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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수호전> 읽으면 '지옥불'? 그렇게 순진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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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수호전> 읽으면 '지옥불'? 그렇게 순진해서야!

[중국을 비판적으로 읽는 법] 류짜이푸의 <쌍전>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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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에게 중국은 희망의 국가였다.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청년들이 사회의 경제적 주축이 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입지는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자본주의의 프런티어'로 급상승했다.

이후 중국이 꾸준히 고도성장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수많은 한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미국이 2008년 경제 위기를 정점으로 그 빛을 잃어가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중국을 낯설면서도 친숙한 또 하나의 패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루쉰으로 대표되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 이전 문인의 글에서 벗어나, 현대 중국의 다양한 저자들이 국내 출판계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한 나라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문인들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건 환영받을 뿐더러, 상당히 일찍부터 소개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같은 경우를 떠올려보면 금세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의 '비판적 지식인'이 소개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해당 국가와 체제를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이 인식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는 '비판적 지식인' 중 외국인들의 목록을 쭉 검토해보라. 그들은 모두 미국인이거나, 미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거나, 미국에 살지 않으면서 미국을 비판하는 미국인 혹은 외국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비판적 지식인'이라면 위 문장의 '미국'을 '영국'이나 '서구 열강' 등으로 치환하면 그만이다. 지식인이 되는 것은 중산층 고학력자들의 특권이다. 비판적 지식인이 되는 것은 중심부에 살거나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중산층 고학력자들의 특권이다.

우리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큰 함의를 지니는 사건이다. 이번 서평의 대상이 되는 <쌍전 : 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임태홍·한순자 옮김, 글항아리 펴냄)의 저자 류짜이푸 역시 바로 그런 중국의 '반체제 지식인'중 한 사람이기에,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다소 길게 이야기를 해 보았다. 이런 맥락을 전제해야 <쌍전>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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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전>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 보자.

"피로 얼룩진 <수호전>과 속임수로 가득한 <삼국지>를 고전으로 숭배함으로써 중국의 문화는 본래의 모습을 잃고 이전투구로 변해버렸다."

▲ <쌍전>(류짜이푸 지음, 임태홍·한순자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저자는 두 고전 소설, 즉, '쌍전'의 문학적 가치를 결코 폄하하지 않는다. 다만 그 속에 들어있는 '문화적' 요소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결과적으로 현대 중국의 오늘을 향해 비판의 칼을 겨누고 있을 뿐이다.

"문화 비판과 문학 비평은 그 개념이 서로 다르"며,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의 기준은 첫째, 문학의 내용을 고찰하는 것이며 둘째, 문학의 심미적인 형식을 고찰하는 것"(41쪽)이라는 저자는, "한편 '문화 비판'은 문학 작품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문화적인 인식을 다룬다. 그것은 단지 내용하고만 관련 된다"(42쪽)며 자신의 작업이 철저히 '쌍전'의 내용에만 한정되는 것임을 확실히 한다.

그 내용에 대한 비판이 주요 매체의 서평에서 줄곧 다루어진 부분일 것이다. 가령 <수호전>에서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는 전제를 깔고, 그리하여 양산박의 도적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때려죽이는 모습이라거나, 그러한 살육을 읽으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 심성 등에 대한 비판론은 비교적 <수호전>에 친숙하지 않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비판의 대상이 <삼국지>로 넘어오면 더 더욱 그렇다. 권력을 잡을 때까지, 아니 잡고 나서도 계속 남을 속이고 뒤통수를 치는 내용으로 <삼국지>가 점철되어 있다는 비판은 국내에서도 낯선 내용이 아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가 촉한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과도한 정실주의로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비판은 <삼국지>라는 역사 소설에 비판적이지 않은 입장을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살육, 권모술수, 기만, 반란, 여성 혐오 등을 모두 '위형적 문화'로 단정 짓는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후대에 기입된 것이지 중국 문화의 근원적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쌍전'이 지금도 유포하고 있는 '위형 문화'에서 벗어나, 멀게는 <산해경>에서부터 가깝게는 <홍루몽>까지 이어지는 '원형 문화'로 회귀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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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짜이푸는 1989년 중국을 떠났다. 천안문 사태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아직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홍콩과 미국을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삶의 이력은 이 책 <쌍전>에 독특한 아우라를 덧씌운다. 누구보다 중국과 중국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 비평가가 고국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상황에서, 자국민들이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문학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삼국지>가 아직도 국민적인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나라, 심지어 장정일 같은 '진보적'인 문필가도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기어이 삼국지의 '재해석'에 손을 대고야 마는 이런 나라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이 유효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 대혁명이 끝난 뒤에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혁명 기간 중에 <홍치(紅旗)> 잡지사의 책임자가 사회과학원(당시엔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였다)에 어떤 홍위병 조직이 폭로한 승리의 비결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정치투쟁의 3원칙이었다.

1) 성실성은 필요없다.
2) 사당(死黨)을 결성한다.
3) 상대방에 먹칠을 한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들었을 때 상당히 놀랐다. 그러나 나중에 그러한 것들은 옛날부터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원류는 바로 <삼국지>였다. (305쪽)

우리가 한국의 정치 투쟁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나, 류짜이푸가 고국의 소식을 접하며 느끼는 회한이나, 그 근본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 '서민 경제가 우선이다'와 같은 당위적인 소리들은 마치 '한나라의 왕실을 구해야 한다'는 삼국지의 대의명분처럼 공허하게 허공에 흩날린다.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이, 사실 그 누구도 한나라의 왕실을 존중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붙이기에 바빴듯, 그 누구도 진정 대한민국을 걱정하지 않지만 틈만 나면 상대를 빨갱이 혹은 친일파(의 후손으)로 매도한다. 하지만 막상 정권을 잡고 나면 그 화려한 공약들을 결코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는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권력 투쟁도 마찬가지 차원에서 이해 가능하다. 전 중국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를 둘러싸고 전개 중인 사건을 생각해보자. 물론 사건의 진실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그럴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보시라이의 부인이 영국인 사업가를 살해한 현장에 있었을 수도 있고 직접 죽였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 역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로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지와 수호전이 단지 중국인들만의 고전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책들의 영향권 하에 속한 나라들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으로 <쌍전>을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실제로 이 책은 그렇게 소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 문제의식과 방법론에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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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속한 정치적 공동체가 고전적 텍스트의 맥락에 휩싸여 올바른 감수성과 정치적 판단력을 잃었다고 본 사람은 류짜이푸만이 아니다. 가장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우리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에 도달하게 된다. 대체 본받을 구석이라고는 없이, 서로 트집 잡고 협잡하고 갈등하는 신들의 이야기를 대체 왜 우리가 읽고 배워야 하는가?

시간과 공간의 큰 격차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류짜이푸가 내놓은 것과 같은 질문이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몇몇 허구의 문학 작품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보편적인 올바름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즐기며 심지어 몇몇 등장인물들을 숭배하기까지 한다. 대체 이 현실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플라톤은 '상식'의 선에서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이론의 체계를 구성해냈다. 올바른 정치가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는 올바름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온갖 경험적, 우연적인 요소들을 다 제거하면서 올바름, 즉 선(善)에 대한 질문을 변증법적으로 던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선의 이데아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진정 올바른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플라톤은 믿었다. 그것이 <국가>의 한 축을 이루는 내용이다.

사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플라톤 뿐 아니라 서양 철학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가장 가깝게는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떠올려볼 수 있다. 만약 이 세상의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그 법칙 속에서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들은 모두에게 최대한 공정하도록 그 규칙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 실험의 결과물 그 자체가 현실의 법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시금석으로 삼아 현실을 가다듬을 수 있다.

류짜이푸가 대답을 내놓는 방식은, 그러나 그것과 전혀 다르다. 그가 <수호전>의 '영웅'들을 한낱 살인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특별히 근거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기보다는, 도덕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장청과 같은 사람들은 사실상 진화가 아직 덜 되어 인격이 미완성된 '잔혹한 인간'이다. 말하자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털끝만큼도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말을 따르자면 그는 사단(四端)이 결핍된 사람이다. 사람의 가죽을 쓴 짐승이다. 그러나 그는 양산박에 진입했기 때문에 역시 나중에 영웅호걸이 되어서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했다.' (95쪽)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본질적인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수호전의 등장인물을 두고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묻는 류짜이푸의 비판은, 삼국지를 소재로 한 경극을 보다가 조조 역을 맡은 배우를 실제의 조조라고 생각하고 정의 실현을 위해 칼로 찔러 죽인 한 중국인의 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물론 오랜 세월 '좋은 작품'으로 공인되어온 소설에 반기를 드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류짜이푸가 <삼국지>와 <수호전>을 비판하는 방식이, TV 드라마를 보며 저 년이 나쁜 년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밥상머리 문화 평론과 차별화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란 어렵다.

우리가 '인문학자'의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한계치가 고작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면, 그것은 적잖이 싱겁고 실망스러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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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삼국지>와 <수호전>은 중국인 혹은 동아시아 3국의 대중들이 지금도 수없이 읽고, TV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 끊임없이 재창조하고 있는 그런 작품이다. 단순히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비판의 위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문화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삼국지>와 <수호전>을 덮으라고 말하는 대신, 대체 무엇을 새로운 문학적, 문화적 기준으로 제시할 것인가?

류짜이푸는 <산해경>과 <홍루몽> 등에서, 외래의 요소에 오염되지 않은 중국의 '원형 문화'를 발견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

<산해경>에서 보여주는 중국 원형 문화의 정신은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사람을 위해 복을 만들어주는 정신은, 어린아이와 같이 소박한 마음씨를 가진 정신이다. <홍루몽>과 관련되고 <홍루몽>이 드러내서 풍부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종류의 정신이었다. (59쪽)

중국의 온갖 전통 신화를 끌어 모은 책인 <산해경>은 당연히 '창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 중기에 완성된 소설 <홍루몽>은 기본적으로 <겐지 이야기>처럼 사회적 상류층들의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전반적으로 '좋은 내용'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는 책을 골라 '중국의 원형 문화'라고 하고, 전쟁과 살인과 반란이 담긴 책을 '위형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어떤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현재 더 많은 중국인들, 더 많은 아시아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고루 호응 받는 것은 <산해경>이 아니라 <삼국지>인데, 대체 무슨 근거로 전자가 후자보다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단지 그 내용이 인간적이다, 인간적이지 않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위의 구분이 나누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신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창세기의 앞부분만을 떼어내어 '기독교의 원형 문화'라고 주장하고,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키면서 온갖 피의 학살을 벌이는 출애굽기 등을 '기독교의 위형 문화'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형 문화'와 '위형 문화'에 대한 류짜이푸의 구분은 자의적이며, 적어도 독자인 나로서는 그 구분을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설명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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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는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인 류짜이푸가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맥락을 다소 거칠게나마 조감해보며 이 글을 시작했다. 중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첸리췬과 류짜이푸 등이 최근 갑자기 활발하게 번역되는 이유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 우리는 지금 중국을 다시 한 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현대 중국의 문화적 지형도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제출하는 동시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고 또 즐거운 일이다. 국내에 잘 알려져 있는 듯하지만 친숙하지 않은 중국의 고전 소설을 되짚어보는 것도 그렇다. 문제는 이 '비판적 지식인'들의 비판의 방식마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근본적인 독서의 가능성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소개되는 것은, 연거푸 말하지만, 중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비판적 지식인들의 논의는,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충분히 유의미할 수 있을 만한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을 이른바 '물 건너온 스승'으로 떠받드는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만 같은 출판계를 바라보며 나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쌍전>이라는 한 권의 책을 통해 가늠해볼 때,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일 뿐, 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보편적 논의의 지평을 획득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뉴스에는 보시라이의 실각을 둘러싼 온갖 잔혹한 루머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대체 '중국의 원형 문화'를 통해 중국의 현재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북한을 통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용의 실체를 어쨌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의 책마저도 비판적으로 읽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 과정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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