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농담과 함께 술잔을 나누던 우리는 이내 취했고, 2차를 갔으며, 다시 3차를 갔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8090'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작은 바. 나는 조금 놀랐다. 한때 유행했던 '7080'에 이어 '우리' 또한 어느덧 네 자리 숫자로 호명되는 추억 장사의 고객님이 되었으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하긴, 썩 어울리는 장소이긴 했다. 그날 우리의 안주는 우리가 함께 보냈던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과 기억 그리고 기억뿐이었으니까. 너무 빨리 쉬어버린 김치처럼 너무 쉬이 추억이 되어버린 어떤 시간들. 몇 가지 사이드 메뉴가 있긴 했다. 부동산과 주식과 갑갑한 직장 생활과 도무지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는 가계에 대한 이야기들. 말하자면 '현실' 같은 것. 그건 제법 씁쓸한 맛이었다.
씁쓸함의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현실이란 대개 씁쓸하게 마련이고, 그것을 살아내며 어느새 변해버린 서로를 바라보는 일 또한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1990년대 유행했던 후일담 문학의 기본 정조이기도 하다. 한때 당신과 나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상을 꿈꾸었지만 불은 꺼졌고 이상은 깨졌으며 우리 모두 꿈에서 깨어난 지금 남은 것은 진탕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처럼 깨질 것 같은 머리와 텁텁한 뒷맛뿐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나날들이라는 비관 또한.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다. 실은 할 수도 없다. 누구도 불꽃처럼 타오르진 않았으니까. 꿈을 꾸지도 않았으니까. 커다란 이상이 사라진 시대에서 우리는, 언제나 코앞에 닥쳐오는 현실, 현실, 현실을 살아낼 뿐이었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지극히 개인적인) 현실들에 대한 일종의 '픽션'인 동시에 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한겨레출판 펴냄)에 대한 서평이 될 예정이다.
뭐, 계획은 그렇다는 말이다.
현실 하나. 2001년 12월, <당신들의 대한민국>
스물두 살의 K는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다. 그 나이 또래의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그 또한 고민 중이다. 바로 군 입대. 동기들은 대부분 군대에 갔거나 곧 갈 예정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있다. 적어도, 누군가 그에게 해주길 바라는 일이 있다.
K의 한 학번 선배이자 학생회장인 Y가 술국에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K에게 말한다. 다음 학생회를 이끌어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콕 집어 네가 필요하다고.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K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는다. 듣기만 한다. 학창 시절에 그 흔한 반장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어느 순간 어떤 공명심의 치기가, 정체 모를 의무감이 그를 자극한다. 살면서 누군가 그를 그렇게 원했던 적이 있던가? Y의 호명에 응답할 의무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설마, 그는 생각한다. 형, 생각해 볼게요. 술국에 고기가 채 바닥나기도 전에 그는 자리를 뜬다.
사실 그에게는 처음부터 그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라우초 막스의 농담. "나는 나 같은 인간을 멤버로 받아주는 클럽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다.") 애당초 멋모르던 신입생 시절 붙잡고 술을 따라주던 선배들과의 친분으로 이어진 활동이다. 술 먹고 서로 싸우는 일을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렇다고 술만 마신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과나 단과대 차원의 사업, 혹은 등록금이나 주한 미군과 관련한 이런저런 시위에 곧잘 참석하기도 했다. 자신이 맡게 된 하부 조직에 '(미제에 심장에 박아버린다) 쇠말뚝' 같은 몰취향한 이름을 지어놓고 낄낄대기도 했겠지, 아마.
그렇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분명 선배들이 내세우는 당위는 그 자체로는 옳은 것처럼 보였다. 한국 사회에는 많은 모순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논리에도 모순은 있었다. 그들의 태도 또한. 곤란한 질문에는 대개 대답을 얼버무렸으며 때론 윽박질렀고 종내 모두 술에 취해 소리 높여 민중가요를 합창하는 일로 자리를 마무리하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별 생각이 없었거나,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공허한 당위와 텅 빈 대의. 아무려나. K는 상명하달의 관료주의와 권위주의, 거기에 일종의 가족주의가 혼합된 특유의 조직 문화에 진절머리가 난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여름 농촌 봉사 활동에서 불거졌던, 한 여자 동기를 둘러싼 Y와의 삼각관계가 있었다. 대저 피 끓는 청춘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 <당신들의 대한민국 1>(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
이제 현실이 등장할 차례다. 병역이라는 '현실'을 거부할 용기도, 신념도 없던 K는 결국 1년 남짓 몸담고 있던 여성위원회를 떠나 입대를 해야 했고, 육군 훈련소에서 6주간의 군사 훈련을 마친 후 전경으로 차출된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도리 없지만, 2년 남짓한 군 생활 동안 K가 학생회나 여성위원회를, 하물며 박노자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여자 친구를, 혹은 Y를 선택했던 여자 동기를 생각했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현실 둘. 2009년 6월,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스물아홉의 K는 3년차 직장인이다. 책으로 모든 것을 배우려고 드는 못된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그는 한 인터넷 서점의 인문·사회 담당 MD로 일하고 있다. 이제 그의 관심사는 책이 아니라 매출이고, 박노자 또한 팔아야 할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몇 년 동안의 모범 회사원 노릇이 그에게 일종의 '한국식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내면화하게 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을.
①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본에 의해서만 의로워진다.
② 인간은 자본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에 의하여 기초가 부여된다.
③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별을 배제, 자본 앞에서의 평등-엄밀하게는 자본을 통한 것만이 권위를 갖는다.
K 앞에 펼쳐진 현실은 스물두 살의 그것과는, 물론 군대의 그것과도, 다른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지는 신간 도서들, 수없이 오가는 업무 메일들, 보고서들, 기획서들…이토록 넘쳐나는 활자 속에서 정작 그가 보는 것은, 아니 보아야 할 것은 숫자와 숫자, 그리고 숫자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가뜩이나 피곤한 직장인을 더욱 더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말하자면 많은 직장인들이 겪는 문제를 K 또한 겪고 있었던 셈이다. 굳이 늘어놓을 것도 없는, 당신도 나도 모두 이미 아는 이야기.
제대 후 일종의 부채감으로 유지하던 당적도 시끄러웠던 분당 사태 이후 끊어버렸다. 실망도, 분노도, 소위 말하는 환멸도 아니었다. 실은 별 관심 없었으니까. 다만 귀찮았던 것이리라. 대신 자동 이체만 시켜두면 별문제 없고, 마음 속 한구석에 존재하는 어떤 죄책감까지 덜어줄 수 있는 해외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K는 1년에 한 번씩 배달되는 후원 아동의 사진을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도 배웠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언가를 사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라는 사실쯤은 깨달은 지 오래였다.
K는 여전히 이런저런 책들을 읽지만, (자신의 담당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비평서는 읽지 않는다. "그래, 맞아, 그런 문제들이 있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도 어느 순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하고 내뱉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나 소수자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고작해야 한숨을 내쉬며 "그래, 그래, 사는 건 참 힘들지. 나 역시 살고 있고, 고로 나도 힘들다." 같은 소시오패스적인 삼단논법을 뇌까릴 뿐.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K 본인도 원치 않는 일이었고, 그러니 애당초 보지 않는 편이 편했다.
▲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
결국 적당한 질문을 찾지 못한 K는 자기 연민으로 가득한 질문지를 보낸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을.
"조금 바꿔 말하자면, 정체성을 소비를 통해 구현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예술 영화를 보고 고급스러운 전시회를 찾아다니듯, 흔히 어렵다고 여겨지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구입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는 목적이 더 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요?"
"스스로에게 위 질문을 던졌을 때 단숨에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분야 및 직업의 특성상 너무 오래 그런 책들을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일을 하기에는 사실 시간도 없고 피곤하다…는 그저 변명일 뿐인 변명을 하면서. 그렇다면 이 사회에 의문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하지만 생활을 위해 지금 갖고 있는 직업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되는 생활인으로서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돌아온 답은 친절했지만 K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책이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말하자면 너무 뻔한 모범답안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대답.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관심'이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실천'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지요. 진보적 NGO를 위해 약간의 금전적 기여를 한다든가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는 언론이나 그 언론에 광고를 내는 기업에 항의 전화 하나 건다든가… 작은 일 같지만 수천 명, 수만 명이 같이 하면 작은 일은 바로 큰 일이 됩니다. 그 '공동의 관심'의 영역이란 사라지면, 우리가 사회가 곧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관심'을 갖는 것은 바쁜 삶 속에서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K에게는 자신이 기여를 할 진보적 NGO를 찾아볼 여유도, 항의 전화를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삶은 이미 충분히 피곤하다고 판단한 것은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아마 그가 조금만 덜 피곤했더라면 웹상에 그의 인터뷰를 옮기는 대신, 당장이라도 답장 버튼을 눌러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니까 도무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니까요!"
말하자면 K는 출구 없는 회로의 덫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이건 차라리 무척 느린 자살에 가까우니까. 그렇다고 이 모든 일을 당장 그만 둘 수는 없다. 지금 당장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것이 바로 K가 '만들어 낸' 현실이었다.
현실 셋. 2012년 2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서른둘의 K는 2년차 프리랜서다. 좋게 말해 그렇다는 거다. 실상은 이런저런 매체에 서평을 파는 비주류 자유기고가일 뿐이다.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다행히 아직 죽지는 않았다. 스물아홉의 현실 중에서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피곤함은 상당 부분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 글쎄, 언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피곤함과 함께 다음과 같은 소원도 일어났다. 실컷 늦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소원 말이다. 나는 그러한 소원을 수천 번도 더 빌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 소원은 정말로 실현되었다. 그것은 일정한 지위와 안정된 봉급을 받고 싶다는 희망이 번번이 좌절되었을 때에 일어났다. 바로 그때 나의 옛 소원이 실현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윤미애 옮김, 길 펴냄), 59쪽)
K의 앞에 닥친 현실은 이제 이런 모습이다. 써야할 원고와 읽어야 할 책과 언제나 제자리인 한국어 구사 능력과 때마다 돌아오는 각종 공과금과 항상 모자란 술값과 꽁꽁 얼어붙은 통장과 쥐꼬리만한 고료와 또…그러니까 당신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예측 가능해서 지루한 그런 모습. 사실 스물아홉의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조직에서 받는 피곤함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한없이 영에 수렴하는 통장 잔고와 그로 인해 유발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차지했을 뿐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조지 오웰 에세이 '어느 서평자의 고백'을 읽을 것. 물론 나는 당신이 하나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쪽에 3000원을 걸겠다.) (☞관련 기사 : 어느 서평자의 고백)
▲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
K는 박노자를 읽는다. 스물두 살에 또는 스물아홉 살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결코 같지는 않은 방식으로. 이제 그는 순진한 대학생이 아니고, 책을 파는 사람도 아니며, 얼치기 인터뷰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박노자는 여전히 박노자이고,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K는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인다. 끄덕인다. 또 끄덕인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서평을 쓰면 되는 것이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책을 읽는다. 읽는다. 읽는다. 마침내 책장을 덮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는 이 책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K에게는 박노자의 입장에 대해 가타부타할 자신의 입장이랄 게 없었던 것이다. 선배들에게 휘둘리던 대학 시절부터, 지치는 일에도 지쳐버린 직장 생활을 거쳐, 남의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무언가 잘못된 거 같은데, 누군가 내게 그 이유를 좀 명확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던 대학생이 "무언가 잘못된 건 맞는데, 그런 걸 생각하기엔 오늘 밤도 이미 늦었고 나는 피곤해"라고 중얼거리던 직장인이 되었고, 이제 "무언가 잘못된 건 분명한데, 그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문제니 글이나 좀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저술 노동자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K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부끄러웠다. 그러니 원고는 작파하고 술이나 마실 수밖에. (아니, 잠깐, 정정해야겠다. 술을 마신 건 나였다. K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K의 선택은…?
이쯤에서 내가 가련한 K를 도와줘야 할 것 같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나 역시 서평을 위해 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읽었고, 이 글을 썼다. K가 끝내 그 서평을 썼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나라서 하는 말인데, 이제 슬슬 이 길고도 지루한 글을 끝마칠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잠깐!"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아직 시작도 안한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서평이야?"
당신이 책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묻는 거라면, 이런저런 매체의 신간 소개란을 참고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미리보기를 통해 김동춘의 추천사와 머리말을 읽어도 좋겠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 또는 효용에 대해 묻는 거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는 이 책을 덮은 후 나와 K를 위해 진보신당 홈페이지에서 당원 가입을 했다고. 다만 이 글을 쓰느라 아직 가입서를 팩스로 보내지는 못했다고. 나는 여전히 이 책에 대해 논할 만한 어떤 입장을 갖지 못했지만, 그런 입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고. 그건 말하자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다짐에 다름 아니라고. 어떤 책도 내게 그런 마음을 먹도록 만들지는 않았었다고. 그러니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아마 K에도 그것으로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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