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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테러도 불사하는 아이들! 어른들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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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테러도 불사하는 아이들! 어른들은 모른다

[괴물이 된 10대들]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

올해 졸업식에는 경찰들이 진을 쳤다. 원천 봉쇄된 반국가 단체의 집회인 양 경찰은 학교로 난 길목들을 막아서고, 오가는 아이들을 감시했다.

졸업식을 마친 아이들은 온순한 양처럼 경찰의 눈치를 살피며 앨범을 들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경찰 덕택에 험한 꼴 안 봐서 좋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들을 했다. 뭘 몰라도 저렇게 모르나 싶다.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졸업식 뒤풀이가 사라졌다고 믿어버리는 저 몽매한 감각이라니.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마이클 톰슨 등이 지은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김경숙 옮김, 양철북 펴냄)을 다 읽고, 대구 중학생 자살 소년의 유서를 정독한다. 수십 건이 넘는 임상 사례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성장기 아이들의 또래 집단을 분석한 기념비적인 저작을 완독하고서도 여전히 마음은 '마지막 딱 한 잔'이 부족한 술꾼처럼 서성인다.

그 풍부한 사례와 성실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자살한 소년의 유서에 견주어 보니 뭔가 모르게 허전하고 좀 한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전쟁터 참호 안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읽는 인생독본 같다고나 할까. 저자들이 시종일관 되뇌듯이 아이들의 생명력을, 우정의 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아이들의 또래집단을 이해하는 데에는 대단히 훌륭한 교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허전함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애착과 한국적 좌절

▲ <아이들의 숨겨진 삶>(마이클 톰슨·캐서린 오닐 그레이스·로렌스 J. 코헨 지음, 김경숙 옮김, 양철북 펴냄). ⓒ양철북

아이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영아기라고 부르는 갓난쟁이 시절이다. 부모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아이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초상을 만들어낸다. 부모의 애착이 아이의 사회생활의 양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애착은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한 쌍이 되는 것이다. 엄마에게 찰싹 달라붙어 젖을 빠는 아기를 연상하면 되겠다.

이러한 사회적 경험이 쌓이면서 사회생활에 대한 기대치가 형성된다. 애착 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하여 거절당하거나 억눌릴 것을 예상하는 아이는 동료에게 맞서지 못하고 위축되거나, 먼저 공격성을 내보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대번 이 나라의 불행한 아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를테면 외환 위기가 한국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양육 방식의 변화이다. 아버지의 외벌이로는 유지가 안 되니, 엄마까지 나서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부모와 애착 관계에서 끊어지게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이혼과 별거로 아이들을 홀로 키우거나 시골의 조부모님 댁에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는 오직 학원과 인터넷, 텔레비전뿐이었다. 뒤처지면 곧장 먹잇감이 되는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그나마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부모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했고, 그 학원에 다닐 비용을 대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했고, 그래서 더더욱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이 악순환의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또래 집단의 영향력 속으로 편입되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또래 집단은 성장기 아이들의 고속도로이다. 좋든 싫든 올라타서 질주해야만 한다. 뒤처지거나 오락가락하면 다른 운전자들의 공동의 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금세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은 항상 불특정 다수이자 그 자신 한 명의 성원으로 속한 바로 그 '애들'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거명한다.

'애들이요~' '우리 반 애들이요~' '우리 학교 애들이요~'로 시작되는 말들. 왜 그렇게 수업 시간에 발표를 안 하려고 하는지, 교사의 질문에 답을 하려 들지 않는지…. 다른 이유가 없다. 그 '애들'에게서 '나대는 아이'로 규정당하기 싫은 것이다. 수업 시간에 나대고, 학급 일에 앞장을 서고, 교사에게 개길 수 있는 것도 '잘나가는 아이', '센 아이'의 특권인 것이다.

얼굴이 지나치게 예뻐도, 옷을 눈에 띄게 잘 입어도, 수업 시간에 발표를 멋있게 해도, 교사의 사랑을 듬뿍 받아도, 아이들은 힘들어 한다. 바로 그 '애들'이 무섭기 때문이다.

친구 집단

교직 생활 첫 해에 만난 아이들은 중학생이었다. 어느 학교나 그러하듯, 공부 잘 하는 집단이 있었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집단이 있었고, 운동에 뛰어난 아이들이 있었다. 여름방학 때 서해안으로 학생회 간부 수련회를 갔는데, 이 세 그룹 아이들이 골고루 섞여 노는 자리에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열댓 명 사내아이들이 한 방에 모여 웃통을 벗어 제치고 어디서 배웠는지 트로트부터 7080가요까지 거의 100곡에 가까운 노래들을 쉬지 않고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누구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노는 모습은 처음엔 신선한 감동이었지만, 끝내 충격이었다.

그것은 우정 이전에 학교에서 유력한 집단들끼리의 권력 분점과 상호 연대를 공식화하는 일종의 회합이었던 것이다. 그네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소속감이었고, 각기 그 집단의 리더라는 긍지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유대는 절대로 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학교 폭력에서 핵심적인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다수의 방관자와 동조자의 존재다. 이 끔찍한 짓들이 자행되고 있음을 대개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제지하지 않으며, 피해자를 돕지도 않는다. 자신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의하면 청소년들 중에 극소수인 4퍼센트의 아이들만이 집단의 부도덕한 압력에 대항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집단 안에는 역할 구분이 있다. 리더와 어른의 총애를 받는 얼굴 마담이 있고,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바람잡이 혹은 분위기 메이커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희생양이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왕따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희생양에게 자신들의 사회적 불안을 투사하고, 아직 왕따가 아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안심하게 된다. 억압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온 아이들은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누군가는 이들을 '몰빵으로' 받아주어야 한다. 집단 속에 모든 것을 던져버린 아이들에게 개인의 도덕을 강요할 수 없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컬럼바인 고교 총기 사고의 범인 에릭과 딜런은 집단에서 거부당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학교 대표 운동선수에게 매일 놀림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이 극우 조직으로 알려진 '트렌치코트 마피아'의 일원이었던 것은 보상 심리가 작동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내의 또래 집단에는 끝내 끼지 못했고, 급우들과 기성세대로부터 극도로 단절되었으며, 결국 둘만의 심리 상태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낙담과 분노였다.

이 책에는 아이들로부터 '게이'로 놀림 받는 것이 싫어 여자 친구와 억지로 성관계를 갖고 끝내 여자 친구를 잃고 마는 소년의 사례가 나온다. 집단의 힘은 이렇게 강력하다. 집단에 남기 위해서 교복도 찢기고, 알몸으로 질주하는 것이다. 집단적 단결의 수단으로 극우 분자가 될 수도 있으며, 노숙인의 텐트를 습격하는 테러 분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동기'라는 중독 현상

이쯤하면, 이런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부모도 아니고, 형제자매나 교사도 아니고, 아이들은 왜 이렇게 또래 집단에 강하게 의존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아쉬움은 바로 이 소중한 질문을 던지지 않은 점이다. 그것은 아동기와 사춘기라는 시간을 별도로 설정하고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을 마을과 가족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학교라는 또래 집단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아동기와 사춘기, 이것은 근대적 육아에 고유한 것이며 근대적 육아 방식으로 생겨난 것이다. 17세기 유럽의 중산층에서부터 시작된 이 '아동기'라는 특별한 시간에 우리 모두는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서 보호받아야 하며, 교육받아야 한다는 근대적 환상이 이 모든 폭력적인 현실의 밑바닥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학교 폭력은 학교라는 공간 그 자체로부터, 거기서 생겨난 또래 집단의 갈등과 경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관점을 채택하지 않으며, 학교와 또래 집단이라는 고속도로를 어찌할 수 없이 모든 아이들이 올라타야 하는 당연으로 받아들인다.

집안에서, 마을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가면서 가족의 일원으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자라나던 시기가 있었다. 네댓 살부터 동생을 돌보고, 가축을 키우고, 논밭에서 일을 하고, 동네 형님, 마을의 언니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습득하던 시절이 있었다.

거기에 보호되고 양육되어야할 독립적인 시간대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학교에 갇혀 지식을 주입당하고, 어른들이 옳다고 규정해놓은 행동 방식을 일방적으로 습득당해야 하는 이른바 근대적 아동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래 집단 속에서 성장기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이 또래 집단의 영향력 하에 놓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일진들을 잡겠다고?

경찰이 이제 일진들을 잡겠다고 한다. 일진들은 더욱 성장할 것이다. 공권력의 탄압까지 뚫고 일어선 그들은 더욱 강력한 영웅이 될 것이다. 물론,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한 정책적 대안이 있을 수 있다. 학급당 학생 수를 20명 이하로 줄임으로써 교사와 학생의 대면 접촉을 늘려 서로를 더 '알게'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학급 자체를 여러 프로젝트로 쪼개는 '소사회(小社會)화 전략', 동일 학년, 동년도 출생자로 구성된 교실을 여러 연령대로, 이른바 '줄기모둠'(독일 및 유럽의 학교들에서는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는 개혁 교육학의 주제이다)으로 다변화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선배로부터 배우고, 후배를 가르치면서 자신도 공부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교가 폭력을 제어하기는커녕 폭력의 숙주(宿主)가 되어 있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학교 교육이 터해 왔던 모든 관행과의 혁명적인 수준의 단절이다. 그러나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다. 이 단절을 감행할 정치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이 혼란을 감당할 성숙한 내면적 준비를 우리는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프레시안



부모의 무기력을 인정할 때


그저 큰 아이가 잠든 방 앞에 서서 잠자는 아이를 바라보거나 이제 7개월이 된 둘째 아이를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눈에 눈물이 차올라요.

한 젊은 엄마가 저자 마이클 톰슨에게 털어놓은 감동적인 이야기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렇게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의 일탈과 폭력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마이클 톰슨이 솔직하게 말한다. 이 시대에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런 정도라면서.

이사하지 말고, 같은 집에서 계속 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말고, 직업도 바꾸지 말고 전화기 옆에 꼭 붙어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전화하지 않아도 꾸짖지는 마시고요. 당신이 자녀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해도 애착은 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미래의 대비책입니다.

저자는 끝내 '네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이 결국 잘 될 것이니라'는 낙관을 전한다. 과연,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감격에 겨워 글썽이는 눈길로 바라볼지언정, 아이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던진 말 한마디에 신경이 곤두서서 주말 내내 그 일로 골몰해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여, 당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라. 그때부터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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