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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 '소녀의 외침'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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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 '소녀의 외침' 이후!

[親Book] 김사과의 <테러의 시>

김사과의 새 소설 <테러의 시>(민음사 펴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 단어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단어들을 말했다. 테러, 시, 그리고 김사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것은 테러다. 이것은 시다. 이것은 김사과다. 끝. 그러니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사족일 뿐이다.

*

이것은 작가론이 아니다.
이것은 서평 또한 아니다.

*

물론 김사과의 소설들에는 설명, 아니 차라리 해명을 요구하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이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는가. 이것은 김사과가 출현했을 때 가장 먼저 제기되었던 질문이고, 이런저런 대답들이 제시된 후에도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장은정, '너무 슬픈 분노',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문학동네 펴냄), 185쪽)

분노, 공포, 광기, 폭력, 과잉, 관념…. 평자들이 김사과의 작품을 해설하기 위해 즐겨 동원하는 몇몇 단어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분노하고 그만큼 공포에 질려있고 그들이 사로잡힌 광기는 종종 과잉된 폭력의 형식, 혹은 정제되지 않은 관념의 장광설로 분출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런저런 대답들. 텅 빈 말과 공허한 제스처들. 언제나 모자라는 조각들. 질문은 반복된다. 아니, 그러니까, 이들은, 도대체, 왜?

▲ <테러의 시>(김사과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나는 이런 반복적인 질문과 대답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문학계의 일종의 비평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자체로는 별로 탓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종종 지루하고 게으르며 무엇보다 빈곤하다는 사실이다. 돌아오는 결제일마다 허덕이며 몇 장의 카드로 돌려 막듯, 이런저런 이론들을 동원하지만 결국은 실체 없는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다. 아니, 그러니까, '그들은', 도대체, 왜?

이 질문에 대해서라면 이미 훌륭한 대답이 존재한다. '젊은 작가 특집'이라는 이름으로 김사과를 다룬 계간 <문학동네> 61호에 실린 남궁선의 글이다(그녀는 문학계가 아닌 영화계에 종사하며, 김사과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이라고 한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아 내장이 쏟아져 나온 시체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그 방의 방문자들이 다들 책꽂이에 꽂힌 책 이야기라든가 커튼의 색깔이랄지 구석에 서 있는 화병의 무늬랄지 날씨 얘기 따위만 끝없이 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방에서 "그런데요, 여기 시체가 있는데요"라고 한 아이가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응, 그래. 우리도 알고 있단다"라고 한 다음에 다시 날씨 얘기를 한다. 아이의 눈에는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라고 한 번 더 외친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성가셔한다. "그래! 여기 시체가 있어! 우리도 다 안단다. 그걸 누가 모르니!" 아이는 화가 났다. "저는 이게 무서워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도 별로 좋지는 않단다." 그리고 그들은 또 날씨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아이는 귀찮게 한다. "이거 전쟁 중이라서 있는 거죠?" 이제는 귀찮다. "그래! 전쟁 중이니까 시체가 있단다." 아이는 눈물을 글썽인다. "사람들이 전쟁을 안 하면 방에 시체가 없어도 되잖아요."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사람들의 표정이 온화해진다. "어유, 그래, 착하고 훌륭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우리가 그런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우린 벌써 이 시체를 수백 년 동안 보아왔단다. 그냥 다른 얘기를 하자." 그러고서 그들은 다시 화병의 무늬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화병을 집어던져 깨뜨린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이 아이가 바로 김사과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 느껴지는데 그건 아주 기분 나쁜 거야. 일종의 뒤틀린 소시민 정서 같은 거. 그러니까, 다들 이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거잖아. 버텨내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아주 이상해, 명동 한복판에서 일본어로 절규하듯이 호객하는 화장품 가게의 점원에게서도 느껴지는, 뭔가, 그래, 아직은 외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식의 안도감. 필사적인데 분명히 아주 처절한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텅 비어버린,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필사적임. 이게 도대체 뭐지?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김사과, '작가 노트',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182쪽)

그래서 김사과는 화병을 집어던진다. 화병이 깨지는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운다. 정적.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이내 이어진다. 그들은 다시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가, 아니, 오히려 조금 더 들뜬 얼굴을 한 채, 화병을 던지는 행위가 가져온 어떤 충격과 그것의 행위 예술적 가능성과 깨진 화병의 조각이 만들어 낸 예상 밖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유, 우리가 너를 잘못 생각했구나. 미안하다. 넌 정말 당돌하고 예술적인 아이야. 당장 우리와 계약하지 않을래? 그런데 화병을 던진 이유가 뭐라고? 잠깐만, 여기 화병 하나 더 갖다 줘!"

그들은 안다. 우리도 안다. 무엇이 김사과와 그녀의 인물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방 안에 시체가 있고 세상은 전쟁 중이다. 세상은 전쟁 중이고 방 안에는 시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동시에 처절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평론가 조효원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절망적인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절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 너무나 절망적인, 지옥 같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옆 사람은 '너만 힘드냐, 다 힘들다'고 힐난하는 시대에 대해 김사과는 왜 힘든 것을 떨쳐버리려고 하지 않느냐, 왜 절망스럽다고 얘기하지 않느냐, 그렇게 항의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문학동네> 58호, '리뷰 좌담' 중에서)

재미있는 건 김사과의 소설에 대해 반복적인 질문이 던져지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김사과의 소설에서 화자의 입을 통해 종종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쏟아지는(너무 직설적이기에 오히려 관념적이라고 평가받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이렇게 묻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분노하는 거야? 이런저런 말을 하고는 있는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 절망적이고 지옥 같은 시대라는 건 이미 다 아는 거잖아. 그런데 설마 그것 때문에? 에이, 아니겠지. 내 보기엔 아마 아감벤(지젝, 바우만 기타 등등)적인 어떤 이유 때문인 것 같은데…" (물론 아감벤, 지젝, 바우만 기타 등등이 하는 이야기도, 적어도 그들이 인용하는 부분에 있어선, 김사과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진 않을 생각이다.)

여기 좀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문학에서 어떤 윤리를 찾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김사과의 소설에 대해 윤리라는 표현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작품 속에 넘쳐나는 분노와 광기, 폭력의 스펙터클 때문이겠지만 그들이 외면하고 있는 것을 직시한다면, 그러니까 그것이 "여기 시체가 있어요!"라는 외침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보다 더 윤리적인 게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것은 '내부 고발'에 가혹한 사회적인 정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윤리란 무엇일까? 언젠가 김사과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장되는 문학적인 윤리란 무엇인가? 제발트의 글을 통해 유추하자면 그것은 잊힌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파국의 풍경에서 통증을 느끼고, 결국 여행의 끝에 진짜로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윤리는, 엄청난 예민함에서 비롯된, 마비시키는 윤리다. 중단시키는 윤리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트의 글은 소설과 에세이, 허구와 비허구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글 더미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의 윤리가 무언가가 되기를, 어딘가로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광기가 우리 모두를 이런 폐허의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그것을 막으려는 의지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것이 전후의 지적/예술적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 회의주의다.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인 회의가 해체와 거부를 거쳐 마비로, 그러니까 완벽한 교착 상태로, 귀결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아무데도 갈 수 없다. (김사과,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프레시안 Books' 65호(2011년 11월 11일))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1111134117


그것은 폐허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바라보며 애도하고 그리하여 잊지 않는 마음이다. 가슴이 절로 따뜻해지는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선이 어떤 '이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고 난 자리를, 그러니까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애도해야 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자체다. 세계는 모든 수난이 끝난 뒤에 마침내 도래한 쓸쓸한 폐허다.

(이는 최근 한국 문학에서 주목 받고 있는 '묵시록적 상상력'과 연계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제2회 젊은 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과 김사과를 비교한다면 제법 재미있는 글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사과는 같은 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라는 단편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 상관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재미있는 일은 언제나 다음으로 미뤄지는 법이다.)

김사과는 묻는다.

그런데 이 비탄에 빠져, 아무데도 갈수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마음을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그건 이 회의주의를 가져온 원인 세계를 망각한 채로, 회의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일종의 종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혹은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며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윤리의 결과물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 윤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학뿐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데도 이르지 못하지만 오직 문학이 되게 하는 윤리. 그것은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신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문학에 대한 열광으로 전도시키는, 지극히 낭만적인, 마음의 구조다. (같은 글)


김사과가 바라보는 세계는 폐허가 아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고, 지금도 망가지고 있는 무엇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무엇이다. 많은 작가들이 기억하는 '좋은 시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살고 있다. 테러는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애도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살아갈 날들이, 망가질 날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김사과의 입장이다. 등장인물로 하여금 "하지만 두고 보자.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나와 b')라고 말하게 하는 그녀의 입장이란 말이다.

결국 남는 것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시선/입장이다. 그러니 질문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다시 화병이 놓였던 방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날씨를, 각자의 취향을, 문학을, 예술을 나아가 윤리를 논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소설에 감동하고 제3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해 매달 적은 돈이나마 후원할지도 모른다. 이름도 외우기 힘든 이국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질지도 모른다. 방안의 시체 때문에 호들갑을 떠는 아이를 보며 그 마음 씀씀이에 살짝 눈시울이 젖어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아이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원인 세계'(전쟁 중인 세상) 또한 바라보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방안의 시체는 그들의 애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애도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해야 할까. 그건 그들이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너무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리비도의 자기애적 퇴행 혹은 나르시시즘. 적절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자아를 기다리는 것이 우울증이라고 말한 것은 프로이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지식인/예술인들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무엇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들은 치유와 위로로서의 문학에 기댈 수밖에 없다(그리고 그것은 윤리와 가까운 친척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은 치유와 위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로 한다. 이건 말하자면 우디 앨런 식 농담이 현실로 드러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소년이 정신과 의사에게 말한다. "형이 미쳤나 봐요. 자신을 닭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데려와 보지 그러니?" 의사가 권하자 소년은 난색을 표한다. "안 돼요." "왜?" "그러면 계란을 못 낳잖아요." 우디 앨런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계란이 필요하다고.)

물론 그들은 '어른'이고,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관의 대립을,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비평 게임을 통해 문학적인 것의 자장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녀의 소설들은 안전하게 소비된다. 그 모든 외침과 분노와 항의는 젊은 작가의 개성적인 목소리로 환원되고, 그것은 우리 문학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다양성의 훌륭한 사례가 된다. 그 속에서 그녀는 '당돌한 아이'가, '무서운 신예'가, '문단의 테러리스트'가, '쾌활한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억울하고 또 분한 일일 것이다.

*

그러니 <테러의 시>는 일종의 선전포고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악의적인 과장과 신랄한 조롱으로 가득한, 그러나 하나하나 반박하려 들면 딱히 틀린 구석은 없는 그런 포고문으로. 그것은 일종의 '부코스키적(인 태도가 불가능해진 세상에서 펼쳐지는 부코스키적) 연애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펴냄)의 다소 모호한 결말에서 한 걸음 옮겨간 김사과의 입장이며, 또한 수없이 반복된 비평적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기도 하다.

김사과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녀에게 테러는 항구적이고, 세계는 지속되는 테러의 장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테러 그 자체인 것이다. 테러의 대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윤리적인 이들의 애도를 받는 행운조차 누리지 못한, 오늘도 '좆같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일종의 뒤틀린 소시민 정서"로 이 상황을 견뎌내고 또 버텨내는 우리들에게 그녀는 묻는다. 당신들이 밤이면 더러운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위안과 치유와 멘토들의 금쪽같은 말씀으로 넘실대는 저 스크린 뒤에 어떤 현실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모르겠다고? 그녀는 그 스크린을 찢는다. 최소한, 찢고 싶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테러로 느껴질지라도. 말하자면 이중의 테러.

'좆같은' 세상에서 '좆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좆같은' 경우에 처한 '좆같은' 인물에 집중했던 기존의 소설들과는 달리, <테러의 시>는 좆같은 '세상'에 집중한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모래폭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고립된 도시에서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며 돼지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던 연변 출생의 여주인공이 서울의 고급 섹스 클럽에 팔려 유린당하다 유력 고위 공무원의 눈에 띄어 가정부로 들어갔다가 학력을 속이고 일하던 원어민 가정교사와 도망쳐 버려진 철거촌에서 마약과 술에 찌들어 살다가 용역들에게 쫓겨나 길거리를 전전하다 강남의 대형 교회 목사에게 발탁되어 신앙을 거짓으로 간증하며 무료 급식을 얻어먹으며 연명하다 마침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의 모든 '좆같은 플레이스'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하자면 '서울을 여행하는 (운 나쁜)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다름 아니다. 이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여주인공은 철저하게 백지와도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그녀를 더럽히는 서울의 필적을 통해 김사과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봤지, 이게 당신들과 내가 사는 세상이야. 그러니 다시 한 번 물어봐. 니들이 하던 질문 다시 해보라고."

*

어쩌면 그건 이런 말인 지도 모르겠다.
문학의 윤리를 운운하는 너희들이야 말로 쓰레기라는, 그런 말.

*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서평이 아니다.

*

한 편의 소설로서의 <테러의 시>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형식. 각 장 별로 형식을 달리하는 소설의 형식은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을 닮았다. 누군가는 그 속에서 (그녀가 어떤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윌리엄 버로스를 볼 것이고 어떤 이들은 리차드 브라우티건을, 존 바스를, 토머스 핀천을 볼 것이다. 나는 도널드 바셀미를 본다. 특히 그의 <백설공주>를. 그녀가 정말 그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이미 오래전이 지나버린 유행으로 치부되는 포스트모던적 형식 실험을 21세기 한국에서 다시 읽는 일은 제법 재미있는 경험이다. 시를 꿈꾸는 그녀의 문체를 읽는 것 또한.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첫 번째 장의 배경을 모래가 끊임없이 쌓이는 무국적의(물론 그녀가 연변 출신이라는 설정이 있으므로 그곳을 연변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지만 그곳은 현실의 연변을 닮지는 않았다) 신화적인 도시로 설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할 것 같다. 그곳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이름 없는 여주인공에게서는, 어떤 미묘한 아우라가, 이를테면 어떤 신화의 시작을 보고 있는 듯한 희미한 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들 또한 (조금 비약을 하자면) 잘못된 시간, 잘못된 공간에 도착한 메시아의 수난으로도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죄악을 순결한 몸으로 끌어안는 그런 수난으로. (이것은 그녀의 단편 '정오의 산책'이 피로한 삶을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난데없이' 메시아가 되어 버리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오의 산책'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메시아주의와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문학동네> 61호에 실린 권희철의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를 참조했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구원도 없다.

*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은 어떨까?
잠깐, 이걸 나한테 물어본 거야?

*

가장 최근 발표된 에세이의 마지막을 김사과는 이렇게 썼다.

세계가 일련의 의미 없는 파국으로 이루어진 악몽으로 변해가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동물화하는 서로를 구원해야 한다. ('공백으로서의 청소년', <문학동네> 70호)

테러 혹은 선전포고를 넘어 마침내 그녀가 가닿을 어떤 지점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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