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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죽음의 대통령'! 박근혜, 문재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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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죽음의 대통령'! 박근혜, 문재인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진짜 이유는…

이렇게 '쌔끈한' 책이 제대로 관심을 받고 있지 못하다니, 과연 올해가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선거의 해'가 맞나 싶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 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이희재 옮김, 교양인 펴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 따르면, 보수가 집권할 때에는 살인 및 자살 사건의 발생률이 증가한다. 미국의 실정을 놓고 보면, 공화당 집권기에는 살인 및 자살 사건이 증가했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 그 흐름이 뒤집혔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정권 교체는 단지 생활이나 삶의 차원을 넘어 건강과 생명에까지 직결된다. 보수 정당은 보수적인 정책을 펴는데, 그것은 단지 국가 안보와 기업의 자유를 조금 더 보장하는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 직업이 필요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냄으로써 그들의 존중받고 싶은 욕구를 짓밟고 도리어 범죄 발생률을 높인다. 그렇게 불안해진 치안을 들먹이며 '시혜적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대신 경찰, 군대 등에 힘을 실어준다.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경범죄는 엄단하면서 기업가들의 탈세, 비리, 횡령은 너그럽게 넘어간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길리건이 말하는 바, '폭력 치사(살인과 자살을 하나로 묶은 개념)'의 발생률은 특히 실업률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된 사람들은 단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존중감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자살이나 살인 같은 파괴적인 행위에 쉽게 빠져든다.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피해 의식을 늘 안고 사는 실업자들, 특히 남성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면 싸움을 걸고 총을 꺼낸다. 가장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부인이 "도대체 당신 왜 그 모양이야? 얼마나 못났으면 그런 짓을 하냐고?" 하며 쏘아붙이자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어 아이와 자식들을 쏘아죽인 '폴'이라는 남자의 사례는 결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닌 것이다.

▲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교양인 펴냄). ⓒ교양인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불평등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널리 알려지고 수용되어 있는 사실이다. 영국의 경우 직급이 낮은 공무원은 고위 공직자에 비해 사망률이 세 배나 높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더 많이 분비되고, 그 효과로 혈액이 더 잘 응고됨으로써 심장에 무리를 주기 때문이다. 비단 코르티솔의 분비로 인한 심장 질환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 만연한 여러 질병의 발병률은 환자가 소속된 집단 내에서 얼마나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인간적 유대를 맺고 있는지 여부와 의학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불평등과 건강의 관계를 평생 연구해온 영국의 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리처드 윌킨슨에 따르면, 부자와 빈자의 평균 수명 차이는 그들이 의사에게 갈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의료 접근권의 불평등을 논하기에 앞서 애초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의사를 만날 일이 많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가령 영국의 경우, NHS(National Health Service)로 인해 저소득층이 부자보다 의사를 더 자주 만나고 진료를 받는다.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더 쉽게, 더 많이 병에 걸리는 것이다.

윌킨슨의 <평등해야 건강하다>(김홍수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와 <평등이 답이다>(전재용 옮김, 이후 펴냄)는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의 '강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다양한 역학 조사 및 동물 실험 결과를 토대로, 불평등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위쪽'에 계시는 분들의 건강에도 이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평등 지수가 높은 나라의 평균 수명은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짧다. 평등한 사회를 이룰수록 우리는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평등을 추구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두 저자의 입장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비록 우리가 길리건의 책 표지에서 윌킨슨의 추천사를 읽을 수 있긴 하지만, 두 저자가 서로의 연구를 상호 참조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 가능하지만, 그들이 방점을 찍는 위치는 결코 같지 않다.

길리건은 왜 하필 의회 다수당이 아니라 대통령의 당적이 중요한가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미국 역시 권력이 대통령에게로 집중된 나라다. 동시에, 그 대통령 개인의 성격이나 특징보다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세력의 성격과 지향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미국의 20세기를 돌이켜보면 몇몇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통령의 당적에 따라 폭력 치사율이 오르내렸다.

그러므로 정권을 바꾸는 것 그리고 어떤 정책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이 중요해진다. 길리건은 "실업이라는 전염병과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전염병을 종식시키는 것이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종식시키는 데 필요조건이며 동시에 충분조건"(206쪽)이라는 주장과 함께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증거에 기반을 둔 의학을 요구하는 지금, 이제는 증거에 기반을 둔 정치를 누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224쪽)

공화당 정부의 다양한 정책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신뢰를 파괴한다고 주장하는 길리건과 달리, 윌킨슨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의도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훼손시키고, 신뢰를 감소시키며, 공동체 생활에 대한 참여를 줄이고, 폭력을 증가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소득 격차 심화가 이와 같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오게 된 이유는 (…) 소득 격차의 심화가 인과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질을 악화시키기 때문"(<평등해야 건강하다>, 228쪽)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회의 에토스(ethos)나 사회적 관계에서 시작된 변화가 다소 평등주의적인 재정 정책을 표방하는 정당과 지도자의 선출로 나아갈 수"(<평등해야 건강하다>, 228쪽)도 있지만, 길리건과 달리 윌킨슨에게 그것은 평등한 건강권을 누리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는 최신작인 <평등이 답이다>에서 "결국 우리가 고용되어 일하는 경제 제도가 소득 불평등의 주 원인"(309쪽)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길리건이 강조하는 실업률은 소득 불평등의 주된 원인이므로 그가 이 지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권 교체에 무게를 두는 길리건과 달리 윌킨슨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 내릴 수 있는 방법, 새로 들어설 정부의 변덕에 덜 휘둘리면서 더 큰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317쪽)"을 모색한다.

민주적인 종업원 지주제와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통해 주체성과 유대감을 강화하는 것이 윌킨슨의 해답이다. "종업원 지주제가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과 함께 운영될 경우 경제적 이득이 늘어난다는 주장은 각종 대규모 연구와 통제 실험을 통해 증명된 바 있"(318쪽)다.

실제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칼자이스, 유나이티드에어라인, 고어텍스, 폴라로이드 등 유명 기업들이 100퍼센트 종업원 소유 하에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기업에서는 지금처럼 천문학적인 액수의 CEO 연봉이나 보너스가 지급될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적어도 '중성자탄 웰치'처럼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고 보너스를 받는 최고경영자가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참여하고 가꿔나가는 일터에서 동료들과 평등한 유대감을 느끼며 노동자들은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

사실 두 사람의 논의는 결론적으로 일치하지만 각론에서는 종종 불일치하고, 더러 상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길리건의 연구는 타인에 대한 폭력인 살인과 자신에 대한 폭력인 자살을 하나의 범주로 묶었다는 점에서 신선한 통찰을 던진다. 속이 터져나갈 것 같을 때,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네 놈은 죽이고 죽어야겠다 싶은 그런 심정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폭력 치사'라는 개념이 여태까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게 보일 지경이다. 길리건의 책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하지만 윌킨슨에 따르면 '폭력 치사'라는 개념은 지나친 비약일 수밖에 없다. "사망 원인을 국제적으로 비교"해보면 "놀랍게도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수록 사망 원인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낮게 나타"난다는 것, 즉 "자살과 폭력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평등해야 건강하다>, 192쪽)는 것이 윌킨슨의 관찰이기 때문이다. 폭력 치사의 총량이 늘어나고 있을 때, 정작 그 속의 자살은 줄어든다면, 자살과 살인이 동일한 원인에 의해 증가한다는 주장은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자살이 줄어들지만 타살이 폭증하기 때문에 총량이 늘어나고 있다는 해석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방법론적인, 개념적인 불일치가 두 저자의 문제의식의 동일성을 가리고 있지는 않다. 직장, 가족, 친척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격적 멸시를 당할 때, 직장을 잃거나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하여 소득 격차를 실감하게 될 때, '내가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겠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서평을 읽고 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평등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물론 그것을 학문적으로 구체화하고 입증하는 과정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건강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로부터 어떤 공통의 의지를 이끌어내느냐의 문제에 더욱 가깝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자. 길리건은 정치의 변화를 통한 제도적 개선을 꾀한다. 윌킨슨은 정치적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더 근본적인 제도적 개혁을 촉구한다. 그러나 양자 모두, 어쨌건 이른바 '국익' 따위보다는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이 중요하다는 기본적 인식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다.

2012년 대한민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중산층에서 빈민으로 전락할 우려에 처한 자영업자들이 망루를 쌓고 올라가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칠 때, 한국의 정치인들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소득 불평등의 위기와 그로 인한 폭력 치사의 극단적인 사례로 우리는 용산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줄줄이 자살하거나 목숨을 잃는 현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 해고에 맞서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랐을 때, 한국의 정치인과 대중들은 단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 따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라는 것을 말로는 부끄러워하지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그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현재 진행형인 제주도 강정 마을의 구럼비 바위 폭파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강정 마을은 해군 기지 건설이 결정된 순간부터 둘로 갈라졌고 주민들 사이에는 지울 수 없는 반목의 골이 새겨졌다. 이와 같이 공동체가 파괴될 경우 사망률은 급증하고 구성원들의 건강 지수도 폭락한다.

미국에서 이례적으로 사망률이 낮은 '건강 마을'이었던 로제토의 경우도 그랬다. 한때 놀라울 정도로 건강했던 그 마을은 평등주의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소득 격차가 벌어지면서 미국의 여느 소도시와 다를 바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강정 마을의 경우,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가 길리건의 말처럼 정권 교체에 희망을 걸 수 있을까? 박근혜는 한나라당, 아니 새누리당이므로 논외로 하자. 가장 강력한 야권 후보인 문재인이라면 국민 건강권 차원에서 강정 마을 공사를 재검토하거나, 쌍용자동차 및 기타 정리 해고자들의 재취업을 알선하고 심리적인 치료 프로그램을 보장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정말로 문재인에게 소득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제도적 모색을 기대할 수 있는가? 민주당 대통령이었지만 지미 카터(1977~1981년)가 집권하고 있을 때 폭력 치사 발생률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무늬만 민주당'이었기 때문이다. 자살률이 폭등하여 OECD 1위에 등극하게 된 이른바 '민주 정부' 10여 년간을 돌이켜볼 때, 그 추세가 이번에 반전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

희망을 품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절박한 외침은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 서평의 발행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쌍용자동차 해직자 이 아무개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스물두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구럼비 바위가 터져나갈 때 마을 공동체도 함께 발파된다는 것을, 그로 인해 주민들의 기대 수명이 뚝뚝 깎여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면서도 이성적으로 부인한다. 그 공사를 강행하는 업체 중 하나인 삼성물산에는, 민주적인 종업원 지주제는 고사하고 노동조합조차 없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나라에서 다가올 100세 시대를 걱정하고 건강 보조 식품을 챙겨 먹는다. 우리는 갈가리 찢어진 채, 불평등하게 죽어가고 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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