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책들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지구 온난화에 관한 최신의 과학적 사실들―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의 보고서라는 형태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을 전달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이 문제에 대처할 것을 촉구하거나, 아니면 지구 온난화 과학의 한계나 이해관계를 '폭로'하면서 이러한 주장이 실은 괜한 겁주기이자 돈 낭비일 뿐이라고 폄하하거나.
수적으로는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 많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책들도 잊을 만하면 간간이 한 권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둘은 줄곧 평행선을 달리고 있고, 그 중간에 해당하는 책은 찾기 어렵다.
미국의 과학사학자 스펜서 위어트가 쓴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The Discovery of Global Warming)>(김준수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은 얼른 제목만 보면 기후 과학자들과 회의주의자들 간의 이러한 논쟁에 직접 뛰어들어 어느 한쪽을 편드는 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앞서의 두 가지 전형 중 어느 쪽에도 들어맞지 않는, 출판 시장의 맥락에서 보면 다소 희귀한 책이다.
▲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스펜서 위어트 지음, 김준수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 ⓒ동녘사이언스 |
저자는 현재의 지구 온난화 과학에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아 있고 또 그 중 일부는 앞으로도 해소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역점을 두는 것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불확실성과 세세한 이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인간 활동의 결과로 더워지고 있다'는 과학적 이해의 큰 줄기가 지난 100여 년 동안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해명하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인간의 산업 활동의 결과로 온실 기체인 이산화탄소의 대기 중 농도가 올라가 지구를 덥게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을 처음 제기한 것은 19세기 말 스웨덴의 과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였다. 그러나 아레니우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여러 가지 허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계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지구가 더워진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에게 크게 우려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온화한 날씨나 가용 경지 면적의 확대 같은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20세기 중엽까지 기후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닌 '아마추어' 학자들―기후 과학의 당시 발전 수준에서 전문 학자와 아마추어 사이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이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간헐적으로 이어갔지만 여전히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황이 결정적으로 전환점을 맞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의 '사회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우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높아진 과학의 위상과 냉전기의 군사적 필요로 인해 과학 연구 개발에 엄청난 자원이 투입되었고, 이는 지구과학을 이루는 여러 분과 학문들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후한 지원은 당장의 실용적 응용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여러 연구에까지 미쳤고, 그 결과 대기 중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 농도의 측정이나 호수나 바다 밑바닥의 침니층과 그린란드, 남극의 빙하 속에 기록된 장기적인 기온 변화 연구 등이 꾸준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아레니우스 같은 학자들의 주장에 제기되었던 반론 중 일부를 제거하는 데 기여했다.
아울러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진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자연은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힘이며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기후라는 지구 물리학적인 힘에 영향을 줄 수는 없을 거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런던, 뉴욕 같은 대도시들을 덮친 살인 스모그, 대기 중 핵실험에서 나온 방사능 낙진의 공포,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책 <침묵의 봄>으로 촉발된 합성 살충제의 유해성 논쟁 등을 잇따라 겪으면서, 자연이 실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깨지기 쉽고 소중하게 돌봐야 하는 존재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이처럼 변화한 인식 속에서 과학자들은 인간의 산업 활동이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좀 더 쉽게 꺼낼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연구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지구의 기후 변화(특히 빙하기의 도래)의 원인을 설명하고 인간이 기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한 수많은 연구들이 여러 세부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그러한 연구의 전개 과정을 다룬 이 책의 중반부(3~6장)가 다소 어지럽고 산만해 보인다면, 이는 당시 이뤄진 연구 자체가 수많은 분야들에서 각개약진식으로 어지럽고 산만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처럼 다양한 연구의 갈래들은 인간 활동에 의한 지구 온난화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점차 모아졌고, 각성한 몇몇 과학자들과 언론인, 정치인들에 의해 전 지구적 대책 마련을 위한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1988년 유엔 산하에 생겨난 IPCC였고, 이 기구는 이내 지구 온난화 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집대성해 정치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규제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2006년 앨 고어와 IPCC에 주어진 노벨 평화상은 그러한 기여를 인정한 것이었다.
대강 이러한 내러티브를 따라 진행되는 위어트의 논의는 여러 음미해 볼 만한 지점들을 남겨주고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위어트가 책의 제목에서 사용하고 있는 '발견'이라는 용어를 한번 생각해 보자. 흔히 '과학적 발견'이라는 표현은 자연계에 있는 어떤 존재를 어느 특정한 과학자 내지 연구 그룹이 특정한 시점에 찾아낸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가령 1897년에 조지프 존 톰슨은 전자를 발견했고, 1930년에 클라이드 톰보는 명왕성을 발견했으며, 1953년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의 '발견'은 이러한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위어트의 서술을 따르더라도 지구 온난화 이론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적어도 세 단계―이론적 개념의 제시(19세기 말), 가능성의 확인(1950년대), 증거의 축적(1960년대 이후)―를 밟았고 그 속에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그렇다면 100년 넘게 걸린 이 과정에서 지구 온난화는 '언제' '누구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해야 할까? 과연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숱한 사회적 요인들의 개입 하에 진행된 과정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지구 온난화의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는 과학 활동의 모델에 대해 위어트가 갖고 있는 입장과도 연결된다. 위어트는 과학에서 가설을 제안하고 실험을 해서 이를 입증 내지 반증해 이론을 도출하거나, 특정한 패러다임(이론)에 집착하면서 과학 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에 들어맞지 않는 증거들은 배척하는 모델 그 어느 쪽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어트가 생각하는 과학 활동의 모델은 다양한 분야에 속한 과학자들이 중심으로 삼는 이론적 틀 없이 새로운 과학적 증거들에 대해 그것을 당장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회의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이를 서서히 서로 연결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가깝다. 그는 지구 온난화 같은 학제적 분야의 역사로부터 이러한 모델을 이끌어 냈지만, 이러한 모습이 지구 물리학뿐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과학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위어트가 여러 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발견'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데는 이러한 입장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위어트의 입장에 동의하는가와는 별개로, 물리학과 같은 실험실 과학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해 온 주류 과학철학의 흐름에 대해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기한다.
또 하나 지적할 대목은 과학과 대중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환경 운동의 성장에서 비롯된 과학자와 대중의 관점의 흥미로운 상호 작용을 보여주기도 하고, 곳곳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중 여론 조사의 결과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책 후반부(7~9장)에서 지구 온난화의 정치를 다루면서도 이 문제에 대한 대중의 태도에 그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지구 온난화의 실체에 대해 과학계 내에서 대강의 합의가 이뤄지고 논의의 장이 과학에서 정치로 넘어간 현재의 상황을 감안하면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전 지구적 규제와 행동에 언제, 어느 수준에서 나설 것인지는 단지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지구 온난화는 과학자들이 '권력 앞에 진실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지점으로 접어들었다. 대중을 신뢰하고 또 의지하지 않고 배제한 채로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정치권에 곧바로 영향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부딪치고 때로는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 2009년에 과학계를 뒤흔든 이른바 '기후 게이트(Climategate)' 사건은 이러한 전략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한국어판 제목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 온난화의 발견'이라는 원제목을 버리고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이라는 제목을 만들어 붙인 데는 후자가 전자보다 독자의 호기심을 더 잡아끄는 매력적인 제목이라는 출판사의 판단이 작용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이중의 의미에서 실패라는 게 내 생각이다.
우선 제목이 책의 내용이나 저자의 입장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겉돈다는 점에서 문제다. 제목만 보고 책 속에서 '대논쟁'을 열심히 찾아 헤맸을 일부 독자들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출판사의 의중에 비춰 보더라도 이 제목이 그리 매력적인 것이 못 된다는 데 있다.
내가 판단컨대, 한국어판 제목만 본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이 지구 온난화를 뒷받침하는(혹은 이를 부인하는) 증거들을 열거하고 그에 대한 반론에 답하는, 이미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 그렇고 그런 책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제목에 속아서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고, 그런 점에서 책의 판매고를 늘리는 데도 별로 도움이 못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주제와 관련해 한국의 도서 시장에서 좀 더 참신한 제목은 오히려 원제목인 '지구 온난화의 발견'이 아니었을까? 눈이 밝은 독자들이 그릇된 인상을 주기 십상인 책 제목에 속지 말고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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