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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중은 안철수에게서 '착한 이명박'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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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왜 대중은 안철수에게서 '착한 이명박'을 보는가?

[한윤형 칼럼] 군대 경험으로 본 '인물'과 '구조'

야권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안철수에 대해, '착한 이명박'이라 표현하는 게 하나의 조류인 것 같다. 문재인을 '다시 노무현'이라 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이 그 사람을 통해 욕망하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조어인 듯하다. 그런데 이 표현이 쓰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만큼 그렇게 명백한 의미를 가진 단어인지에 대해선 약간 의구심이 있다.

가령 '착한 이명박'이란 조어가 가정하는 바들은 이렇다. 2007년 대선에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미심쩍더라도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자 했다. 즉, 이명박은 '경제적 능력'과 '비도덕성'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완고한 태도에 질린 시민들은, 이제 이 결합에서 '비도덕성' 부분은 수정하려고 한다. 그것이 '경제적 능력'과 '도덕성'을 결합시킨 욕망, '착한 이명박'에 관한 욕망이며 안철수는 이에 부합하는 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당연히 드는 의구심은 과연 사람들이 논평가나 기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딱 떨어지는 이유로 이명박을 지지했고, 또 안철수를 지지하고 있을까라는 것이다. '착한 이명박'은 너무 딱 떨어지는 분석에 의거한 조어라서, 역설적으로 사람들에겐 두루뭉술하다. 트위터에서 우연히 본 어떤 반응은 이 조어에 대해 "착하면 그게 이명박이냐?"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이명박의 이미지도, 안철수의 이미지도 훨씬 종합적이고 애매한 상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수사를 내세웠을 때 논평가와 기자들이 "그 무슨 형용모순이냐"라고 혀를 찬 것과 비슷한 심정을 이 조어를 보면서 느끼는지도 모른다.

ⓒ프레시안(손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착한 이명박'이 가정하는 저 설명이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추가적으로 드는 의구심은 이 조어를 발화한 사람들을 향한다. '착한 이명박'이란 말에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대중들은 그걸 몰라. 그래서 한국 정치가 이 모양이야"라는 은근한 한탄의 속삭임이 서려 있다. 사람들이 이 조어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엔, 그 좌절감과 우월의식이 버무려진 화자의 정서를 직관적으로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대중에게 '구조적 문제'에 접근하기를 요구하는 논평가의 시선이 묘하게도 '구조적'이지 못함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정치인의 인성, 품성, 진정성에 유달리 집착하는 건 구조적 문제를 모르는 멍청한 이들이라서가 아니라, 실상은 그들의 처지가 그런 것에 집착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많은 논평가들은 어떤 부분에 대해선 구조적인 분석을 수행하면서, 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주체의 윤리'를 통해 그것을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것은 몇몇 논평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평론 일반의 문제다. 만약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바가 없다면 정치 평론은 '어째서 일이 안 풀리는지'를 설명하는 글쓰기에 그칠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으로, 한 번은 연애에 자꾸 실패하는 여성이 술자리에서 자신이 왜 잘 안 되는지 설명해 달라기에 설명을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그녀가 설명을 듣더니 외려 내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녀의 항변인즉슨 내 설명대로라면 자신은 앞으로도 연애를 하지 못할 게 아니냐는 것이다.

'구조적 설명'이란 게 사람들에게 주는 짜증은 이 여성이 내게 짜증을 낸 심리와 비슷한 맥락에 걸쳐 있을 것 같다. 열심히 설명을 하다 보면 우리는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특히 물리적 조건이나 경제적 조건은 바꿀 수가 없으니, 결국에 뭘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은 자꾸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뛰어넘기를 요구해야 한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건 익히 안다. 그러나 이 경우 '사람'에 대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변화를 요구하는 말의 설득력이 높아지지 않을까.

빙빙 돌아서 왔지만 결국 이 얘기는 종종 독자들이 댓글에서 논평가에게 성질을 부릴 때 하는 말, "너희들은 사회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란 말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사실 이 '악플'은 재미있게도 은근하게 논평가들이 대중에게 하고 싶은 말 (트위터에선 대놓고 하기도 하는) "너희들은 (인문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심리학이든 생물학이든. 무슨 책인지는 말하는 사람 전공에 따라 결정됨) 책을 안 읽어서 그렇다"와 짝을 이룬다. '논평가'와 '대중'이란 구도가 너무 추상적이고 또한 환상적이니 좀 더 거리를 좁힌다면, 이 구도는 '대학원생'과 '직장인'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보여준다. 세대의 문제와도 상관없이, 이미 내 주변 또래의 대학원생과 직장인들만 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한편 생활인들이 만날 확률은 별로 없지만 내 주변에는 바글바글하게 분포하는 '기자'란 이름의 직장인들은 무언가 이 사이에 낀 번데기 같은 기분인데, 개인 취향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대학원생'의 시선에 동의하기도 하고 '직장인'의 시선에 동의하기도 하는 것 같다.

"세상사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건 '독서'인가, '경험'인가?"라고 묻는 건 우문이다. 그 어떤 '독서'나 '경험'이라도 세상사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없다. 또한, 그 어떤 '독서'나 '경험'이라도 그 자체만으로 세상사를 파악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정치 평론을 둘러싼 필자와 독자와 필자에 대한 논평가들의 배배 꼬인 인정 투쟁의 덩어리는 그 자체로 난감하지만 한편으론 정치 평론이 민주주의 사회의 일이란 걸 보여준다. 우리는 투표권을 가진 모든 시민에게 무언가를 이해시키고 싶기 때문에 정치 평론이란 걸 한다. 만약 전근대 사회에 산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치자의 자질을 어떻게 계발시킬 수 있는 것일까란 질문뿐일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은 '경험' 그 자체도 아니요, '경험'으로 어떻게 사태를 전달할 것일까, 라는 질문일 수 있다. 이를테면 보수적인 한국의 유권자들은 삼성이 우리를 빨아먹으면서 잘되고 있다는 말보다는 삼성 덕에 우리도 이렇게라도 살고 있다는 말을 훨씬 더 잘 믿는다. 멍청해서일까? 경제학자(도)의 시선으론 그렇게 재단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 평론의 영역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른바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의 신봉자들은 강력한 유비를 가지고 있다. 가난한 집에서, 아이들이 좀 배를 곪을지라도, 가장인 아버지라도 일단 잘 먹여 일터에 내보내야 그가 벌어온 돈으로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는 식이다. 전혀 다른 영역을 관통하는 유비이지만 한국인들에겐 이것 말고 다른 유비가 없다는 게 문제다. 이걸 멍청하다고 조소하는 것은 자유지만 개혁적 시민들의 환상은 이와 얼마나 다른가. 그들도 경제학이나 사회학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고작 박정희/전두환의 자리에 조선일보 방 씨 가문이나 삼성 이 씨 가문을 올려놓고 "반독재 투쟁"을 하자고 시민들을 '선동'하지 않는가.

세상사를 잘 파악하는데 필요한 게 '독서'냐 '경험'이냐 묻기 이전에, 문제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서사'나 '유비'가 부족한 탓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이를테면 '마케팅'의 차원이므로, '앎' 자체의 문제와는 다르다고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홍보가 곧 정책"이라는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홍보처의 주장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내용'과 '수사'가 생각만큼 그렇게 엄밀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님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앞서 내가 지적한 것처럼 "삼성이 한국을 통치한다"라는 주장도 내가 보기에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수사'다. 그 말이 옳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통치'가 마치 전두환의 그것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결국 우리는 '서사'나 '유비'의 차원에서 싸우고 있다. 적어도 정치 평론의 영역에선 그렇다. 우리는 전문 지식이나 세부적인 맥락이 세상을 설명해낸다고 믿고, 물론 그런 믿음은 정당하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정치 토론은 부족 사회에 존재하는 다른 신화의 대립 비슷한 것이 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할 방도 따윈 사라진다. 그러나 그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호출해내는 지식이나 정보나 맥락이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의 '서사'나 '유비'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기능한다는 것 또한 엄연한 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평론가라면 메시지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서사'나 '유비'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직관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중요해지는 것이 '군대의 경험'이다. 특정한 '독서'나 '경험'에 대한 절대화를 경계했던 것처럼, 나는 군대 경험 자체가 한국 사회를 잘 설명해 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많이들 군대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세상을 잘 설명해준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물론 이런 인식이 만연한 건 인식의 차원이 아닌 실재의 차원에서도 한국의 많은 조직들이 군대 조직과 친화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비'가 먹히는 이유는 그런 구조적 분석을 넘어선다.

솔직히 말한다면 많은 한국 남성들은 군대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조직을 경험하며, (한국 사회에선 '군대 워너비'가 되어 있는 '초·중등학교'의 경험도 있지만 내 또래 청년들은 대부분 이곳에선 '조직'을 느끼지 못한다. 교사들은 물론 관료주의적이긴 하지만, 교장 교감을 제외한 교사들은 대개 동등한 입장에 서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조직'의 모습은 제한적이다) 그중 상당수는 거기서 마지막으로 조직을 경험한다. 취직하지 못한 이들, 일용직에 취직한 이들, 중소기업을 전전하는 이들의 경우는 군대 사회를 능가하는 조직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을 들어가지 않는 경우에는 확실하게 그렇다. 그리고 대기업이나 국가 기관이나 공기업을 들어가서도 그들 중 상당수가 군대 경험을 프리즘으로 그 조직을 평가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 '육군 병장 만기 전역'의 경험을 지닌 것이 정치평론가로서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겐 미안한 감도 있지만, 윤리 문제를 떠나 인식의 차원을 말한다면 그렇다. 2006년도에 군대에서 수화기를 들고 친구들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론자들 하는 말 들어보면 무슨 미국이 군대 고참인 줄 알아"라고 내뱉었을 때 나보단 군대를 빨리 다녀온 그 친구들이 박장대소하던 상황을 잊지 못한다. 이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은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서사 시인 주호민의 웹툰들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그의 데뷔작인 <짬>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공전절후의 히트작이 되어야 마땅할 <신과 함께> 시리즈를 보면 그가 묘사하는 모든 조직의 기반이 군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군대 경험이나 군대 경험을 프리즘으로 해서 바라본 사회생활의 경험을 통해 얘기할 때만이 한국 사회 시민들이 정치적 문제에서 '인물론'을 선택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접근할 경우 문제가 너무 싱거워져서 큰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상관이나 고참들이 하급자들에게 가지는 영향력은 너무나도 절대적이다. 이 사회에서 선량한 상급자들의 아량은 다른 사회의 그것과 비슷하겠지만, 선량하지 않은 상급자가 할 수 있는 짓거리들이 다른 사회보다 너무 많으니 문제다. 군에서 뿐만이 아니라 군 바깥에서도 그렇다. '제도'가 상급자의 '인성'을 제약하는 것을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 상급자의 '인성'이 세상 대부분의 문제를 좌우한다고 믿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군 간부가 나를 새벽에 깨워도 초과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체제에선, 그가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사단장 다니는 길'의 눈을 깔끔하게 치우기 위해 나를 새벽 세 시에 깨우는 인간인지 네 시 반에 깨우는 인간인지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 설명은 너무나도 '단순'해서 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균적인 사람들의 세상 인식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체 사람들은 왜 이명박이나 김문수가 일을 잘한다고 믿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그들이 공무원을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군 생활 경험을 보면 지휘관이 모든 병사에게 '좋은 사람'이기는 어렵다. 대부분은 둘 중 하나다. 참모병에게 '좋은' 지휘관이 있고, 병사들에게 '좋은' 지휘관이 있다. 대개는 이 두 개가 길항이다. 간부들과 몇몇 참모병을 지랄 맞게 괴롭히는 지휘관이 병사들에게는 무리한 일 안 시키고 휴가증을 잘 주는 '좋은' 지휘관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사람들은 이명박이나 김문수를 보면서 그 비슷한 경험들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이명박이나 김문수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라고 대답할 생각인가? 내가 보기에 그 말은 단지 당신이 새누리당의 지지자가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한번 뉴스 사이트로 가서 '박원순'이란 단어로 뉴스 검색을 해보라. 그리고 박원순의 행정이 어떤지를 보라. 그러면 사람들이 '일 잘한다'고 믿는 박원순의 모습이, 시도 때도 없이 공무원을 괴롭히는 것과 뭐가 어떻게 다른지 헷갈릴 것이다. 다만 당신은 "근데 <조선일보> 기사가 많이 나오더라. 너는 <조선일보>를 믿니?"라고 대꾸하고 싶어질 텐데, 이 경우 <조선일보>의 문제는 이명박이나 김문수에 대해선 그런 식으로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박원순 보도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공무원을 괴롭히는 것을 개혁이라 믿는 것, 에서 진보 개혁 세력은 얼마나 떨어져 있나? 대부분 우리들은 공무원은 아닐지라도 좀 다른 사람을 괴롭히길 원한다. 가장 힘센 사람들을 골라내서 괴롭히자는 이들이 이 사회에서 '좌파'라 불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력이 거기까진 미치지 않기에 대기업 정규직을 괴롭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희를 괴롭힐 것인지 삼성 직원을 괴롭힐 것인지 정도에서 차이가 생긴다. 대략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 둘을 다 괴롭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건희를 괴롭히자는 정치 세력은 없으니 삼성 직원을 괴롭히잔 정치 세력을 지지하게 된다. 가령 작년에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던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제' 논란을 생각해 보자. 이 화제를 생활인들에게 꺼내면, 평소 민주당에 적대적이지 않던 사람들도 그 제도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일까? "예비 엘리트들을 괴롭혀야 국가가 발전한다"는 그 총장님의 '애국심'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상식적인 생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개혁이란 것이 일정 부분 어떤 이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일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개혁이란 것이 종종 진행되면서 힘든 사람의 삶을 상향시키는 일은 쏙 빼버리고 나보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괴롭히는 일만 남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진보를 원하는 이들의 어휘로 오면 이것이 '기득권 세력'이란 명명을 통해 정당화된다. 소위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데엔 동의할 수 있지만, 이 말이 상황에 따라 '기자'나 '교사' 정도까지도 포함하는 너무 넓은 의미의 조어란 게 문제다. 가령 당신은, '등록금이 엄청나게 싼 국립 명문대를 다니는 대학생'이 기득권 세력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점에만 동의한다면 당신이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제'에 동의하는 것은 순식간인 거다.

누군가를 괴롭힐 권리를 지나치게 많이 허용하고, 바로 그 권리를 활용해서 '개혁'을 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인물론이 창궐하는 건 내 손을 떠난 볼펜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큼 자연스럽다. 물론 앞서 말한 '구조적 설명'의 딜레마처럼, 이 설명은 "그럼 난 앞으로도 연애를 못할 거란 말이냐?!"란 짜증 섞인 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 변혁이 가능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지점에서 사람들의 편견과 대면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착한 이명박'을 원하는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고 그들을 설득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이다.

이 칼럼은 <프레시안> 게재 후, 팀 블로그 '리트머스'에도 실립니다. (☞바로 가기 : 리트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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