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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쇼크! 중국을 따라야 일본이 산다?

[프레시안 books]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

갈림길에 선 일본

시간은 참으로 빠르다. '3·11'이 벌써 1년 전 일이다. 지진과 해일, 핵발전소 사고가 겹친 초유의 재앙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가 없다. 당장 피난 생활이 지속되고 있으며, 제염 작업도 채 끝나지 않았다. 과연 끝이 날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인 지경이다. 후쿠시마야말로 '그라운드 제로'인 것이다. 그곳에서 근대 문명은 멈추어 섰다.

막다른 곳에서 새 길이 열린다. 탈핵 운동의 규모와 호응은 1960년대 안보 투쟁을 능가한다. 국가와 기업의 조직적 은폐에 맞선 방사능 계측 운동도 인상적이다. 스스로 공부하고 측정하여 자신을 지키자는 것이다. 국가·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과 자활 운동이다. 뜻밖의 각성을 낳기도 했다. 전력이 부족해도 일상은 지속된다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탈핵을 통해 탈성장의 씨앗도 싹튼 것이다. 20세기 인류를 눈멀게 한 성장 중독증에서 비로소 헤어날 조짐이다. 마침 <아시히신문>도 신년 사설에서 '성장 사회' 너머 '성숙 사회'를 촉구한 바 있다. '근대의 우등생' 일본이 회심하는 것일까?

하지만 더 지켜볼 일이다. 성격을 달리하는 오사카발 하시즘(하시모토+파시즘)의 발흥도 만만치 않다. 민주당 정권이 표류하면서, 하시모토가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가 크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탈핵 지지와 기본 소득제 도입 등 일견 진보적인 정책을 취하는가 하면, 일각에선 파시즘을 우려할 만큼 배타적 국가주의 성향도 농후하다. 갈림길에 선 일본의 현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인 것이다.

일본은 20세기 초 간토 대지진과 대공황이 겹치면서 군국주의로 내달렸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다. 3·11과 장기 불황의 내우외환 속에서 21세기의 행보는 어떠할 것인가.

중국화하는 일본?

▲ <중국화하는 일본(中国化する日本)>(요나하 준(輿那覇潤) 지음, 文藝春秋 펴냄). ⓒ文藝春秋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지성이 출현한다. 최근 일본에서 화제인 <중국화하는 일본(中国化する日本)>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인문 교양서로는 드물게 출간 3개월 만에 5쇄를 찍으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저자 요나하 준(輿那覇潤)은 1979년생, 신성이다. 허나 그 안목은 어린 나이를 무색케 한다. 일본이 중국에 병합되고 만다는 따위, 통속적 중국 위협론과 격을 달리한다.

요나하는 2010년 전후 '일본 사회의 종언'을 감지했다 한다. 2009년 정권 교체, 2010년 미일 동맹 표류, 2011년 중일 국내 총생산(GDP) 역전 등 일련의 흐름 속에 3·11도 있는 것이다. 즉, 3·11은 새로운 사태의 출발이 아니라, 최후의 일격이다. 풍요로운 일본(이라는 환상)이 목하 안녕을 고하는 중이다.

이 역코스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 바로 '중국화'이다. 기존의 '서양화', '근대화', '민주화'를 대신하여 '중국화'를 마주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는 '변화'라기보다는 '반복'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세계가 개시되는 것이 아니라 1000년 전 송 대에서 출발한 '중국화'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게 된 것이다. 대체 무슨 말인가?

송은 문자 그대로 '획기적' 왕조였다. 귀족제가 철폐되고 황제 독재 정치가 시작된다. 경제와 사회는 자유로워진 반면, 정치 질서는 일극 지배로 수렴된 것이다. 중국형 근세(=초기 근대)의 확립이다. 그 제도적 기반은 셋이다. 과거제, 군현제, 시장 경제. 과거를 통하여 지배층의 문호를 전면 개방하고,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이동·영업·직업 선택의 자유도 강호에 널리 퍼졌다. 사람과 물자의 유동성은 최대한으로 높이되, 보편적 이념과 정치의 도덕화, 행정의 일원화로 체제의 질서를 유지한다. 이러한 송 대의 사회 구조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가령 탈냉전기 세계는 송 대의 확장판이다. 미국 일극의 세계 패권은 황제 일인의 전면적 권력 집중과 유사하다. 사회주의권과 발전 국가 해체로 탈규제화, 세계화가 전개된 것도 귀족제·장원제의 해체로 경제 자유화가 실시된 것과 판박이다. 더불어 주권 국가를 넘어선 전 세계적 정치 이념이 지구를 석권한다. 그래서 민주화를 명분으로 '정의로운 전쟁'도 가능해졌다. 즉 '역사의 종언'은 1989년이 아니라, 1000년 전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세계화 또한 미국화가 아니다. 중국화이다.

단, 일본만은 '중국화'에서 빗겨나 있었다. 그래서 중국화의 반대말은 '에도화'이다. 일본은 에도 시대라는 전혀 다른 근세를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구조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소위 '긴 에도 시대'이다. 왜 일본은 중국화로부터 단절되었나? 바다로 격절된 지리적 조건 탓이 아니다.

물적 토대가 부족했다. 출판 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제가 시행되기 위해서는 인쇄술 보급이 필수적이다. 그래야 지방 농민들도 수험 경쟁에 참가하여 관료로 발탁될 길이 열린다. 그래야 영토에 기반을 둔 귀족제도 허물어진다. 하지만 일본은 인쇄술은커녕, 종이조차 귀중품의 하나였다. 결국 상류 가문이 관직을 나누고, 가정 내에서 후계자를 양성하는 가직화와 가산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 활동 또한 시장 경제와는 판이했다. 무라(村)와 이에(家)에 기초한 '봉건형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중국화 : 서구화 : 에도화

일본에도 '중국화'의 계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놀랍게도)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을 '서구화'로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그 내실은 '중국화'였기 때문이다. 특히 메이지 초기는 중국화 일변도였다. 천황 옹립과 교육 칙어 발포부터 그러하다. 정치권력의 집중과 보편적 도덕 이념을 결합한 전형적인 '중화 왕권'의 탄생이다.

고등 문관 임용 시험은 어떠한가. 과거제를 통하여 경쟁 사회를 도입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다이묘를 대신하여 중앙에서 관료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중국풍 '군현제'가 실시된 것이다. 이로써 무사를 비롯한 신분 세습도 사라졌다. 동아시아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신유학이 19세기에야 일본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도 '중국화'의 일부이다.

신유학이야말로 서구화를 매개하여 근대 일본의 초석을 다진 사상이었다.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토지 매매 해금 등 대규모 규제 완화책으로 시장 자유화를 촉진한 것이다. 이처럼 메이지 일본은 다방면에서 송 대 사회와 흡사해졌다. 중국화=서구화가 진행된 것이다. 송 대의 세계화가 곧 서구화=중국화이기 때문이다.

그 탓에 중국은 서구화를 추진할 매력이 없었다. 신분의 자유도 시장의 자유도 이미 오래전에 달성한 것이다. 남녀평등과 참정권은 당시 서구에도 없었다. 왕정 폐지조차 예외적이었다. 대저 입헌군주제였으며, 지금도 왕실이 가장 많은 지역이 유럽이다. 선거는 어떠했을까? 신분 차별 없이 엄정한 시험을 거쳐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영재를 발탁하는 '과거'야말로 일종의 '선거'였다.

기실 '법의 지배', '인권', '의회제'는 모두 중세 귀족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왕권에 맞서 귀족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사실 유럽의 근대화란 그 특권을 하위 계층에게 나누어주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자산 계급 남성(제한 선거), 남성 일반(남성 보통 선거), 여성(보통 선거) 순으로 말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일거에 특권층을 해소한 바 있다. 그래서 정치 제도의 서구화도 필요치 않았다. 아니 과거에 합격하여 보편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대권을 통제하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과거가 곧 선거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러한 '중국화'는 몹시 낯선 경험이었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에도 시대에 대한 향수가 인다. 자유 경쟁 정책에 불만을 품고, 안정적인 에도 사회로 회귀하고자 한 것이다. 민중 봉기 또한 '시민 혁명'과 달랐다. 유동성이 큰 경쟁 사회에 저항하는 반동적 시도에 가까웠다. 결국 일본은 재차 '재에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겉으로는 서구형 의회 정치가 도입되었지만, 그 내실은 명망가가 자신의 지방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봉건제적 양태의 재연이었다. 전후 민주주의는 그 '재에도화'의 정점이다. 회사가 '무라'와 '이에'를 대신했을 뿐이다. 고도성장으로 지방의 '무라'가 도시의 '회사'로 옮겨 간 것이다. 회사의 고용 체제가 국가의 복지 체제를 대신한 것이니, 가직제와 가산제의 재편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자민당은 흡사 막부처럼 장기 연명할 수 있었다. 신 에도 시대를 방불케 했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1억 총 중산층'의 신화도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사회주의 국가'라고 할법하다.

그 중국화와 에도화의 갈등의 정점이 중일 전쟁이었다. 1000년의 역사적 분기가 경합하는 일대 '문명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실로 총력전 체제란 경제 구조의 에도화(사회주의화)와 정치권력의 중국화(보편적 이념과 집권화)가 뒤엉킨 기묘한 혼합체였다. 끝내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중국화한 정치 이념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은 아니다. 평화헌법 9조의 이상주의야말로 신 에도 시대에도 잔존해 있던 '중국화'의 유산인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의 일본을 '우경화'라고 갈음하는 것은 몹시 단순한 접근이다. '우경화'라기보다는 '탈에도화', 즉 전면적 '중국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품 경제의 붕괴로 근대적 무라와 이에, 즉 회사도 가족도 해체되고 말았다. 사회의 존재 양식이 끝내 1000년 전 중국과 유사해진 것이다.

'격차 사회'의 확대와 '자기 책임'의 강조도 '중국화'의 일면이다. 그런 점에서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야말로 '중국화'의 선도자이다. 자민당의 낡은 기득권(재에도화)을 타파하며 '제왕적 총리'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치의 중국화'이다. 오사카 유신회의 인기와 하시즘 또한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앙에 이어 지방 자치 또한 '중국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도 끝내 '중국화'의 막차에 올라탄 것이다.

일본의 중국화를 거스를 수 없다. 또 한 번의 반중국화와 재에도화는 북조선의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을 적극 수용하고 외국인 참정권도 부여하는 '인구 개국'을 궁리한다. 나아가 기왕 그럴 바, '전향적 중국화'도 주문하고 있다. 평화헌법을 한껏 내세워 동아시아 공동체의 보편적 이념으로 삼자는 것이다.

중국은 유학도 사회주의도 이미 접었으니, 평화헌법의 이상으로 일본이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는 일본에 대한 특단의 처방전을 내린 셈이다.

탈중국화 : 신중국화

이처럼 요나하 준의 견해는 참신하고 파격적이다. 1000년을 아우르는 사유의 기백도 호방하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비교하고 비유하는 재주 또한 빼어나다. 덕에 단숨에 읽힐 만큼 흡인력이 크다. 특히 일본의 근대를 중국화와 에도화의 길항으로 포착하는 구도는 백미가 아닐 수 없다. '탈아입구'의 허울이 일순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책을 덮자마자 물음표가 생겼다. '중국화'와 '에도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작 아시아와 서구 간의 차이와 긴장도 사라지고 마는 탓이다. 아시아도 서구도 결국 중국화로 합류하고 있을 뿐이다. 오로지 일본만이 남달랐다. '중국 중심론'과 '일본 예외론'이 매우 독특한 형태로 동거하고 있는 꼴이다.

게다가 이 장구한 거대서사는 그 호쾌함과는 달리 매우 암울한 뒤끝을 남긴다. '역사의 종언' 이후의 출로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1000년간 송 대 사회가 영겁회귀하고 있을 따름이다. 최후의 '재에도화'마저 집어삼킬 만큼 도저한 중국화는 온 누리에 파죽지세이다. 그래서 '전향적 중국화' 주문은 사족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 밀레니엄적 접근은, 도리어 철저하게 반역사적이고 몰역사적이다. 유라시아의 공간적 차이를 '중국화'라는 단일서사로 지우면서, 근세와 근대도 동일시하는 역사적 착오를 범하고 만 것이다.

송 대의 근세와 유럽의 근대는 다르다. 몹시 다르고 매우 다르다. 중국화와 에도화의 차이만큼이나 중국화와 서구화의 차이도 심원하다. 중국화는 결코 서구화가 아니다. 양자가 겹친 것은 일본의 '예외 상태'다. 근세(=초기 근대)에 근대를 투사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는 (엄연히 존재했던) 비자본주의적 대안 국가의 상상력이 닫히고 만다.

송 이후 원과 청은 어떠한가. 국가 너머 제국이며, 그래서 군현제로 일갈하기 어렵다. 오히려 복수의 정치체를 아우르는 봉건제적 속성을 속 깊이 품고 있었다. 그 결과 지방의 고유함과 자율성은 오늘날까지도 약여하다. '일국양제'라는 유연한 발상이 가능한 토대이다. 요나하의 비유를 빌자면 중국은 이미 '탈중국화'한 것이다.

시장 경제 또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아시아의 시장 경제를 대체한 것이다. 일국 내 독점과 국가 간 착취는 엄연히 근대의 산물이다. 시장 경제는 자본주의에 저항했다. 그래서 도처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지하(地下) 자원에 의존하는 산업(Industrial)혁명도 지상(地上) 자원에 터한 근면(Industrious)혁명과 다르다.

이 모든 (결정적) 차이들을 지워버리고 시장 경제=자본주의의 도식을 '중국화'라고 일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3·11 이후의 탈핵 운동이나 '사회주의 시장 경제' 또한 '탈중국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극 지배에서 지역별 다극화로 전환되는 작금의 세계 질서 또한 '탈중국화'이다. 즉 '중국화'는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완료)형이다.

'탈중국화'의 선두에 중국이 있다. 일국양제는 집권제가 아니며, 조화 세계는 보편 이념을 사절한다. '가치 동맹'이야말로 '중국화'의 정수다. 그러하다면 탈중국화=신중국화가 한결 적합한 독법이 아닐까? 옛 1000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 1000년을 궁리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는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라 말했다. 나는 반복이 아니라 반전이라 답하고 싶다. 3·11을 그 반전의 이정표로 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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