 느끼고 자기와 정반대 성격을 무턱대고 질투한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여자들, 가볍고 음탕하고 자유분방한 여자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경험이 많기에 이런 여자 유형을 잘 아는 남자가 어느 날 자기를 떠날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녀의 마음은 이렇다.

그 사람은 완전히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그에게 속하기를 그녀는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노력하는 만큼, 그녀가 그에게 주기를 거부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즉, 깊은 사랑이 아닌, 표피적인 연애가 제공해 줄 수 있는 바로 그것을 그녀가 그에게 주지 않으려는 것 같은 생각이 그녀에게 들었다. 그녀는 그녀의 진지함을 벗어나서 좀 가벼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07~108쪽)

사랑에 빠진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의식한다. 대개 자기의 부족함을 더 많이 인식한다. 상대가 어떤 이성상을 좋아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에게 가장 중대한 화두가 된다. 서두의 경처럼, 그는 그것을 알아내려고 상대에게 캐묻기는 물론, 유도 심문을 하기도 하고, 주변에 수소문까지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상대가 좋아하는 이성상을 대개 제멋대로 규정해 버린다. 이때 상대의 과거 연인들이 이른바 상대의 '이상형'으로 설정되기 쉽다. 그리고 소위 '이상형'과 자신을 줄기차게 비교하고 서로 다른 점을 끈기 있게 찾아내며 열등감에 빠진다. 특히 '이상형'이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다고 상상할 때, 그의 열등감은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열등감은 질투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열등감과 질투 중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열등감을 느끼는 이는 때때로 괴로운 공상, 즉 상상 속 질투에 빠져든다. 질투는 과거와 미래 모두를 향한다.

과거를 질투하는 이는 되뇐다. 그는 나보다 과거의 연인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미래도 질투하며 되뇐다. 언제라도 과거의 연인('이상형'임에 분명한)과 닮은 이가 나타나면 그는 나를 버리고 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자유분방한 여자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즉흥적 연애의 짜릿함을 애인에게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열등감을 느낀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여자들이 유혹하면 애인이 자신을 떠날 것이라고 불안에 떤다.

열등감과 질투의 다음 단계는 연기(演技)이다. 상대의 이상형에 대해 연구를 마친 이는 이상형과 닮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최대한 이상형을 닮아가려고 연기하게 된다. 닮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닮아야 하는 그 사람, 즉 상대의 과거 연인은 '나'의 이상형이 되어 버린다.

이러다가 사랑하는 이의 과거 연인에게 '내'가 다시 사랑에 빠지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난다. 한 남자의 과거와 현재의 연인들끼리 레즈비언 커플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묘해 보이지만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존재'라는 르네 지라르의 유명한 명제를 떠올린다면.

'나'의 욕망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나'는 타인이 욕망하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그것을 욕망하게 마련이다. 가령 다른 사람들이 명문 대학에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도 명문대에 가고 싶다. 또 이런 남자의 심리도 있다고 한다.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울 때에만 그녀를 사랑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무관심한 남자의 경우. 그는 타인이 자기 연인을 욕망할 때에만 그녀를 강렬하게 욕망한다. 타인의 욕망이 사라질 때 자기 욕망도 사라진다.

어쨌든 이러한 심리 기제로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은 연기한다.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았던 가볍고 자유분방하고 음탕한 여자의 역할을. 주유소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차에 올라탈 때 여자는 우연히 히치하이커인 양 연기한다. 남자가 맞장구를 쳐주자 애초에 장난삼아 시작한 게임은 점점 진지한 것이 되어 버린다.

여자는 히치하이커의 역할에 점입가경으로 빠져든다. 히치하이커의 가면 아래에서, 그녀는 마음껏 '오랫동안 꿈꿔왔던 바로 그 여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드디어 진지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가볍고 뻔뻔스럽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애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흡족해한다. "애인을 이런 식으로 완전히 사로잡아 삼켜버릴 수 있다"(119쪽)고까지 느끼면서, 여자의 만족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때 여자의 만족감을 부풀리는 것은 또한 질투이다. 게임 초반에 남자는 히치하이커를 연기하는 여자에게 다정히 대하고 유혹하는 듯 군다. 실제로 남자는 히치하이커로 연상되는 음란한 스타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본래 여자 친구 자체가 사랑스러워서 그런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생각한다. 애인이 항상 이런 식으로 낯선 여자를 유혹할 것이라고. 애인이 즉흥적 연애를 기대할 수 있는 자유분방한 여자를 더 좋아할 것이라는, 줄곧 그녀를 괴롭혀 오던 의심이 결국 사실임이 밝혀졌다고. 그리하여 여자는 애인을 "현장에서 체포한 것 같"(111쪽)고, "묘한 술책을 써서 그의 내심을 알아낸 것 같"(111쪽)다고 느끼면서 질투심을 부풀린다.

이 질투심 때문에, 여자는 '상상 속 애인의 이상형'인 자유분방하고 음란한 여자의 역할을 더욱 기를 쓰고 연기하며, 완전하게 연기했다고 생각했을 때 기묘한 만족감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새로이, 그가 일 관계로 여행 중에 있을 때-마치 지금의 그녀처럼-다른 여자들이 차 속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러한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결코 아프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 자신이 그러한 낯선 여자가, 아무런 책임도 없는 이름 모를 속된 여자가, 그녀가 그토록 시기했던 여자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모든 여자들을 물리친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여자들이 무기를 사용하는 법, 그녀가 지금까지 청년에게 줄 줄 몰랐던 것, 즉 가벼움, 뻔뻔스러움, 그리고 자유분방함 등을 선사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만족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118~119쪽)

그러나 대개 남녀관계에서 그렇듯 이 모든 것은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여자의 열등감과 질투와 만족감의 근거는 오로지 혼자만의 상상 속에만 존재했다. 여자의 짐작과 다르게 남자는 정말로 애인의 순박함과 정숙함을 사랑했던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음란한 스타일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여자의 추측과 정반대로, 남자는 그런 스타일을 혐오했을 뿐이었다.

애인의 연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남자는 그녀가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혐오스러운 유형의 여자들과 더없이 똑같다는 생각"(120쪽)에 치를 떤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한다. 애인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그녀의 본래 모습이며, 자기가 사랑했던 정숙함과 순박함이 허상에 불과했다고.

그녀의 깊은 내면에는 다른 모든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은밀히 품었던 의심과 질투를 증명해 주는 모든 가능한 생각들과 감정과 부도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그는 그녀의 개성을 특징 지워 주었던 윤곽은 단지 허상에 불과하며, 그러한 허상을 바라보다 희생된 상대가 바로 그 자신임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가 사랑했던 그 아가씨는 그의 동경과 유추와, 신뢰의 산물에 불과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의 여자 친구의 진정한 모습이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절망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절망적으로 낯설게, 절망적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그는 그녀를 증오했다. (129쪽)

남자의 개탄은 역시나 의심과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남자는 자기 애인 역시 다른 모든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도덕할 것이라고 은연중에 의심해 왔으며, 애인이 정절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무의식적으로 질투해 왔던 것이다. 남자 역시 이렇게 상상 속 질투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자는 몰랐기에 그토록 자기만의 공상으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남자가 히치하이커를 연기하는 여자에게 다정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여자는 의심하고 질투한다. 그는 언제나 자유분방한 낯선 여자들의 유혹에 약할 것이라고. 이와 똑같이 남자도 의심하고 질투하며 분노에 떤다. 여자가 실제로 낯선 남자를 음탕한 애교로 유혹할 것이라고. 게임과 현실이 뒤죽박죽 섞인다. 게임의 시선과 현실의 시선, 이들이 교차하면서 문제는 교묘해진다.

급기야 그는 애인이 정절과 순수를 잃어버렸다고 단정해버린다. 그러면서 그녀를 증오하고 함부로 대한다. 게임의 종국은 "감정과 사랑이 없는 성행위"(134쪽)였다. 이것이 표상하듯, 그들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오해의 사슬. 남녀 관계에서 이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을까. 이것은 연애의 시작 전부터 연애 과정 전체는 물론, 연애의 파국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근본 전제인 듯하다.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강 저편에, 상대방 마음의 진실이 있다. 서로 반한 남녀는 각자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다가가지 못한다. 연애 중 남녀도 위의 커플처럼 각자의 상상 속에서 의심과 질투에 시달린다.

의심과 질투뿐인가. 각종 이슈를 둘러싸고 상대방 마음에 대한 상상만 난무할 뿐, 상대방 마음의 실체는 비밀로 남는다. 또한 수많은 결별이 서로의 마음에 대한 상상적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동상이몽의 마법에 걸린 연인들은 각자 저만의 상상 속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제멋대로 재단하며, 제각기 상상된 마음만이 안개처럼 희뿌옇게 둘 사이를 떠돌 뿐, 마음의 본색을 소통하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그리하여 때로 연애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업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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