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술 마다치 않고 마셨으니,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록 같은 일이 벌어졌고, 사내로서 구실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의외로 낙관적인데다 장난기가 있는지라, 이게 천명인가 싶었다. 하늘의 뜻이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나고 가정을 버리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머리 밀고 정진하라면 받아들여야겠다 눙쳤다.
두 달이 지나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 인터넷에 '발기 부전'이라는 검색어를 쳐봤다. 여러 증상이 일치하였는지라 치료법도 두루 살펴보았다. 비뇨기과에 가 검사하고 그 유명한 비아그라를 처방받거나, 수술해야 한다 했다. 비슷한 증상으로 전립선비대증이나 암도 있기에 비교하며 보았다.
병원에 가서 발기 부전 처방받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쑥스러울 것도 같고 민망할 듯도 싶고. 일정표 확인해서 가까운 비뇨기과 갈 날짜 정하려다 퍼뜩 든 생각이 있었다. 발기 부전을 한자로 어떻게 쓰나 싶었던 것. 상식에 비추어 볼 적에 '發起'일 가능성이 크다 싶었다. 그런데 찾아보니 아니었다. '勃起'였다.
순간, 이거 재미있다 싶었다. 작고 누워 있던 것이 커지고 성난 듯이 선다는 이미지 때문에 '發起'라 생각했을 터다. 그런데 '勃'을 쓰다니 통념이 잘못된 셈이다. '勃'은 '우쩍 일어날 발'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발기는 '勃起'가 아니라 '勃氣'라 써야 맞지 않나 싶었다. 무골장군인지라 본디 크기가 없는데 성적 욕망이나 흥분이라는 기운이 일어 우쩍 일어났으니 말이다.
마침 김용옥의 <맹자 사람의 길>(전2권, 통나무 펴냄)을 읽고 있었던지라 이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불순하나, 호연지기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내 생각이 맞다 싶었다. 오늘날 태어났다면, 공영 방송의 뛰어난 사회자가 되었을 공손추가 맹자에게 호연지기란 과연 무엇이냐고 물었다. 맹자가 대답하기를.
"정말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의 기(氣)됨이 지대하고 지강하여, 정의감에 의하여 배양되고 사악함에 의하여 상해 받지 않는다면 6척 단신의 기라 할지라도 천지지간에 꽉 들어차는 것이다. 그 기됨이란 항상 의와 배합되며 도와 더불어 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이것이 결여되면 그 인간은 활력이 없어지고 시들어버린 쭉정이가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호연지기라는 것은 의로움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축적되어 인간 내면에서 온양. 배양되는 것이지, 어떤 돌발적인 정의감의 우발적 행동에 의하여 취득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마음에 돌이켜 볼 때 꺼림칙하거나 뒤가 켕기는 구멍이 있으면 그 인간은 결국 시들어버리고 만다. 호연지기가 상실되어 활력이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맹자 사람의 길>(전 2권, 도올 김용옥 지음, 통나무 펴냄). ⓒ통나무 |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예, 쪼그라든다. 이렇게 되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생리 현상을 해결해도 미진한듯하다. 심신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起'는 단지 결과일 뿐이며 원인은 '氣'에 있다 보아야 맞지 않겠는가. 봐라, 호연지기가 우리 오장육부 가운데 하나는 아니다. 그런데도 호연지기를 키워야 한다고 한다.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할꼬?
내가 보기에는 발기 부전 상태가 바로 호연지기가 상실된 것과 똑같다 싶었다. 이성을 보고 성적 욕망이 솟아나올 때, 바로 그 기운이 몸에 있는 피를 한 곳으로 몰아가 평소 작고 볼품없고 흐늘거리던 그것을 단단하고 크고 맹렬하게 만들 터다. 발기가 특정한 부위와 관련했다면, 호연지기는 정신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호연지기를 묻고 대답하는 바로 앞에 용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를 참조하면 쉬이 이해된다.
옛날에 증자께서 자기의 문인 자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신 적이 있단다 : 너는 용기를 좋아하느냐? 나도 우리의 공자 선생님께 대용(大勇)에 관하여 문의해본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자기 내면을 반성해보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면 비록 천군만마의 대군이 밀어닥쳐도 용왕매진(勇往邁進)할 수 있다고.
호연지기는 인위로 키운 게 아니다. 높은 산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며 냅다 큰 소리 질러야 호연지기인 것이 아니다. 그 기운은 내면성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적에 극대화하는 그 무엇이다. 발기도 그러할 터다. 내 몸의 기가 제대로 작동하면 때에 맞춰 설 것이다. 그러나 기가 쇠하여지면 피를 일순, 한곳에 몰아가는 기능을 하지 못하리라.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비뇨기과 가기를 포기했다. 기를 돋우어야 해결될 문제다. 그러면 당연히 한의원으로 가야 한다. 책 열심히 읽고 글 잘 쓰는 한의사 김재홍을 찾아갔다.
어찌하다 보니 맹자가 발기 부전 치료의 비책이 되고 말았다. 하여튼 몸의 변화를 겪은 시기에 맹자를 읽으며 남과 다른 독법을 체득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런데 김용옥의 해설을 읽으며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을 깨우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잘 알다시피 양혜왕이 맹자에게 이익을 거두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물었다가 인의를 먼저 살펴야 하지 않겠느냐고 통박당한 대목이 맨 처음 나온다. 그동안 맹자가 말한 인의의 개념을 사전적 풀이 이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김용옥의 해설은 사뭇 다르고 깊이 있었다.
"맹자는 양·묵과의 대결을 선언하고 나선 사람이다. 묵적은 겸애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무부 (無父)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맹자는 비판한다. 그리고 양주는 위아(爲我)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무군(無君)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맹자는 비판한다. 다시 말해서 공자가 말했던 인간의 도덕적 심미안의 총체적 근거였던 인이라는 감성적 느낌이 맹자에 이르러서는 대학파적 논쟁의 핵심 개념으로서 개념적 분화를 일으킨 것이다. 즉, 맹자의 인은 공자의 인이 아니다. 그것은 묵자의 겸애설을 비판하기 위한 가족 윤리로서의 인이다. 공자는 의도 개념화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맹자는 의를 인과 짝하는 가치로서 개념화시킨다. 그것은 양주의 아나킥한 위아설을 비판하기 위한 사회적 가치이며 군신도덕을 핵으로 하는 것이다.
무릎을 쳤다. 공맹은 늘 중용의 길에 서있었다. 극단의 어느 끝자락에 매달리지 않고, 둘 사이에 펼쳐진 팽팽한 긴장의 한 가운데를 걸었다. 인의도 극단적인 평등주의나 이기주의 사이에 놓인 그 무엇이었다. 고대 중국 철학이 치열한 지적 논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맹자는 더욱이 싸움꾼이었다. 상대방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다. 인의를 사전적으로 풀이해서는 안 된다. 양극단을 치기 위해 공자한테 물려받아 새롭게 벼린 이론의 칼이었던 셈이다. 이루 상편에 보니 "인의 실제 내용은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것이니 효라 말할 수 있다. 의의 실제 내용은 형을 잘 따라는 것이니 제라 말할 수 있다"하는 구절이 나왔다. 맹자 역시 가족 윤리를 사회 윤리로 확장하려 했다(공손추 상에서는 측은지심이 인의 실마리라 했고 수오지심은 의의 실마리라 했다. 맹자가 인의에 대해 말한 부분을 그러모으면 그 뜻이 드러날 듯싶다. 말하자면 용례로 의미를 파악하자는 뜻.)
그러면 맹자의 핵심어는 인의일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맹자 사상의 고갱이는 딱딱하고 고정된 개념어가 아니다. 문장 구성 요소로 보건대, 생략해도 되는 한낱 부사어에 그의 철학의 모든 것이 있다. 무어냐고? 그것은 '차마'이니, 공손추 상에 나온 다음 구절을 잘 새겨보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람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제왕인 선왕들께서는 사람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인정을 베푸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어쩌지 못하는 인한 정치를 실천하기만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손바닥 위에 물건을 놓고 주무르듯이 쉬운 일이다…지금 어떤 사람이 여기 돌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우물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자!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면서 측은한 마음이 엄습할 것이다. 그리고 구하려고 달려갈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맹자가 오늘 우리 시대에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가 이 '차마'에 있을 터다.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것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의식이 상처받고 좌절하고 눈물 흘리는 이들과 함께 하는 힘이 되는 법이다.
문제는 우리가 '차마'의 자리에 서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하고 있다.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대한문 앞에 영정을 모셨다. 그런데 경찰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쓰레기차에 영정을 처박아 버렸단다. 차마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만 있더라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통합진보당이 비례 대표 선출 과정에서 일어나 부실과 부정 문제로 시련을 겪고 있다. 선출된 비례 대표가 모두 함께 책임지자며 사퇴를 권했으나, 그 권력과 자리에 연연하는 이들이 버티다 마침내 검찰한테 당원 명부가 강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해직된 이들의 아픔을 보듬기 위해 진보 정치를 하는 것이건만, 차마의 정신을 잃은 이들이 진보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맹자>는 <논어>와 달리 본문만 잘 읽어도 이해되는 대목이 많다. 김용옥의 번역은 맹자에 이르러 물이 오른 듯하다. 앞부분에 펼쳐진 그의 장광설이 독서에 방해된다면 본문만 읽으면서 스스로 깨우쳐 나가도 된다. 이익만 앞세우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걱정하며 보자. 도덕적 충만감이 우리의 기를 세워준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자.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의 차마임을 깨닫자.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사람의 길에 올라서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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