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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중국…'3월 내란설'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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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중국…'3월 내란설'의 진실은?

[동아시아를 묻다] '충칭 모델'과 보시라이 이후

베이징이다. 3년 만이다. 열흘째를 맞고 있다. 내내 안개가 짙다. 도시 전체가 희뿌옇게 가라앉았다. 통 앞이 뵈질 않는다.

정국은 더욱 흐릿하다. 보시라이가 실각했다. 중국 좌파들의 희망이 끝내 낙마한 것이다. 양회 당시만 해도 건재를 과시했건만, 전격적인 파면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구속 수감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탓에 내란 조짐이라는 뜬소문도 (한국에서는 크게) 돌았다.

덕에 인터넷에서 좀체 눈을 떼지 못했다. 격변의 순간을 목도하게 되는가, 신경이 온통 뾰족해진 것이다. 실제로 보시라이를 추종하던 좌파 사이트들이 일시 폐쇄되기도 했었다. 저강도의 계엄령 상태인가 싶었던 것이다. 남순강화 20주년, 중국도 기로에 섰다.

보시라이 이후

▲ 지난 3월 15일 전격 해임된 중국 보시라이 전 충칭 공산당 서기. ⓒ뉴시스=AP
접속이 되지 않았던 좌파 사이트들이 속속 복구되기 시작했다. 대표 격인 우요우즈샹(烏有之鄕)도 20일부터 새 글이 올라오고 있다.

단연 추이즈위안(崔之元)이 눈에 띈다. 신좌파의 주도적인 경제학자이자 '충칭 모델'에 직접 참여했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충칭 모델에 대한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는 소신을 밝혔다. 보시라이의 정치적 스캔들과 충칭의 사회적 실험은 분별해야 한다는 논법이다.

또 다른 논단에는 사회학자 쑨리핑(孫立平)의 글이 올라왔다. 충칭 모델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되 그 실행 수단은 잘못되었다는 견해이다. 문화 대혁명식 접근법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리라. 체제 전환이라는 '시대정신'은 얻었으되, 방법론은 '시대착오'라는 것이다. 민주와 법치의 '주류 문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한다.

환호작약하는 곳도 있다. 당장 충칭의 유흥업계는 재빨리 복원되고 있다. 홍색 혁명을 대신하여 홍색 산업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 충칭의 밤은 한결 붉어지리라. 개혁 개방의 지속, 즉 '시장화'가 재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시라이의 낙마는 분명 권력 투쟁의 일환일 터이다. 태자당과 공청단, 상하이방 간의 역학관계가 한 스타 정치인의 가파른 몰락과 무연할 수 없다. 하지만 공산당 내부의 그 속 깊은 내막을 세세히 알 길은 없다. 아마도 당분간은 그 누구도 전모를 밝힐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흥분을 삭히고 긴 호흡에서 작금의 사태를 숙고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보시라이 사태는 권력 투쟁 못지않게 사상 투쟁의 성격도 농후하다. 사태의 종결이라기보다는, 사건의 개시라고 보이는 것이다. 시진핑 시대의 어떤 경향을 더듬어 보게 된다.

문화 대혁명이라는 유령

개혁 개방은 문화 대혁명(문혁) 이후의 사태다. 문혁에 '역사적 과오'였다는 평가를 내린 후에야 개혁도, 개방도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을 (천안문(톈안먼) 사태를 밟고) 질주해왔다. 그리고 주요 2개국(G2)으로 우뚝 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그 상징적 퍼포먼스였다.

헌데 마침 그 해부터 상황이 일변한다. 뉴욕 발 금융 위기로 세계 체제가 휘청,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도 한풀 꺾였다. 중국도 무관할 수 없었다. 중국의 굴기는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세계 체제에 적극 편입된 결과였다. 최대의 수혜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발전 모델이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외자 도입과 해외 수출만으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비단 외부의 충격만은 아니다. 선부론에서 비롯한 극심한 사회 격차로 공산당은 이미 심각한 정당성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과학 발전관, 조화 사회론, 사회주의 농촌 건설 등등의 구호는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 하에서의 부분적 좌선회를 보여준다. 공산당의 지지 기반이었던 농민과 노동자의 주변화가 임계점에 달한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농민 국가'이다. 더불어 세계 최대의 '노동자 국가'도 되었다. 그 노·농이 합심하면 천하가 흔들리고 중원도 위태롭다. 혹여 국민당의 운명을 공산당이 따를 수도 있는 것이다. 민중 반란에 의한 왕조 교체는 중국 역사의 주선율이다.

그 내우외환 속에서 충칭 모델이 떴다. '선부(先富)'를 대신해 '공부(共富)'를 내세웠다. 공평한 성장과 공정한 분배를 강조했다. 내륙의 실험이었기에 지역 간 격차 해소의 측면도 컸다. 여기에 대중적 캠페인도 가세했다. 혁명가를 부르고, 부패 집단을 타도했다. 일약 문화 대혁명을 연상시키는 홍색 도시가 된 것이다.

신좌파는 정책 방향에 공감했고, 구좌파는 계급투쟁과 선전 선동에 환호했다. 전자는 제도적 실험에 주목했고, 후자는 인적 청산에 열광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의 이상주의와 문화 대혁명의 유산을 통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양자는 합류할 수 있었다. 신·구좌파가 합작하여 문화 대혁명은 과오라는 공식적 평가를 뒤집은 것이다. 그래서 건국 60주년(2009년)을 전후로 개혁 개방 성공의 밑바탕에는 마오쩌둥 시대의 유산이 있다는 '회통'의 역사관도 제출되었다.

외부 환경도 일조했다. 월가 점령 운동을 비롯한 전 지구적 좌향좌의 물결 속에서 충칭이 급부상한 것이다. 연안 도시들이 고전하는 사이 충칭은 단연 빛났다. 대안적 발전 모델로 중국 너머 세계적인 주목을 이끈 것이다. 혹자는 '사회주의 3.0'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직선제였더라면 응당 보시라이가 대권을 쥐었을 것이라는 얘기마저 들린다. 그만큼 호응이 컸다는 반증이리라.

따라서 보시라이를 검색어에서 지운다 한들, 보시라이에 열광했던 저변의 조건이 달라질 리 없다. 그 지향과 가치에 대한 지지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중국 사회의 그 어떤 근본적 결핍을 보시라이가 채워준(것으로 보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로 새삼 확인케 된 것은 현재의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회주의의 깃발이 소구하는 대중적 동원력이 여전히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 대의와 명분이 지속적인 체제 개혁과 실험의 동력이 되고 있다. 그 저류의 압력이 시진핑 시대를 추동하는 사회적 힘으로 작동할 공산은 여전히 크다 하겠다.

여기서 차기 지도부의 세대적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 시대를 이끌 5세대는 대저 60대 전후이다. 달리 말해 10대 사춘기 때 문화 대혁명을 경험한 세대이다. 당시의 홍위병과 지식 청년들인 것이다. 즉, 문혁의 유토피아적 해방감을 (잠시나마) 맛본 세대가 앞으로 중국을 이끌게 된다.

이들은 '하방'을 통하여 기층 사회와 인민 대중과 교감했던 남다른 체험도 있다. 그들의 청춘에 깊이 새겨진 그 강렬한 원체험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이다. 문화 대혁명에 대한 재평가(의 시도)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더불어 개혁 개방의 수혜를 가장 먼저 입은 세대이기도 하다. 유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세계의 흐름에도 해밝은 편이다. 지방 단위부터 꾸준하게 행정 실적을 쌓아올린 관료제의 경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말이 지방이지, 중국의 성은 어지간한 국가보다 크다. 충칭만 해도 인구 3000만이 넘는 '중형 국가'다. 문화 대혁명의 원체험, 개혁 개방의 혜택, 그리고 행정 경험 축적이라는 삼박자가 합류하여 '충칭 모델'이 탄생했다고 할법한 것이다.

지난 30년, 개혁 개방을 이끈 이들은 문화 대혁명기의 피해자였다. 당시의 '주자파'들이 심기일전하여 오늘의 '개혁파' 혹은 '자유주의파'가 된 셈이다. 그에 반해 당시 마오쩌둥에 호응하여 '주자파'와 맞서 '조반유리'를 외쳤던 홍위병들은 어떠할까. '신좌파'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실권을 부여잡고 개혁 개방 자체를 개혁하게 될까?

보시라이는 반성해야 한다는 원자바오의 공개적인 호통은 비단 그 개인을 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보시라이의 깃발 아래 세력을 키우던 구좌파(마오이스트)에 철퇴를 내려친 꼴이다. 작금 권력 투쟁과 결부된 노선 투쟁에는 문화 대혁명의 (상이한) 기억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문화 대혁명이라는 유령이 중국을 배회하고 있다.

중국의 고뇌

돌이켜 보면, 20세기 중국의 길은 모방과 참조의 대상이 있었다. 1919년(5·4 운동)은 유럽을, 1949년(건국)은 소련을, 1979년(개혁 개방)은 미국을 준거로 삼았을 만하다.

허나 2009년 이후, 중국은 오로지 중국 자신의 독자적 길을 개척해야 한다. 자력갱생은 지금부터다. 시진핑 시대가 그 출발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 모델론'이라는 말도 아직은 아껴두어야 하지 싶다. 현재(까지)가 아니라 미래를 설명하는데 한층 적절한 용어이지 싶은 것이다.

자유주의파의 길은 쉽다. 다당제와 의회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 쉬운 길은 그래서 안이하다. 그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과 유럽, 일본의 작금을 보노라면 더욱 그러하다. 즉 오늘날 (정당에 기반을 둔) 정치의 위기는 보편적인 것이다. 비단 중국(공산당)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과제인 것이다.

정권 교체 이후 미국의 변함 없음(unchange)과 일본의 지지부진을 보라. 동유럽과 중앙유라시아 등 구사회주의권의 '색깔 혁명'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적 해방은커녕 인민을 배제하는 새로운 과두제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 정점이 오늘날 러시아가 노정하는 유사 차르식 철권 통치일 것이다.

그렇다고 충칭 모델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기도 옹색하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막대한 국유 자산이었다. 시장 경제는 수용하되, 그 안에서 국영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인민에게 시혜적인 (재)분배 정책을 펼친 것이다. 도드라진 것은 유능한 행정력이다. 행정이 정치를 대신한 것이다.

즉, '시민 정치' 혹은 '인민 정치', 나아가 '대민주'라고 함직한 아래로부터의 능동성과 자발성은 덜했던 것이다. 따라서 '충칭 모델'은 통치의 모델을 개선한 것이지, 새로운 민주의 사회적 형식을 고안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국진민퇴(國進民退)' 현상은 도리어 강화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작금 중국의 고뇌란 비단 중국만의 것이 아니다. 중국의 안과 밖을 아울러 근대적 정치가 최종적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따라서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과장하는 것은 당대 세계의 본질적 위기를 가린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조짐인지도 모른다.

세계 체제의 근간이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그 상위 구조인 국가와 국가 내 정치(다당제든, 일당제든)가 위기에 처한 것은 응분의 산물이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조직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개조 시대'의 산물이다. 러시아 혁명(1917), 3·1 운동과 5·4 운동(1919년), 다이쇼 데모크라시(191~20년대)가 약동하던 시대의 소산이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가 대약진하던 때이다. 20세기를 추동했던 그 신시대의 논리들이 그 기운을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낡은 것은 가는데, 새것은 오지 않은 상황이 '위기'이다. 그 위기에 임하는 비책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좌고우면했던 20세기를 대신하여 좌우의 도래 이전을 반추하는 것이다. '개조 시대'가 내팽겨 쳤던 '거대한 뿌리'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마침 베이징의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에는 천하와 봉건, 왕도와 중도를 (재)탐구하는 신간들이 부쩍 늘었다.

개조 시대의 시대착오가 반전 시대에는 선견지명이(될 수 있)다. 21세기 중국의 길 또한 그 어드메일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그 반전하는 '변법자강'(變法自疆)의 향도를 면밀히 주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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