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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의 저주! 김일성에 홀린 진보, 박정희에 갇힌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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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56의 저주! 김일성에 홀린 진보, 박정희에 갇힌 보수!

[장석준의 '적록 서재'] 루쉰의 후예, 첸리췬의 목소리

지난 몇 달간 중국이 온통 보시라이로 시끄러웠다. 이른바 '충칭 모델'로 주목받던 보시라이 충칭 시 당서기를 둘러싸고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 기간 중에 공산당 내에서 지지와 규탄의 격론이 오갔다. 하지만 보시라이 자신과 그의 가족의 비리가 공개되면서 그는 이제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다.

한때 보시라이 배후의 태자당(시진핑), 상하이방(장쩌민)과 그를 탄핵한 주역인 공청단(후진타오)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이 사태의 본질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심지어 둘 사이의 무력 충돌이 임박했다는 유언비어가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과장된 억측이었다.

상황은 당 내 모든 세력이 보시라이 한 사람을 부패분자로 단죄하는 데 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다. 부패와 치정, 음모로 얼룩진 이 보시라이 드라마가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이 드라마를 통해 드러난 중국 사회의 이념적 혼란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중국의 얼굴은 그야말로 거대한 카오스다.

위에 언급한 중국 공산당 내 파벌 중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체제 전환에 앞장선 것은 상하이방-태자당이었다. 현재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는 이들과 경쟁하는 당 내 공청단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재 집권 세력은 상하이방-태자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장 자유주의화의 부작용에 주목했고, 그래서 '조화 사회 건설' 등 국가 자본주의적 재분배 정책을 강조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렇게만 보면, 상하이방-태자당은 시장 자유주의 세력이고, 공청단은 사회민주주의적 분파인 것만 같다. 실제로 중국 지식인들 중 '신좌파'라는 불리는 반신자유주의 흐름의 상당수가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를 지지하며 이에 적극 참여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보시라이는 공청단 세력보다 더 강한 어조로 중국 사회의 양극화를 비판하며 재분배 정책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혁명 가요 부르기 운동을 제창하며 마오쩌둥의 기억들을 환기시켰다. 그러자 신좌파 중에서도 좀 더 급진적인 흐름, 즉 마오주의의 부활을 주창하는 이들이 보시라이와 '충칭 모델'을 찬양하고 나섰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보시라이는 혁명 1세대 보이파의 아들로서, 태자당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좌파'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공산당 내에서 상대적 '좌파'로 분류되던 후진타오-원자바오 세력이 바로 이 보시라이를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그간 당 안에서 민주화 확대를 고집스레 주장해온 원자바오가 문화 대혁명의 오류까지 들먹이며 보시라이 노선을 신랄히 비판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누가 개혁파이고 누가 보수파인가? 누가 자유주의에 더 가깝고 누가 사회주의의 원칙에 더 충실한가? 누가 우파이고 누가 좌파인가?

현재 중국 사회의 '좌파'라면, 도대체 누구를 들어야 하는가? 민주화를 부단히 강조하는 원자바오의 지지자들인가, 아니면 '조화 사회' 구호를 내건 공청단 세력과 그 협력자들인가, 그도 아니면 '충칭 모델'에 열광하는 이들인가?

첸리췬 : 자유주의자도, 신좌파도 아닌

▲ 첸리췬. ⓒarchive.igreenbee.net
최근 국내에 두 권의 저서가 동시에 번역돼 나온 중국의 노(老) 지식인이 있다(1939년생). 베이징 대학 교수이며 루쉰 연구자 첸리췬(錢理群)이 그 사람이다.

글항아리가 그의 지적 자기 성찰의 기록인 <내 정신의 자서전(我的精神自傳)>(2007년, 김영문 옮김)을 냈고, 그린비가 800쪽 분량의 대작 <망각을 거부하라 : 1957년학 연구 기록(拒絶遺忘)>(2007년, 길정행·신동순·안영은 옮김)을 펴냈다.

첸리췬은 중국에서 무엇보다도 루쉰 연구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두 책도 그러하거니와 그의 명성이 루쉰 연구에 제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영원한 사표 루쉰처럼 보편적 지식인(인텔리겐치아의 원래 의미에 부합하는)의 위상을 점하고 있다. 후배 루쉰 연구자 왕후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색과 글쓰기는 문학, 철학, 역사, 사회과학의 좁은 틀을 뛰어넘는다.

첸리췬이라는 이름이 국내에서 처음 주목 받게 된 것도 현대 중국 문학 연구라는 전공 분야를 뛰어넘는 계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중국 지성계를 양분한 자유주의-신좌파 논쟁이었다. 통상 이 논쟁은 중국의 시장 자유주의화를 긍정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이에 비판적인 신좌파 진영 사이의 대결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를 교란하는 사람이 바로 첸리췬이다.

얼핏 보면 첸리췬은 신좌파의 일부인 것 같다. 자본주의 복귀를 반대하고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성취를 계승, 발전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중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신좌파와 크게 다르다. 신좌파 중 상당수가 마오쩌둥 사상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무기를 찾고 공산당 일당 체제를 긍정하는 데 반해 그는 이것들을 또 다른 극복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첸리췬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신좌파들에게도 거리를 둔다. <내 정신의 자서전>의 다음 대목은 그의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나는 민주와 자유를 추구한다. 따라서 강권 통치에 대한 대다수 자유주의자의 비판과 민주를 쟁취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 인사가 갖고 있는 엘리트 의식 및 목하 나날이 엘리트화되어 가고 있는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권력 구조의 애매한 관계에 대해서도 고도의 경계심을 갖는다.

나는 평등을 지향한다. 따라서 '신좌파' 대다수가 갖고 있는 평민 의식과 사회적 약자의 권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옹호 태도 그리고 중국 사회의 관료 자본주의화 경향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 공감한다. 그러나 강권 통치 비판과 민주 쟁취에 소극적인 그들 중 일부 사람의 태도나,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무비판적 긍정을 일삼는 일부 사람의 태도, 그리고 이로 인해 강권 체제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고도의 경계심을 갖고 있다." (<내 정신의 자서전>, 242~243)

▲ <내 정신의 자서전>(첸리췬 지음,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보통 이런 입장만큼 욕을 많이 먹는 것도 달리 없다. 첸리췬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어느 한 진영에 속하면 반대 진영으로부터만 욕을 먹으면 되지만, 양편 모두를 비판한다면 두 진영 모두로부터 욕을 먹게 된다. 좌파의 대의에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그 좌파의 미숙함을 사정없이 비판했던 루쉰이 그랬었다. 그리고 지금은 루쉰의 정신적 계승자 첸리췬이 이 숙명을 달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다. 중국의 이념적 카오스 상태에서 첸리췬의 외로운 입장은 오히려 보기 드문 확실한 좌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좌파 지식인들이 혹자는 공산당 관료들 중 공청단 분파와 동맹을 맺고 혹자는 보시라이의 선동 정치에 판돈을 걸면서 당 관료들의 선전 문구 인플레이션 속에 표류하는 것에 비하면 분명 그렇다.

첸리췬은 자신의 사회주의 이상을 애초부터 그러한 공산당 관료 정치 바깥에 붙들어 맨다. 그는 외롭지만, 흔들릴 이유 또한 없다. <내 정신의 자서전>은 이런 고독하지만 강인한 정신의 울림으로 가득하다.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우리는 첸리췬의 사색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고 충분히 감동받게 된다.

그러나 <망각을 거부하라>를 함께 읽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아직 빈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망각을 거부하라>를 통해서 우리는 첸리췬 사유의 뿌리를 발견하게 되며, 그것이 한 고고한 지식인의 예외적인 포즈가 아니라 중국 사회주의의 면면한 한 저류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1957년, 그때 모든 게 시작되었다!

1956년 현실 사회주의권에 대지진이 일었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 마지막 날, 당시 당서기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비밀 발표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죄상에 대한 보고서 때문이었다(<개인 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 지음, 박상철 옮김, 책세상 펴냄)).

미국을 거쳐 현실 사회주의권 인민들에게 알려지고 만 이 폭로 내용은 스탈린 개인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폴란드, 헝가리에서는 이러한 각성이 인민 혁명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흐루시초프의 폭로에 대한 마오쩌둥의 첫 반응은 양가적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하나는 그가 내막을 드러냈다, 다른 하나는 그가 분란을 초래했다." (<망각을 거부하라>, 198쪽)

"내막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간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이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님이 드러났다는 의미였다. 즉, 마오쩌둥은 1956년의 충격을 처음에는 중국 공산당이 스탈린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곧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방침으로 나타났다. 혁명 이후 처음으로 당이 직접 나서서 언론의 자유를 강조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유례없는 자유화 조치였다.

그러자 그 동안 공산당에 억눌려 있던 민주당파(중국 혁명에 동참한 중도 좌우파 정당들) 지도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안에서도 학생, 지식인 당원들이 혁명 이후에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는 노동자, 농민의 현실을 고발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민주적 비판에 힘입어 관료 체제를 개혁하려는 것이 마오쩌둥의 의도라고 믿었다.

그러나 해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7년 5월 19일, 베이징 대학에 학생들의 대자보가 나붙으면서 마치 1919년 5·4 운동을 연상시키는 학생 민주 운동이 폭발했다. 마오쩌둥은 즉각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이 운동을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우파'의 난동이라고 규정하며 반우파 투쟁을 지시했다. 5·19 운동 참여자들을 비롯해 백화제방 방침에 동조했던 수많은 이들이 '우파'로 낙인찍혀 죽거나 핍박받는 신세가 되었다.

첸리췬은 바로 이 1957년의 전환이야말로 현대 중국 지배 체제의 시작이라고 본다. 1957년의 반우파 투쟁은 공산당 정권의 비판자들을 '계급의 적'으로 낙인찍고 군중을 동원해 공격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이러한 마오주의의 독특한 정치 투쟁 방식은 대약진 운동으로, 문화 대혁명으로 더욱 확대 반복되었다. 첸리췬은 이를 '군중 전제 정치'라 규정한다.

이런 시각은 신좌파의 마오주의 평가와 극명히 대비된다. 신좌파 일부는 마오쩌둥의 군중 노선이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대(大)민주'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 참여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는 서구 신좌파의 이상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첸리췬의 입장에서 이것은 위험한 역사 오독일 뿐이다. 이러한 오독이, 가령, 보시라이식의 '마오주의 부활' 선동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을 낳게 된다. 첸리췬이 보기에 진정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을 담지했던 것은 오히려 마오쩌둥이 '우파'라고 비판한 이들, 특히 베이징 대학 5·19 운동의 주역들이다.

이 점에서 첸리췬에게 1957년을 되돌아보는 것('1957년학')은 현재 중국 카오스 상태의 발단을 찾아내는 일일뿐만 아니라 이러한 혼돈을 헤쳐 갈 좌표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즉, 1957년학은 역사가 굴절된 그 순간으로 돌아가 '패배한', 그러니까 '아직 승리하지 못한' 희망을 발굴해내는 작업이다.

800여 쪽의 이 두꺼운 책 곳곳에서 우리는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과 조우하게 된다. 20대 젊은 나이에 자유의 함성을 외치고 나서 그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수십 년의 고초를 당하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 그래서 이 책은 학술서이면서 그것 이상이다. 웅장한 대서사시다. 그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불굴의 여성 투사 린시링이 있다.

베이징 대학 학생이었던 린시링은 누구보다 먼저 흐루시초프 보고서를 탐독했다. 린시링은 흐루시초프의 폭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녀는 스탈린의 과오들이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의 핵심은 사회주의 공유제와 반드시 함께 해야 할 사회주의 민주제의 결핍이었다.

불행히도 혁명 이후 중국 사회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린시링은 당대 중국 사회가 민주주의의 토대 없이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를 이식한 '봉건 사회주의'라고 규정했다. 5·19 민주 운동이 한창이던 5월 23일에 린시링은 이러한 자신의 잠정 결론을 강연으로 토해냈다. 청중 중에는 당시 18살이었던 저자 첸리췬도 있었다.

린시링의 강연은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파란을 일으켰고, 그녀는 곧바로 '대(大)우파'로 지목되었다. 덩샤오핑 시기에 많은 '우파' 인사들이 복권되는 와중에도 그녀는 끝내 구제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린시링의 비판 정신을 무릎 꿇게 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우파'의 대표임을 자부했다. 나중에 타이완으로 간 뒤에도 린시링은 그곳에서 이번에는 국민당 반공 독재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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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을 거부하라>(첸리췬 지음, 길정행·신동순·안영은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흥미로운 것은 1957년 '우파'의 문제의식이 문화 대혁명 시기 이단적 급진파의 사상과 이어진다는 점이다. 문화 대혁명의 이단파들은 마오쩌둥이나 4인방의 애초 의도와 상관없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비타협적으로 발전시켜나가려 했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좌/우' 구분으로부터 벗어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문화 대혁명 이단파의 이러한 이상이 '우파'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요구를 이어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망각을 거부하라>에서 첸리췬은 이러한 이단적 계보를 공산당의 관변 이데올로기와 구분되는 '민간' 사회주의 운동으로 규정한다. 관변 이데올로기에서는 지금까지도 군중 전제 정치 혹은 관료 독재가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반면 민간 사조는 끊임없이 이러한 전체주의와 자본주의 모두의 극복을 제기하며 싸워왔다.

첸리췬은 바로 이 민간 사조에 자신의 사색과 실천의 닻을 내린다. 중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이념 진영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으며 자신만의 중심을 견지하는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는 결코 그의 단독 행동이 아닌 것이다. 당 관료들의 말과 행동으로는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민간'의 도도한 역사적 흐름이 그의 두 다리를 떠받치고 있다.

마르크스와 루쉰의 깃발 : 개인 정신의 자유 추구

사실 첸리췬의 강인한 사색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가 '민간' 사조에서 사유의 광맥을 발굴해내 재해석하는 데는 등불이 필요했다. 그 등불 중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다. 동유럽 반체제 좌파들이 스탈린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첸리췬도 다름 아닌 마르크스의 사상으로부터 마오주의를 넘어설 무기를 찾았다.

"마르크스주의가 진정으로 나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문화 대혁명 후기였다. 무정한 현실은 우리의 수많은 환상을 부수어버렸고 우리는 새로운 출구를 모색해야 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깃발 아래서 흔들어대던 그 작은 책자(마오쩌둥 선집)를 내던져버리고 직접 마르크스주의 원전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사상 발전 과정에서 거의 결정적인 한 걸음이라고 할만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주입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마르크스의 학설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정신의 자서전>, 235~236쪽)

마르크스의 사상 중 도대체 어떤 내용이 마오주의 극복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일까? 그것은 "계급과 계급 대립이 존재하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체"하는 "협동체"에서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된다"는 <공산당 선언>의 언급이었다.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것의 전제라는 이 언급은 사회주의의 근본이 사회적 개인의 해방에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사회주의는 마오주의나 주체 사상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모종의 집단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관계들의 혁파이자 재구성 과정이다.

바로 이 점에서 첸리췬을 비롯한 현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또 다른 등불 역할을 한 것이 루쉰의 사상이다. 루쉰은 동시대 다른 계몽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나라 세우기(立國)'를 당면 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참인간 세우기(立人)'를 강조했다. 루쉰은 '참인간 세우기'의 관점에서 '나라 세우기'의 과제마저 끊임없는 자기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첸리췬은 루쉰의 이러한 철저한 비판 정신, 영구 혁명의 사상을 한 마디로 "개체의 정신 자유 추구"라고 요약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르크스, 엥겔스가 제시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의 중국적 표현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개체의 정신 자유"라는 견지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그것의 불굴의 양심의 소리가 된 위대한 선배 한 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분 역시 중국 혁명의 당당한 한 주역이면서 1957년 체제에 의해 '우파'로 지목돼 수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는 바로 작고한 작가 김학철(1916~2001년)이다.

김학철은 1941년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팔로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우다 다리 하나를 잃은 혁명 투사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 들어선 김일성 체제와 화합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제2의 망명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이 제2의 조국에서 다시 마오쩌둥의 독재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는 말년에 "오직 김 부자를 차우셰스쿠 부부에게로 보내버리는 것만이 유일 정확한 방안이라고 나 이 80세의 노독립군은 확신을 하고 있는 터"(<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 : 김학철 자서전>(김학철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410쪽)라고 단언할 정도로 북한의 세습 독재를 증오했다. 하지만 첸리췬이 주목한 1957년의 '우파'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분노의 출발점은 청년 시절부터 그의 굳센 신념이었던 사회주의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1975년 문화 대혁명의 대단원과 겹쳐 진행된 '반혁명 현행범' 공판에서 그가 선고 즉시 외치기로 다짐한 구호는 이런 것이었다.

"마르크스 만세! 엥겔스 만세! 레닌 만세! 팽덕회(마오에게 '우파'의 거두로 단죄당한 중국 혁명 지도자) 만세!" (<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 386쪽)

루쉰으로부터 1957년의 '우파', 문화 대혁명의 이단파로 이어져 첸리췬이 대변하는 계보,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는 김학철로 상징되는 계보…. 이러한 정신의 줄기는 현재 동아시아 역사 무대에서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이것은 혹시 언젠가 폭발을 기다리는 지표면 저 밑의 마그마와 같은 것은 아닐까?

노년의 첸리췬이 왕성한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은 분명 이 물음에 답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되고 있다는 그의 또 다른 역작, 혁명 이후의 중국 역사를 총괄 성찰한 <마오쩌둥 시대와 포스트 마오쩌둥 시대 : 또 하나의 역사 서사>가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1956년'

서평을 마치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중국의 '1957년학'과 같은 작업이 한반도 역사에 대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1956년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뜻밖에도,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사색을 담은 거의 유일한 저작은 최인훈의 <화두>(전2권, 문학과지성사 펴냄)이다.)

1956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대지진은 한반도도 비껴가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 일파 중심 체제도 크게 흔들렸다. 이후 유일 체제로 발전하게 될 역사적 경로 이외의 가능성을 대변하는 세력들이 이때 마지막으로 총궐기했다. 북한 역사는 이 궐기를 '8월 종파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반김일성파는 중국의 1957년 '우파'들이 주장한 것과 거의 비슷한 비판을 제기했다. 하지만 연안파를 중심으로 한 이 최후의 대규모 반김일성파는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옥중의 박헌영에 대한 사형 집행도 결정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김일성 일파는 주체 사상을 제창하기 시작했고, 당 안팎의 자기비판 가능성이 전면 봉쇄되었다. 어쩌면 이를 계기로 이후 3대 세습 독재로 나아가게 될 역사 경로가 돌이킬 수 없게 확정되어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1956년은 한반도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며, 우리가 북한의 현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다시 돌아가 따져보아야 할 원점이다.

안타깝게도, 중국에 '1957년학'을 용기 있게 추진하는 첸리췬 같은 지성이 그나마 존재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물론 <망각을 거부하라>는 결국 본토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홍콩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지만), 지금의 북한 사회에서 이런 비판 작업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북한에는 그럴 시민 사회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망명객 황장엽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1956년'의 가해자 중 한 명으로서 주체사상에 대한 자기변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정도로 북한의 '1956년'은 중국의 '1957년'보다 더욱 혹독했다.

하지만 북한 바깥에서라도 이런 작업은 추진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중국의 '1957년학'이나 한반도의 '1956년학'의 성과가 북한 인민들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해방 직전의 이 무거운 전사(前史)를 극복해가야만 하는 공동 운명체의 동아시아인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첸리췬의 좌우명을 소개하며 끝맺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성싶다. 그 지극히 루쉰적인 문장은 이렇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노력한다. 우리는 이처럼 서로서로 부축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내 자신의 자서전>, 274쪽)

아, 정말,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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