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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동반자, 박정희와 김일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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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동반자, 박정희와 김일성을 생각한다

[동아시아를 묻다] G2와 남·북

2012년과 1972년

2월 중순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했다. 10월 시진핑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첫 상견례가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도 손님맞이에 공을 들였다. 국가 원수 급 의전으로 미래 권력에 최상의 예우를 표했다. 물론 마냥 화기애애하지만은 않았다. 환율, 무역, 인권 등 주요 갈등 사안마다 옥신각신이었다. 하지만 대저 각자의 국내용 립 서비스에 가까웠다 하겠다.

대선을 앞둔 오바마는 (부대통령의 입을 빌어) 중국의 책임을 추궁하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했으며, 차기 주석 시진핑 또한 미국에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주요 매체 또한 두 지도자의 의도에 부응하는 모양새였다. 미국 언론은 '프레너미'라는 신조어를 통해 협력 하의 긴장 구도를 부각시켰고, 중국 언론은 시진핑의 성공적 방미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바야흐로 G2(주요 2개국) 시대가 닻을 올린 것이다.

시진핑의 방미는 신고식 이상의 남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중국은 5년 내 최대 수입국이 되어 '세계의 공장'을 넘어 '세계의 시장'으로 등극할 전망이다. 또 10년 내 국내 총생산(GDP) 규모에서도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청 제국 이후 절치부심 한 세기를 벼렸던 중국이 명실상부 '세계의 중심'(中國)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즉, 시진핑은 그 반전 시대의 첫 지도자가 될 공산이 크다. 근대의 시계추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대전환이 그의 집권기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얼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2019년), 혹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의 언저리가 되지 않을까.

ⓒUCLA

마침 이 반전 시대의 기원을 더듬는 학술행사가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열렸다. 시진핑이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고 닷새 후(2월 23일), 닉슨의 중국 방문 40주년을 회고하는 국제회의 'Nixon in China : A Legacy Revisited'가 개최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마오쩌둥과 닉슨의 조우가 탈냉전을 촉발하는 기폭제였으며, 오늘날 G2 시대의 출발점이었음에 견해를 같이 했다. 동아시아 냉전이란 곧 미중 대결(1950년)이었으며, 미중 화해(1971년, 키신저 비밀 방문)로 마감되었다는 것이다. G2 시대 양국이 공유하는 역사인식이라 하겠다. 한반도의 실감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

닉슨의 방중은 2월 21일부터 27일까지였다. 꼭 이맘 때 베이징과 상하이를 찾은 것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계절의 길목, 미·중 간 해빙기를 상징하는 날짜 선정인가 했더니, 저우언라이의 요청으로 3월에서 2월로 조정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기간 타이완에서 장개석의 총통 5선이 결정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최종 승리를 알리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던 셈이다.

닉슨이 날이 채 풀리기도 전에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중국을 방문하게 된 까닭이다. 저우언라이가 닉슨을 맞이하는 공항에서의 '세기의 순간'도 꼼꼼하게 연출되었다. 닉슨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기까지 저우언라이는 꾹 참고 있었다 한다. 1954년 제네바에서 그의 악수를 거부했던 국무장관 댈러스와의 악연을 뒤집은 것이다. '전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72 : 전환 시대의 한반도

당시 닉슨 방중이 초래한 거대한 변화를 '전환 시대'로 포착한 지식인이 리영희이다. 냉전 체제가 반환점을 돌아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꿰뚫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단한 삶이 증언하듯 그 예리한 시대인식은 (한반도에서는) 현실로 승화되지 못했다.

도리어 기민하게 '전환 시대의 논리'를 구현한 것은 일본이었다. 닉슨 쇼크를 재빨리 수습하고 미국(1979년)보다 한발 앞서 국교 정상화에 성공했다(1972년). 미국과 태평양 해바라기에서 벗어나 중국과 대륙과의 연계를 적극적으로 도모한 것이다. 마치 대륙을 경영하며 대동아를 꿈꾸었던 과거의 유산이 재가동되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초기 중국 진출 인사들 가운데는 제국일본기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호응하여 내부 발전 노선도 전환되었다. 태평양 연안 동일본 중심에서 대륙으로 향하는 서일본도 함께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른바 '일본 열도 개조론'(1972년)이다. 이렇게 미국과 중국, 해양과 대륙을 겸장하면서 일본은 전환 시대의 파랑을 타고 넘어 'Japan as No.1'(1980년대)의 정점을 구가하게 된다.

일본만이 아니다. 충격으로만 따지자면 타이완에 비할 곳이 없다. 유엔 상임이사국 탈퇴에 이어 줄줄이 단교가 이어지면서 국제 사회의 고아로 전락했다. 미군은 철수하고 '자유 중국'의 허울도 벗겨지면서 국민당 정권의 붕괴 가능성도 점쳐졌다. 흡사 장개석은 4·19로 하야하여 망명지에서 객사한 이승만의 운명을 따라가는 듯했다. 아들 장경국도 미국에서 대만 독립론자들에 의해 암살될 뻔했다.

국민당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점진적인 내부 민주화를 통해 돌파한다. 1972년 장경국 정권의 성립과 함께 국회 개혁, 지방자치 선거 도입, 타이완 본성인 등용 확대, 당과 정부의 세대 교체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여 정권의 내부 정당성을 확보해간 것이다. 부단한 체제 내 개혁을 통하여 '전환 시대'의 풍파를 견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달랐다. 7·4 남북 공동 선언의 쾌거는 잠시였다. 오히려 남북 대화를 명분으로 북과 남은 경쟁하듯 억압적 체제로 전환했다. 한국에선 유신 체제가, 북조선에선 유일 체제가 선포된 것이 바로 1972년이다. 닉슨과 마오쩌둥의 악수가 박정희와 김일성의 악수를 고무하기는커녕, 남과 북의 퇴행적 체제 대결을 한층 심화시킨 것이다.

아니 박정희와 김일성 간의 암묵적 합의는 있었다. 박정희는 유신 체제로 이행함을 김일성에게 미리 알렸다. 남북 지배 집단 간 묵계가 있던 것이다. 남의 유신 헌법과 (주석제를 신설해 수령 체제를 확립한) 북의 사회주의 헌법이 12월 27일에 동시에 발표된 것도 우연의 소치가 아니다. 분단 체제의 적나라한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기실 김일성은 미·중 화해가 촉발한 동아시아 데탕트를 절호의 기회로 포착했다. 타이완과 베트남 등 아시아에서의 미군 철수가 한반도 (재)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여긴 것이다. 주한 미군 또한 점진적으로 철수하고 일본군으로 대체하지도 않는다는 저우언라이-키신저 비밀 합의 또한 알고 있었다. 중국은 북조선과 베트남을 달래기 위해 미국과의 협상 내용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래서 파상적인 통일 공세에 나섰다. 서구와도 관계 개선에 나서고, 비동맹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한국의 타이완화'를 노린 셈이다. 만수대 예술단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서 공연하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터>에는 김일성 광고가 실렸다.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언론 인터뷰에도 그는 몸소 나섰다. 기존의 한일 조약 폐기 주장을 철회하고, 북·일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등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일본도 북일 무역 각서(1972년)를 체결하는 등 화답해 주었다. 한미 동맹과 한일 조약으로 북조선을 조여오던 1960년대의 구도가 일시에 역전되는 형세였다. 김일성은 한껏 고무되었다. 역사의 흐름은 자기편인 듯 했다.

착각은 패착을 낳는다. 그는 남북 대화보다 북미 협상에 중점을 두었다. 1973년부터 남북 평화 협정 대신 북미 평화 협정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미국과의 직접 담판으로 적대정책을 철회시켰듯, 북베트남이 미국과의 평화 협정으로 주월 미군을 철수시켰듯, 북조선도 미국과의 직접 접촉으로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 동맹을 와해코자 꾀한 것이다.

1975년 베트남 통일에 그는 더욱 환호했다. 즉시 베이징을 방문하여 무력 통일의 호기가 왔다며 '식은 죽 먹기'에 비유했다. 아시아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에 들어섰으며, 잃을 것은 군사 분계선이요, 얻을 것은 통일이라는 것이다. 재차 중국의 지원을 구한 것인데, 이는 1950년의 파국을 반복하려는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중국은 단호히 거부했다. 한반도를 다시는 미·중이 갈등하는 분쟁의 장소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 닉슨-마오쩌둥의 합의였다. 1976년 판문점 도끼 살해 사건에 중국이 보여준 반응은 실로 싸늘한 것이었다.

판문점 사건은 결정적 실책이었다. 서둘러 김일성이 직접 유감을 표했지만, 수습불가였다. 공을 들여온 비동맹 국가들마저 북조선을 비판(난)했다. 주한 미군 철수를 위해 다각적으로 전개해온 외교 공세가 일순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도리어 중국마저 주한 미군의 필요성을 묵인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나아가 팀 스프리트 훈련이 시작되는(1976년) 빌미도 제공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김일성은 '전환 시대'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주한 미군 철수를 통한 한반도 혁명, 즉 북조선 중심의 패권적 통일을 달성한다는 기존의 타성에 갇혀 있던 것이다. 오판이고, 착오였다.

박정희도 못지않았다. 그는 주한 미군 2만 감축으로 야기된 안보 위기를 강조하며 철통같은 총력 안보 태세를 역설했다. 김일성이 '전환 시대'에 한반도 통일의 기회를 포착했다면, 박정희는 체제의 위기를 강조하며 영구 집권을 모색한 것이다. 내부 민주화에 천착했던 타이완과는 달리 대통령 간접 선거와 유신 개헌을 도모하여 시대의 흐름과도 역행했다. 자신과 정권의 안보에 치중한 셈이다.

위기 극복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위기를 재생산하는 유신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결국 최측근에 암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역시나 '전환 시대'에 대한 적응 지체 때문이었다. 자주 국방, 방위 산업 육성, 핵무기 비밀 제조 등 마치 1970년대의 한국은 1990년대의 북조선을 방불케 했다. '선군 정치'의 원조였던 것이다.

돌아보면 (김영주를 제치고) 김정일이 부상한 것도 이 무렵이다. 사회주의 헌법 개정과 김정일의 중앙위원회 진입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주체 사상을 토대로 한 유일 체제 확립에 그의 연출력이 단연 돋보인 것이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공식 후계자로 지명된 후 2011년 숨을 거두기까지 북조선을 이끌었다. 작금 북조선의 유사 왕조 체제의 기원 또한 '전환 시대'(의 적응 장애)에 있던 것이다.

2012 : 반전 시대의 한반도

40년 전 역사를 복기해 본다. 김일성의 통일 공세도, 박정희의 선군 정치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었다. 40대 김대중의 패기만만한 도전이 그것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 보장을 주창했다.

박정희의 차가운 현실주의와 맞섰을 뿐 아니라, 김일성의 낭만적 모험주의와도 차원을 달리했다.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성도 겸비한, '전환 시대'의 실천논리를 제시한 셈이다. 그는 '그때 그 시절'에 지도자가 되었어야 할 인물이다. 6·15 공동 선언(2000년)에 이르기까지 남과 북이 감당해야 했던 기회 비용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모름지기 중용 중의 으뜸은 "時中", 때를 꿰차는 것이다. 적기에 역사를 움켜쥐어야 한다.

다시 세상이 크게 바뀌고 있다. 그 변화의 폭과 깊이는 40년 전보다 한결 더 하다. 전환에 전환을 보태 반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천하를 양분한 G2가 재차 한반도에서 좌웅을 겨루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우언라이와 키신저의 협상 테이블에 있었던 세 지역 가운데 타이완도, 베트남도 모두 '전환 시대'에 동참했다. 오로지 한반도만이 역주행하여 냉전의 '국지화'를 감내한 것이다.

현상 유지를 원했던 미·중과 중·일을 탓할 일이 아니다. 남과 북의 실력과 안목이 부족했음을 통절하게 반성하고 깨우칠 일이다.

하여 '반전 시대의 논리'를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와 집단의 출현이 갈급하다. 아무리 실권이 제한된 '상징 수령제'에 가깝다 한들, 북에서 1983년생 지도자가 등장했음은 가벼운 사태가 아니다. 남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실감도 없는 세대가 북의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겐 부산이나 광주보다 하얼빈과 창춘이 한결 친숙하다.

한국의 또래들이 북조선에 도무지 까막눈인 것과 매한가지다. 이 생활 감각의 분열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의 지체도, 또 한 번의 실기도 없어야 한다. 2012년, 반전의 실마리는 우리가 쥐고 있다. 40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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