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로컬푸드 영농조합법인 '건강한 밥상'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오는 '건강 밥상 꾸러미'와 함께 보내온 편지에 실려 온 내용이다.
책꽂이에 꽂혀있던 <밥상혁명>(강양구·강이현 지음, 살림터 펴냄)을 꺼내서 다시 읽기 시작할 무렵부터 한 달에 10만 원을 지불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제철 채소를 포함해서 완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집에서 받아서 먹고 있다. 아니 오히려 '건강 밥상 꾸러미'를 신청하면서 <밥상혁명>을 떠올렸고 정독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도 같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변화는 먹을거리 생산에 치명타를 줄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2008년에는 먹을거리 가격이 폭등해 세계 곳곳의 기아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사실상 농업을 포기하는 정책을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더 늦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만 했다."
▲ <밥상혁명>(강양구·강이현 지음, 살림터 펴냄). ⓒ살림터 |
"그러면서 그들이 두 가지 열쇳말에 주목하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로컬 푸드'와 '식량 주권'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밥상혁명>은 결국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로컬푸드(local food)'와 '식량 주권' 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한 일종의 자료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책의 제목을 고민하다 '밥/상/혁/명/' 네 음절을 떠올렸다. 우리가 세계 곳곳에서 본 것이야말로 나부터 시작해 결국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들판에서 총 대신 보습을 들고, 장터에서 칼 대신 장바구니를 들고 세상을 바꾸는 중이었다."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바로 거기서 희망'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바로 우리가 본 희망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또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실천한다면, 바로 거기서 밥상혁명이 시작되리라"고 적시한 것을 보면 그렇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루쉰이 했다는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를 인용하면서 드디어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이제 이 책을 읽는 바로 당신이 한걸음 내디딜 차례다."
지은이들은 한걸음 내디디라고 등을 떠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왜'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 자신을 예로 들자면, 나는 <밥상혁명>에서 보여주고 있는 현실 인식에 대해서 대체로 동감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밥상혁명'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존중한다.
적극적으로 '운동'에 동참할 생각이나 여력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참여를 고려해 수도 있다는 정도의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사실 그 정도면 건강한 소시민으로서 충분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나'까지 그 길에 (적극) 동참해야하는가. 지은이들은 이 책에서 이런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먹는 먹을거리의 대부분이 원거리를 이동해 온 것이다 보니, 도대체 입속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가 어떻게 생산·유통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잊을 만하면 중국산 먹을거리에서 발암 물질이 발견되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도 바로 소비자와 생산자의 거리가 너무 먼 탓이다."
일단은 '로컬 푸드'가 그 해결의 첫 실마리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가 지역 먹을거리, 즉 '로컬 푸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맥도널드 사무총장은 '지역 먹을거리는 이동 거리가 짧아서 변질을 막기 위한 별도의 처리가 필요 없고, 대개 제철에 난 것이어서 건강에 더 좋다. 먹을거리 안전을 염두에 둔다면 지역 먹을거리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답했다."
내가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로컬 푸드 조합이나 생활협동조합 또는 농업 공동체에 동참하는 대신 '완주 로컬 푸드'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확하다. 어떤 경우에는 동지 수준의 깊은 참여가 전제되는데 내게는 그럴 열정과 여력이 없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노력과 의도에 비해서 밖으로 드러난 모습이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보였다. 조합원들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것 같아보여서 선뜻 참여하기가 망설여졌다.
완주로컬푸드의 '건강한 밥상 꾸러미'는 도시인 소시민인 내가 강렬한 동지 의식이 없이도 큰 부담 없이 조용히 참여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 같은 도시 소시민이 '그렇게 해볼까' 이런 잠깐 동안의 단순한 생각을 실천으로 연결하기가 편했을 뿐이었다. 그냥 문의하고 찾아보고 등록하고 조용히 받아보는 구조가 어쩌면 역설적으로 소극적인 잠재적 도시 소시민을 로컬 푸드 운동에 끌어들이는 창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량 주권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내가 발 딛고 선 땅에서 직접 먹을거리를 생산하자, 내가 먹는 먹을거리의 질을 스스로 통제하자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해법 역시 단순하다. 바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수만 년간 해온, 그래서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식량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지은이들은 이번에는 이 책의 또 다른 화두인 '식량 주권' 문제가 어떻게 지역 먹을거리 운동과 통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식량 안보를 대신할 식량 주권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지약에서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는 농업으로 생산한 먹을거리를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
자연스럽게 식량 주권을 위해 나같이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밥상혁명>의 답은 조금 허무하게도 이렇다.
"우선 소비의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왜?' 그리고 특히 '어떻게?' 그렇게 하란 말인가.
"코카콜라를 마시지 않기로 결정한 소비자는 그날 바로 생산자와 직거래를 할 수 있는 방법, 제철에 생산된 지역 먹을거리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찾는 시민은 곧바로 자기 입에 들어갈 소중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소농이 벼랑 끝에 선 사실도 깨달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그 때 '밥상혁명'이 가능하다."
어쨌든 도시 소시민인 나도 로컬 푸드 운동에 한 발을 걸쳤다. 하지만 <밥상혁명>은 그 너머의 성찰을 촉구한다.
"지역 먹을거리와 도시 농업이 환경을 살리고, 농민을 살리기 위해서 벌이는 활동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먹을거리를 바꾸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밥상혁명이 진짜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먹을거리를 둘러싼 온갖 문제를 밥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촛불 집회를 통해서 시민적 공감대도 형성하지 않았었는가. 하지만 여전히 안개는 걷히지 않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밥상혁명'의 프런티어에 선 선봉장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지난 세기 우리는 시장에서 단돈 100원이라도 깎는 주부를 보면서 '알뜰 주부'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이번 세기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남녀를 막론하고) 좋은 먹을거리를 제값에 사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사회, 더 나아가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칭송 받으리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먹을거리에 제값을 치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조금은 어긋난 예이기는 하지만 한 때 유기농 열풍에 과감하게 지갑을 연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여전히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매주 한 번씩 배달되면 10만 원어치가 안 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콩세알의 먹을거리를 대형 할인점에서 파는 것과 그렇게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다. 서울에서 아는 사람이 땀 흘려 생산한 좋은 농산물을 수확한 바로 다음 날 받아서 먹을 수 있는 사치를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이런 자족감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그것이 곧 성숙한 시민의 자질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몇몇 문장을 인용하면서 따라온 <밥상혁명>의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성찰을 통해서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인지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혹시 그래야만 된다고 강요하는 '당위'는 아닌지 그런 의문이 생긴다. 뭔가 다른 것은 없을까. <밥상혁명 2>가 답했으면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로컬 푸드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살고 있지도 않다. <밥상혁명>은 또 다른 '애정남' 윌리엄스의 말을 인용해서 소비 패턴의 우선순위를 알려준다.
"우리는 먹을거리의 우선순위를 따져야한다. 나의 경우에는 ①유기 농업으로 생산된 지역 먹을거리, ②관행 농업으로 생산된 지역 먹을거리, ③유기 농업으로 생산된 먹을거리, ④공정 무역 먹을거리 순으로 정하고 있다. 지역 먹을거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상황이 도래했음을 하루 빨리 인식해야 한다."
<밥상혁명>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동참을 촉구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지역 먹을거리 운동은 이웃과 함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다. 자, 당신은 이 변화에 동참할 준비가 돼 있는가? 시작은 어렵지 않다. 당신의 장바구니를 바꾸는 데서 '밥상혁명'은 시작된다."
크게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밥상혁명>은 내게는 선언처럼 들린다. 어떻게 실천이 이어져서 혁명이 될 수 있을지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감 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쉽게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밥상혁명>의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그 첫 걸음이 로컬 푸드 먹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작은 실천을 강조했으니 따라보려고 한다. 식량 주권 문제는 좀 더 복잡한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큰 프레임을 변화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할 것 같다. 그래도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는 정치 집단에게 이번 총선과 대선에서 표를 던지는 것으로 그 실천의 발을 내디디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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