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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낳은 2PM vs. '공생'이 낳은 비틀즈…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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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경쟁'이 낳은 2PM vs. '공생'이 낳은 비틀즈…당신은?

[다윈, 88만 원 세대를 만나다] 최재천·우석훈·최정규의 대화

21세기 첫 10년을 대표하는 한국의 지식인을 딱 한 명만 꼽는다면, 누구일까? 여러 이름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활동의 지속성, 담론의 영향력, 인물의 대중성 등을 골고루 따져본다면 생물학자 최재천(이화여자대학교 교수)도 후보 중 한명이 될 것이다.

최재천은 1999년 <개미 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펴냄)을 펴내고 나서 10여 년간 쉬지 않고 새로운 책을 내놓았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펴냄, 2001년), <여성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 펴냄, 2003년),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삼성경제연구소 펴냄, 2005년),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궁리 펴냄, 2007년) 등.

이 책들은 길게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책이 나올 때마다 '양성 평등'(<여성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고령 사회'(<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등 시대의 화두와 호흡하면서 적지 않은 반향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최재천이 소개한 '다윈의 렌즈'는 많은 이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졌다.

2000년대 중반 한국의 지식 사회를 강타한 '통섭' 열풍은 어떤가? 2005년 최재천이 과학철학자 장대익과 함께 번역해 소개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 펴냄)은 분과 학문의 벽을 허무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환기했다. 그리고 그 용어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통섭'은 학문 간 교류를 상징하는 일상어로 자리매김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재천을 좌장으로 한 일련의 지식인들은 '다윈의 렌즈'로 생물학을 넘어서 경제학, 심리학, 윤리학, 종교학 등 다른 인문·사회과학을 새롭게 읽고 쓰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200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판 150주년(다윈 탄생 200주년)을 계기로 그 성과의 일부가 <21세기 다윈 혁명>(사이언스북스 펴냄) 등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이렇게 지난 10여 년간의 최재천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가 최근에 잇따라 내놓은 <다윈 지능>(사이언스북스 펴냄), <호모 심비우스>(이음 펴냄)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 책들은 최재천을 비롯한 한국 '다윈학파'의 지난 10여 년간의 성과를 갈무리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사색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재천은 <호모 심비우스>에서 "이기적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공생인'이라는 뜻의 책 제목(Homo symbious)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경쟁'이 아닌 '공생'을 21세기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다윈학파의 좌장이 다윈 '자연 선택론'의 핵심인 '경쟁' 대신 '공생'을 강조한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2012년 3월 10일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직접 최재천의 얘기를 들었다. 경제학자 우석훈(성공회대학교 교수), 최정규(경북대학교 교수)가 대화상대로 나섰다.

우석훈은 박권일과 같이 쓴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세대 갈등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장본인이다. 그는 지난 5년간 한국 사회 여러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여러 책을 통해서 종횡무진 제시해 명실상부한 전 방위적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문화로 먹고살기>(반비 펴냄)를 통해 '문화 사회'의 비전을 제시했다.

최정규는 다윈의 진화론을 경제학에 접목시킨 진화 경제학 연구의 권위자다. 2007년 한국 경제학자로서는 최초로 세계적인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이파리 펴냄), <게임 이론과 진화 다이내믹스>(이음 펴냄) 등을 통해서 진화론과 경제학의 만남이 열어준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보여줬었다.


▲ 2012년 3월 10일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최재천(왼쪽), 우석훈(오른쪽), 최정규 교수의 대화가 있었다. ⓒ사이언스북스

경쟁, 피할 수 없는 운명?!

이번 대화를 꿰뚫는 열쇳말은 '경쟁'과 '협력'이다. 우석훈은 <88만 원 세대>부터 최근에 펴낸 <문화로 먹고살기>까지 계속해서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과도한 '경쟁'을 꼽았다. 하지만 최재천은 경쟁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정된 자원을 염두에 둔다면 살아남기 위한 생존 경쟁은 말 그대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은 처음부터 승자와 패자를 전제로 한다. 더구나 지난 30년간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서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승자 독식'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만연했다. 이런 승자 독식은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훼손한다.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다양성을 확보할 것인가?


▲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사이언스북스
최정규 :
최재천 선생님께서는 평소에도 생태학적인 접근의 중요한 열쇳말 중 하나로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다윈 지능>, <호모 심비우스>에서도 다양성이 중요한 화두더군요. 우석훈 박사가 <문화로 먹고살기>에서 강조한 것 역시 '문화 생태계'의 다양성이었고요. 왜 다양성이 중요한가, 이것부터 짚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최재천 : 생태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실험 얘기부터 할게요. 생태학자 로버트 페인이 바닷가 암석해안의 물웅덩이에서 야외 실험을 수행했어요. 이곳의 웅덩이에는 불가사리를 비롯한 여러 종의 따개비, 홍합, 삿갓조개, 달팽이 등이 살고 있었습니다. 페인은 이 불가사리가 여러 종의 동물을 모두 잡아먹고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페인이 한 웅덩이에서는 불가사리가 보일 때마다 수시로 제거하고(실험군), 다른 웅덩이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어요(대조군). 결과가 어땠을 것 같아요? 놀라웠습니다. 불가사리가 사라진 웅덩이에서 홍합이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15종이나 되던 생물이 8종으로 줄어들었어요.

흉악한 포식동물인 불가사리만 제거하면 웅덩이가 평화롭고 풍요로워질 줄 알았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 거예요. 불가사리가 가장 경쟁력이 강한 종을 제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취약한 종들에게도 삶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던 거예요. 자연 생태계에서 생물 다양성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주는 데 포식동물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함을 보여준 거예요.

요즘 재벌 해체 이런 주장이 나오잖아요. 저는 굉장히 어색한 시도처럼 보여요. 재벌이 시장에서 불가사리 정도의 역할만 할 수 있도록 적당히 규칙을 만들어 준다면, 마치 물웅덩이에서 틈새를 공략하는 작은 생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경제 생태계의 다양성도 유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다윈 지능>(최재천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최정규 :
글쎄요. 최근에 한 기사를 읽고서 고개를 끄덕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정보통신 대기업 노키아가 휘청대잖아요. 그런데 정작 노키아가 힘을 잃으니까, 핀란드의 정보통신 분야의 특허 출원 건수가 몇 배로 증가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방금 선생님께서 소개한 불가사리 비유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방금 선생님께서는 얼핏 재벌을 불가사리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 한국 경제에서 재벌은, 핀란드 노키아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불가사리 없는 물웅덩이의 홍합 같은 존재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재벌이 지금 한국 경제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한국 경제 생태계에 불가사리가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정부의 재벌 규제가 그런 불가사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재천 : 지금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단언해서 말할 만한 식견이 저한테는 없습니다. 하지만 방금 얘기를 받아서 덧붙이자면, 저 역시 정부가 불가사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믿어요. 다만 <알이 닭을 낳는다>라는 책에서 저는 '정부의 경제 규제는 불가사리만큼만'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정부가 재벌을 규제한다면, 불가사리 정도면 딱 족할 것 같아요. 제가 정부 개입에 우려를 표명하는 이유는 대개 그것이 선을 넘는 경우를 많이 봐와서 그렇습니다. (웃음) 아무튼 핵심은 적당한 자연 생태계든 경제 생태계든 생존에 대한 적당한 압력이 오히려 다양성을 증가하는 요인이라는 거예요.

우석훈 :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배경에도 그런 시각이 있었어요. 미국의 기업과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증가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성공 신화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입니다. 더 센 놈과의 경쟁을 통해서 한국 경제 생태계의 다양성이 늘어나리라고 기대한 거예요.

최재천 : 얼마 전 신문 칼럼에서 "조권 효과" 얘기를 했더니 요즘 2AM 팬들한테 제가 인기 만점이래요. (웃음) 이게 무슨 얘기냐면,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 남아메리카에서 한국의 아이돌에게 열광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이런 한류 열풍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만약에 수요에 딱 맞춰서 공급을 조정하는 식이었다면 이런 게 가능했겠어요? 일찌감치 아이돌의 꿈을 가진 수많은 아이들이 수년간의 경쟁을 거쳐서 데뷔하고, 데뷔 후에도 우후죽순 나오는 다른 아이돌과 경쟁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넘쳐서 흐른' 결과가 바로 한류 열풍으로 나타난 것 아닐까요?

'넘쳐야 흐른다' 요즘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는 말인데, 언제 책 제목으로 한 번 써보려고요. (웃음) 사실 낭비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이 과정이야말로 다윈이 말했던 '자연 선택'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연 선택 덕분에 자연 생태계의 다양성이 가능해졌습니다. 지금 한류 열풍을 둘러싼 사정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석훈 선생님은 '88만 원' 밖에 못 받는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표현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 많은 아이들이 죽어라고 연습하고 데뷔해서 '조권'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열성 팬을 가진 아이돌이 탄생했잖아요. 이게 여전히 '길거리 캐스팅'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외국과 비교했을 때는 경쟁력이 있는 거예요.

최정규 : 일단 그 친구들은 '44만 원 세대' 정도겠지요. 88만 원보다도 훨씬 더 적게 받을 테니까요. (웃음) 우석훈 선생님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만.

우석훈 : 글쎄요. 저는 방금 최재천 선생님께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한류가 과연 지속 가능한 모델인지부터 회의적이에요. 왜냐하면, 바로 그런 소수의 연예기획사가 만들어낸 아이돌 중심의 문화 산업이 대중문화 생태계의 다양성을 대폭 훼손했거든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런 식의 아이돌 중심의 문화 산업이 계속 재생산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왜냐하면, 문화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문화야말로 넘쳐서 흐르는 거예요. 연예기획사의 몇몇 '마이더스의 손'들이 기민하게 세계 시장의 트렌드를 살피면서 몇 차례 성공 모델을 남길 수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인 문화 생태계에서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요?

걱정스러운 점은 또 있습니다. <문화로 먹고살기>를 펴내면서, 제목에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하나는 20대들이 정말로 문화로 먹고살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는 문화 산업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한류 열풍으로 상징되는 문화 산업은 절대로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될 수 없어요. 소수의 연예기획사만 배를 불리는 '승자 독식' 구도가 지속되는데 어떻게 문화 산업으로 한국 경제를 지탱할 수 있겠어요. 그런 점에서 지금과 같은 아이돌 중심의 문화 산업은 문화 생태계의 다양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이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경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최재천 선생님 말씀처럼 경쟁이 긍정적인 기능을 분명히 합니다. 어떤 식으로 규칙을 짜더라도 승자와 패자는 있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패자가 영원히 낙오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패자가 재기해서 자신의 패배의 경험을 사회적 지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최재천 : 제가 냉혈한처럼 보이겠어요. (웃음) 한류 열풍에 대한 견해 차이는 그대로 둡시다. 사실은 유명한 아이돌 둘이 제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은 적이 있어요. '2PM'의 우영과 닉쿤인데, 각각 따로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단 한 번 식사를 같이한 것뿐이지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드는 아이들이었어요.

정말로 기본 교양을 갖춰서 대화가 가능한 아이들이었어요. 아이돌에 대한 제 편견을 한 번에 깨줬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바쁜 일정 속에서 인성 교육도 받고, 책도 읽고 그런데요. 제 책도 읽어보겠다고 해서, 지금 2PM 숙소에 제 책이 잔뜩 가 있어요. (웃음) 이런 개인적인 경험도 한류 열풍에 대한 제 생각에 영향을 줬을 겁니다.

다만 지금 아이돌을 지망하는 모든 10대들이 다 스타가 될 수는 없어요. 톱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아이들이 넘쳐흘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물론 우석훈 선생님이 얘기한 안전판이 필요합니다. '소녀시대' 멤버들과 같이 연습을 하다가 카이스트에 간 아이가 하나 있다면서요?

이렇게 설사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열정이 다른 곳에서 꽃 필 수 있도록 돕는 안전판이 필요하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 우리가 얘기를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은 그 안전판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가 아닐까요? 우석훈 선생님은 상당히 구체적인 안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패배자에게 안전판을!

대화 시작 전부터 최재천, 우석훈 두 사람의 뜨거운 논쟁을 기대했다. 최재천은 보수·진보의 구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이겠지만, 한국 사회의 맥락을 염두에 두면 보수 쪽에 가까운 지식인이다. 그가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고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그 본을 보인 것이다.

반면에 우석훈 박사는 가장 대중적인 진보 지식인이다. 그는 <88만 원 세대>부터 <문화로 먹고살기>까지 일관되게 계층, 세대, 산업, 인종 등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온갖 구조에서 일관되게 약자(저소득층, 88만 원 세대, 중소기업, 이주 노동자 등)의 편에 섰다. 단, 최재천과의 눈에 띄는 공통점은 둘 다 비인간(자연)까지 시각을 넓혀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행선을 달릴 것 같았던 최재천, 우석훈 둘의 논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두 사람이 동의하는 것처럼, 경쟁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패자에게 적당한 안전판을 마련하는 것뿐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을 남기며 대화는 계속되었다.


▲ 우석훈 성공회대학교 교수. ⓒ사이언스북스
우석훈 :
방금 최재천 선생님께서 어떤 안전판이 가능할지 물으셨어요. 저는 '기본 소득'을 주장합니다. 최근에 한국 사회 일각에서도 '시민 기본 소득'을 얘기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니까 시민권만 있으면 월 100만 원이든 혹은 얼마든 일정액의 기본 소득을 지급하자는 주장입니다. (☞관련 기사 : "모든 시민에게 100만 원씩! 세상이 안 바뀌나 보자!")

2011년 최고은 작가가 불운하게 세상을 떠나고 나서 문화예술계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최소한 4대 보험 정도는 정부가 보장해주는 방안이 논의가 되었어요. 국회에서 논의가 되는가 싶더니 결국은 흐지부지되더군요. 사실 저는 이런 방안이 논의가 될 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우선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20~30대들한테 기본 소득을 보장해줘야 합니다. 월 30만 원 정도요.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이들이 최소한 먹고살게는 해주자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왜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청년들에게만 이런 특혜를 주느냐,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그럼, 20~30대 모두에게 지원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최정규 : 비록 20~30대, 그 중에서도 문화예술 분야 종사자라고 선을 긋긴 했습니다만, 기본 소득은 복지 제도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것에 속하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들어봅시다. 우선 왜 문화예술 분야 종사자에게 그런 특혜를 줘야 합니까? 문화예술 분야가 중요하다, 이 정도의 당위만으로는 대답이 안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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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로 먹고살기>(우석훈 지음, 반비 펴냄). ⓒ반비
우석훈 :
아까 <문화로 먹고살기>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에 대한 저 나름의 답변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현재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몇몇 특정 산업에 편중된 제조업입니다. 이런 제조업의 경쟁력이 언제까지 갈 것 같아요? 결국에는 세계 시장에서 후발국에게 따라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 빈 공간을 문화 경제, 지식 경제가 채워야 한국 사회가 계속 먹고살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문화 경제, 지식 경제를 지탱해줄 이들이 바로 20~30대 문화예술 분야의 꿈꾸는 청년들입니다. 연예기획사에서 어렸을 때부터 스파르타식으로 훈련한 이들만으로는, 그 정도의 다양성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비틀즈 얘기가 있잖아요? 비틀즈를 대단한 연예기획사에서 키웠나요? 영국 정부의 선진적인 문화 정책이 키웠나요? 아닙니다. 실업 수당이 키웠어요. 클럽에서 노래만 불러도, 실업 수당을 받아서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다 보니 비틀즈 같은 당대 최고의 뮤지션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거예요.

장담하건대, 한국 경제가 문화 경제로 체질 전환을 하면 그때야 비로소 역대 정부가 주술처럼 되뇌는 "국민 소득 6만 불" 이런 게 현실이 됩니다.

최재천 : 문화 경제, 지식 경제 이런 구상에는 동감합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그런 기본 소득 같은 안전판은 "국민 소득 6만 불"이 되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요? 당장 그런 기본 소득 같은 안전판이 얼마나 시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우석훈 : 한 가지만 얘기를 해볼게요. 지금 현대자동차에서 전체 비용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될 거예요. 그나마 기계화로 고용의 비중이 계속 낮아집니다.

그런데 문화 산업은 많은 경우 인건비 비용이 50퍼센트가 넘어요. 물론 문화 산업의 저임금 구조는 악명 높긴 합니다만, 그건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문제고요. 이렇게 문화 산업에서 고용을 책임지고, 또 그렇게 고용된 20~30대의 지출이 늘어나면 비로소 한국 경제가 돌아갈 수 있어요. 기본 소득은 일종의 선투자인 셈입니다. 거칠지만 이게 제 구상입니다.

최재천 : 네, 그렇게만 되면 좋겠습니다. 기왕에 안전판 얘기가 나왔으니까 저는 다른 측면에서 얘기를 받아서 해볼게요. 요즘에 부쩍 젊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석훈 선생님이 당신들을 가리켜서 88만 원 세대라고 슬퍼하는데, 당신들이 보릿고개 세대보다 더 불쌍한가?"

물론 그런 얘기를 들은 젊은 친구들의 반응은 좋지 않아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88만 원 적지만, 한 번 버텨 보자! TV 뉴스에서 20대 친구에서 마이크를 들이대면 이렇게 말한다. '서른 이전에 성공해야 하는데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다. 그렇게 빨리 성공할 필요가 뭐가 있나. 어차피 여러분은 90세, 100세까지 평생 직업을 대여섯 가지는 가져야 하는데, 한판에 결정을 내리지 말고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라."

사실 보릿고개 세대는 문화 이런 건 생각할 수조차 없었어요. 왜냐하면, 문화 타령만 하다가는 당장 굶어죽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 그 정도는 아닙니다. 부모 세대가 지금의 자식 세대를 뒷받침해줄 능력도 되고요. 느긋하게 이것저것 시도해 보면, 그 중에 하나는 될 수 있지 않겠어요? 젊은 세대에게 욕을 먹더라도, 솔직히 제가 하고 싶은 얘기에요.

최정규 : 최재천 선생님의 그런 얘기를 젊은 세대가 듣고 즉각 반감이 드는 이유가 있어요. 방금 부모 세대가 자식 세대를 뒷받침해줄 능력이 된다고 했는데요. 부모 세대의 세금을 활용해서 정부가 복지 정책으로 뒷받침하지 않는 한, 부모 세대의 능력이라는 게 개별적으로는 천차만별이거든요.

당장 대학 교육만 봐도 그렇습니다. 대학 교육이라는 게 부모의 재산에 좌지우지되잖아요. 대학 교육의 효용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인데도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의 젊은 세대는 꿈을 가지고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동등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아요. 젊은 세대 열패감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재천 : 맞습니다. 저 역시 한국 사회에 '평등'을 둘러싼 논의가 기회의 평등에 초점이 맞춰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공감하는 시민도 훨씬 늘어날 텐데요.

호모 심비우스의 탄생?

지금까지의 대화만 놓고서는 최재천이 지금 이 시점에서 공생하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또렷하지 않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빚어놓은 '경쟁하는 인간'의 전형이 아닌가? 그가 강조하는 '자연의 원리'는 물론이고 '사회(문화)의 원리'로도 '공생하는 인간'은 언감생심 아닌가?

▲ 최정규 경북대학교 교수. ⓒ사이언스북스
최정규 :
최재천, 우석훈 선생님 두 분이 은연중에 '경쟁하는 인간', 이런 시각에는 의견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최근에 최재천 선생님은 정반대로 공생하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를 강조합니다.

최재천 : 저는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서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는 과학자입니다. 자원이 한정된 생태계에서 한 개체가 생존을 위해서 경쟁하는 것은 필연적이에요. 바로 그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때로는 협동이 필요합니다. <다윈 지능>, <호모 심비우스>에서 예를 들었듯이 실제로 생태계의 많은 생물이 서로 협동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물이 서로 협동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기기 위해서예요. 바로 이렇게 생존하기 위해서 협동하는 자연의 모습을 여러 가지 위기에 맞닥뜨린 지금 우리 인간이 배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호모 심비우스를 21세기 새로운 인간형으로 제시해 본 거고요.

최정규 : 많은 인문학,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그런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불편합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경쟁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또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협력하는 모습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쟁과 협력이 자연 생태계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인간 사회도 그런 논리를 따를 필요가 있을까요?

당장 이런 식의 반응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연 생태계와는 달리 인간 사회에서는 경쟁 없는 사회를 한 번 만들어보자' 이렇게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난 100~200년 동안 그런 이상을 실험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습니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습니다만.

최재천 :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요. 자연적이지 못하니까요.

최정규 : 그럴까요? 선생님께서도 <다윈 지능>에서 자유 의지의 진화로 나타난 '설명의 뇌(explaining brain)'야말로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생존의 뇌', '감정의 뇌' 심지어 '생각의 뇌'조차도 인간의 뇌를 다른 동물의 뇌와 구별해낼 수 없었지만, 이 '설명의 뇌'는 인간만의 특징이라는 얘기입니다.

'설명의 뇌'가 하는 일은 해석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해석하고, 또 그 해석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자연스럽지 않은 선택도 서슴지 않고요.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게 바로 넓은 의미의 문화라 불리는 것일 거예요. 그렇다면, 자연의 논리와 사회(문화)의 논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과연 문제일까요?

최재천 : 근본적인 질문이군요. 저는 그게 바로 생태학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태계의 논리, 그러니까 자연의 논리를 인간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잘 고민해봐야 해요. 아까 불가사리 실험의 예를 통해서 재벌 규제에 대한 제 생각을 말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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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심비우스>(최재천 지음, 이음 펴냄). ⓒ이음
최정규 :
여기는 자연 생태계가 아니라, 인간 사회잖아요! (웃음) 여기서 최재천 선생님께서 확실히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호모 심비우스>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설령 과학이 개인들 간의 차이, 그리고 인종 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그 차이에 기반을 둔 경쟁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은 경쟁을 넘어선 협력을 강요한다. 조건이 바뀌면 게임의 법칙도 바뀌는 법, 이제 미래에는 이기적인 인간이 설 곳이 없다. 아니 협력하는 인간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런 대목은 마치 '협력이 자연적이지 않더라도 지금 인류가 맞닥뜨린 여러 가지 위기 앞에서 인간은 협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읽힙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21세기 인간형으로 호모 심비우스를 내세운 것일 테고요. <다윈 지능>, <호모 심비우스> 곳곳에서 이런 긴장이 보입니다. 선생님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입니까? 정말로 자연스러운 게 옳은 건가요?

최재천 : 잘못했어요. 잘못을 인정합니다! (웃음)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생각이 정리가 안 돼요.

이참에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지요. 사실 '다윈의 렌즈'로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는 입장은 항상 딜레마가 있어요. 자연 생태계만 놓고 보면 진화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그걸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 무차별적인 진화의 흐름 속에서 자칫하면 인간이 제거당할 수도 있거든요. 그걸 반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러니 자연의 논리를 그대로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역시 위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면, 답답한 게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자연 생태계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을 인간 사회에서 억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거든요.

자연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넓게는 자연 생태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사회도 더 잘 운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굉장히 좁은 땅에 살면서도 바보 같이 미국의 교통 시스템을 배웠잖아요. 고속도로를 놓고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식으로요.

우리는 일본이나 유럽처럼 철도 중심으로 갔었어야 했어요. 열차만 타면 전국 어디든 편하게 갈 수 있는 그런 식으로요. 그런데 지금은 자동차에 밀려서 멀쩡한 철로도 걷어내는 상황이잖아요. 우리가 조금만 생태학적 관점을 염두에 뒀더라면, 이런 식으로 무작정 미국을 추종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최정규 : 솔직한 얘기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지금 얘기한 그 부분을 놓고서 앞으로 좀 더 진전된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최정규는 피터 싱어의 <다윈주의 좌파>(이음 펴냄)에 덧붙인 옮긴이 해제('다윈주의적 좌파'에 대한 몇 가지 생각)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었다 : 편집자)

아쉽지만 이제 대화를 끝내야 할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호모 심비우스가 만들어가는 미래상을 한 번 그려볼까요? (웃음)

최재천 : 아까 '88만 원 세대'와 '보릿고개 세대' 비교를 해서 젊은 친구들을 서운하게 한 얘기를 했었지요? 그 얘기를 부연하고 싶어요. 저는 흔히 '88만 원 세대', '삼포 세대' 이런 식으로 불리는 젊은 세대가 그렇게 한심한 세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친구들과 교류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 깊어져요.

왜냐하면, 요즘 20~30대를 보세요. 어디서 큰일이 터지면 너도나도 앞뒤 안 가리고 자원봉사를 가잖아요. 그리고 내 일, 네 일 구분 않고 세상의 온갖 일에 얼마나 관심이 많아요.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면 참 실속 없는 철없는 행동이에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바로 이게 인류가 그토록 원했던 상황 아닌가요? 스스럼없이 타인의 삶에 도움을 주려는 모습이요.

저는 이 세대야말로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서로 돕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호모 심비우스의 인간형을 예고하는 게 아닌가, 이런 기대를 가져 봐요. 기성세대는 그들이 그렇게 공생하는 인간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줘야 하는데, 지금 그게 잘 안 되고 있어요.

인류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이 이제 막 열리는데, 생각이 부족한 기성세대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우석훈 선생님의 좋은 아이디어가 실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최소한 먹고살 걱정을 안 하면서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쳐보면 좋겠어요.

우석훈·최정규 : 저희 역시 같은 바람입니다.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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