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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던진 말 "널 죽도록 증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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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던진 말 "널 죽도록 증오해!"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②

☞ 관련 기사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① 이별 통보하며 던진 말 "널 지독히 사랑해!"

불타는 정열보다 더 무서운 은근한 사랑의 독(毒)

사랑이 아무리 거칠거나 깊다고 해도 결국은 한순간의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441쪽)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아마란타와 게리넬도가 들려주는 또 하나의 사랑 이야기.

아마란타는 게리넬도를 만나면서 과거 피에트로에게 느꼈던 정열을 되살려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그녀는 "비록 그를 사랑하게 되지는 못했어도, 그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끼게"(186쪽)된다.

벼락 맞듯 시작된 사랑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안다.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은 아닌 듯하여 '사랑'을 의도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의 결과 느끼는 감정도 '사랑'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상대 없이는 살 수 없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1회에서 본 피에트로도 마찬가지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레베카와 피에트로의 경우처럼 불타는 정열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피에트로는 정열적인 레베카와의 사랑에 실패했을 때는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란타와의 조용한 사랑이 끝났을 때 자살하고 만다.

없어지면 죽을 정도로 치명적인 사랑은 반드시 정열이라는 외투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근한 사랑을 잃을 때,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랑의 다른 고백, 네가 미워 죽겠어!


▲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그들 두 사람은 일상적이면서도 영원한 현실이라고는 오직 사랑뿐인 공허한 하늘에 둥둥 떠서 살았다. (445쪽)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때로 뒤틀리고 변형된다. 가령 철수가 영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극구 우기거나, 그녀를 필사적으로 미워하고 기피하거나, 자신감을 어이없을 정도로 잃어 심한 열등감에 빠지거나, 이럴 때 우리는 철수가 영희를 좋아한다고 눈치 챈다. 레메가 마우리치오 바빌로니아에게 매혹되어가는 과정은 변형된 사랑의 신호탄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첫 만남 후 레메는 마우리치오가 건방지다고 친구에게 험담한다. 이후 그녀는 영화관에서 그가 자꾸만 자기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모습을 본다. 그가 노골적으로 추근댄다고 그녀는 분노한다. 레메는 파선된 배에서 그가 자신을 구출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도 그녀는 고맙기는커녕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 험담하고 분노하고. 이토록 미워하면서도 그녀는 그를 빨리 만나고픈 기묘한 욕망에 안달한다. 결국 그를 만난 그녀는 "쾌감과 분노가 섞인 묘한 기분"(319쪽)을 느끼며, 이후로도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만족하는 내적 분열에 혼란스러워 한다.

레메의 내적 분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날 밤 그녀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공연히 흑심을 품지 말라고 한시 바삐 쏘아주어야 한다고. 이에 곧장 달려가 그를 만난 레메는 갑자기 깨닫는다. 자기가 그와 단둘이 있고 싶은 욕망에 미칠 지경임을. 그런데 그가 그녀의 감정을 읽은 듯 거만하게 굴자, 그녀는 너무나 굴욕을 느낀 나머지 밤새도록 화가 나서 흐느껴 운다.

1회에서 아마란타의 내적 분열을 이야기했지만, 레메의 경우 내적 분열은 더 격심한 듯하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하고, 그에게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욕망하는 내적 분열 말이다.

이후 두 사람은 지독한 사랑에 빠지지만, 그 시작은 이토록 증오와 분노, 공격성으로 가득 차 있다. 증오와 분노는 매혹 당한 속내를 감추는 위장술이었다. 매혹을 공격성으로 뒤집어서 표출하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다. 가령 소년은 마음에 둔 소녀를 짓궂은 장난으로 괴롭힌다. 싸우다가 정든다는 말도 유명하다. 사랑이 깊은 커플일수록 지독하게도 잘 싸운다.

이렇게 사랑과 공격성은 자주 샴쌍둥이처럼 한 몸을 이루니, 가령 이 작품 최후의 연인들인 아마란타 우르슬라와 아우렐리아노의 사례도 그러하다. 마르케스는 특히 그들의 맨 처음 성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목숨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맹렬히 싸웠지만, 그들의 공격이나 도피는 유령 같은 몸짓이어서 폭력의 인상은 조금도 없었으며, (…) 야만적이면서도 예식(禮式) 같은 싸움에 한창 열이 올랐을 때, (…) 아마란타 우르슬라는 이를 악물고 싸움을 계속하면서 일부러 웃어댔고, 그러면서도 그를 물어뜯을 때에는 가짜로 물고, 조금씩조금씩 저항의 몸짓을 누그러뜨렸으며, 그래서 그들은 서로 싸우면서도 이제는 공범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고, 그들의 난투는 흔한 희롱으로 바뀌어 갔고, 공격은 포옹이 되었다. (435~436쪽)

이들이 오랜 방황 끝에 처음으로 몸을 섞으며 사랑을 수긍하는 장면은 난투극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섹스 자체가 공격과 방어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이어지는 싸움과 닮았다. 원시 시대에 남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여자들을 유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사랑과 전쟁은 등치 관계에 있었다. 둘 다 정복하고, 유괴하고, 사로잡는 행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상>(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53쪽)

왜 이토록 사랑은 전투 혹은 공격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가?

우선 앞서 본 두려움. 사랑에 함몰되어 자기 자신을 잃을까봐 두렵고, 사랑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진창 같은 고통도 겁나고, 사랑의 궁극이라는 행복도 실은 무서운 나머지, 사랑에 빠진 자는 그 사랑과 상대를 버리고 싶다. 일단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버리고 싶은 마음을 합리화하는 이유를 마련해내야 한다. 그래서 상대를 깎아 내린다.

한편 매혹당한 자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고 지레짐작하기 쉽고, 거절이 두려운 나머지 깊게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한다. 이런 감정은 열등감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열등감은 우울의 씨앗이다. 열등감에 시달리며 우울증에 빠진 이가 그 원인을 제공한 상대를 증오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아니면 그는 매혹됨으로써 싸움에 졌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화가 난다. 그래서 상대에게 화풀이한다. 이때 실제로 혼내고 싶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에게는 '매혹 당함'을 '공격 받음'으로 번역하는 잠재의식이 있다. 그래서 '매혹=공격'을 당함으로써 위험에 처한 그는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상대를 역공한다.

혹은 이럴 수도. 사랑과 증오 모두 한없이 일상적인 사건이나, 극단적인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천국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한 극단적인 사랑과 죽여야만 살 것 같은 극단적인 증오는 현실적인 사무로 번잡한 일상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세계에서 일어난다. 이 세계에서 사람은 비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쾌락을 느낀다.

이때의 쾌락은 사랑으로도 커지고, 공격성으로도 커진다. 사랑이 공격성을 키우고 공격성이 사랑을 키우기도 한다. 공격성과 사랑이 쾌락을 지지하는 양대 주축이기에, 한 쪽이 크면 다른 쪽도 동시에 커진다. 더 짜릿한 쾌락을 바라는 마음으로, 연인들은 자꾸만 전투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전투는 사랑이라는 쾌락을 극단적으로 누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뿌리는 양념인 셈이다.

인생을 탕진하고서야 발견한, 고독을 나누는 천국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노년기를 훌륭하게 보내는 비결이란 고독과 영광스러운 조약의 체결뿐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227~228쪽)

여태 다소 삐딱한 연애 심리를 살폈으니 이제 훈훈한 이야기를 하고 마쳐야겠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할까? 그 피곤한 사랑, 도대체 뭐가 좋아서? 사랑을 하면서 가장 간절하게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매혹을 느끼는 순간의 떨림인가, 정열이 거느리는 짜릿한 고통인가, 상대를 얻었을 때의 성취감인가, 육체적 쾌락인가, 독점적 관계가 주는 안도감인가?

여기 평생토록 쾌락의 극단까지 누려본 이후 왜 사랑이 좋은지, 사랑의 가장 좋은 면이 무엇인지 노년이 되어서야 깨달은 커플이 있다. 그들의 답은 이렇다.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천국. 답이 좀 시시한가? 어쨌든 그들은 이 천국을 찾기 위해서 인생을 그토록 많이 낭비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에 비탄을 금치 못한다.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트라 코테스는 결코 고결한 연인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쌍둥이 형제와 함께 그녀를 두고 짓궂은 장난을 즐겼을 뿐이었다. 쌍둥이 형제들은 마치 한 남자인 양 속이고 번갈아 페트라의 침대를 찾는다.

보다 더 길게 페트라 곁에 남은 아우렐리아노는 그녀와 아찔한 육체적 사랑을 즐기며 통제 받지 않는 쾌락의 극단까지 가 보지만, 동시에 그녀를 여러 번 배반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페르난다와 결혼하기 위해 페트라를 버린다. 페르난다와의 침실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페트라를 다시 찾는다. 그는 평생 두 여자 사이에서 오락가락 한다.

그는 페트라와 함께 방만한 욕망을 무절제하게 추구한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고, 방탕한 파티를 무제한으로 열어대고, 흥청망청 돈을 써 댄다. 새끼를 많이 쳐서 그를 부유하게 만든 가축들처럼, 이 시절의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디오니소스처럼 방탕과 무절제와 충동의 화신이다.

그는 페트라에게 충실하지도 않았다. 지독한 홍수가 마콘도를 휩쓸 무렵, 단지 빗속을 걸어가기 싫다는 이유로 페르난다의 집에 머물면서 페트라 홀로 재앙과 싸우도록 방치한다. 페트라 역시 지고지순한 여인은 아니었으니, 페르난다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기 위해 각종 술수를 일삼았다.

욕망의 명령만을 따랐던 철없고 이기적인 이 연인들은 그러나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여 참된 사랑을 느낀다. 그들을 가르친 교사는 가난이었다. 그들은 홍수로 모든 부(富)를 잃고,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며 나머지 가족까지 책임져야 했다. 이때 "동정"과 "비참한 외로움"을 함께 느끼면서 그들은 새로이 사랑에 빠진다. 미친 듯이. 그러나 "부서진 침대에서는 난폭한 행위 대신에 친밀한 안식처를 찾는 부드러움이 자리를 잡았다." (373쪽)

그래서 그들은 함께 지난날의 광폭한 탕진 생활과, 으리으리했던 부유함과, 걷잡을 수 없었던 음탕한 삶이 결국은 역겨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천국을 찾기 위해서 그들이 인생을 그토록 많이 낭비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여러 해 동안의 삭막한 생활 끝에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진 그들은 침대에서 뿐 아니라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순간에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기적을 터득하고, 그들의 행복은 자꾸만 자라서 그들이 다 낡아빠진 두 늙은이가 되었을 때도 어린아이들처럼 꽃피어났으며 강아지들처럼 정겹게 같이 놀았다. (374~375쪽)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천국을 찾기 위해서 인생을 그토록 많이 낭비했어야만 했다니. 천국이란 육체적 쾌락을 그 꼭대기까지 다 누릴 수 있었던 젊은 날, 욕망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아도 좋을 만큼 모든 것이 흥청망청 넘쳐나던 젊은 날에 있는 것이 아니란다. 가난하고 비참하지만 고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노년에, 천국이 있단다.

이러한 천국은 평생 고결한 사랑을 나눈 이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기심, 질투, 책략, 기만, 무책임으로 훼손된 관계를 이어 온 이들도 은총의 순간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 소설에서 그들은 고난을 함께 겪도록 내몰렸기에 은총의 순간을 맞이하였지만, 계기가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그러니 배반을 일삼는 현재의 사랑으로 고통 받는 연인이 있다면 좀 더 인내심을 갖고 후일을 기다리시길.

더불어 사랑에 대한 천상의 꿈을 부정하는 누추한 지상의 현실에 슬퍼하는 연인이라면 비탄을 거두시라. 사랑으로 누릴 수 있는 지복(至福)이란 고독을 함께 나누는 경지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야심 찬 기대를 하지 마시길.

그러나 결코 고독의 공유를 '불과하다'는 말로 폄하할 수 없다. 모든 고통의 궁극은 고독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허무, 근심, 정열, 공포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아픈 마음'들을 진열한다. 가히 마음의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이 각양각색 고통의 끝을 고독으로 귀결시킨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소설만큼 인간만사 겹겹이 스민 형형색색의 고독을 처연하게 그린 작품도 드물다.

굳이 소설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네 삶만 돌아보아도 안다. 고독이 인간의 천형임을. 사정이 이런데 고독을 나누는 축복이 과연 시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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