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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老혁명가의 외침 "정치가 세상을 바꾸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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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老혁명가의 외침 "정치가 세상을 바꾸려면…"

[장석준의 '적록 서재'] 이슈트반 메사로스의 <21세기 사회주의>

20대의 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의 촉망 받는 철학도였다. 그의 지도 교수는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문예이론가 죄르지 루카치였다. 사회주의 체제로 접어든 지 이제 10년 가까이 된 나라에서 그런 스승의 총애를 받았으니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청년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1956년 이 모든 목가적 풍경은 비극의 한 장면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이 해에 헝가리 민중은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대중 혁명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온 천하에 보여주었다. 스탈린주의 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등에 업고 임레 너지의 개혁 정부가 들어섰고, 그의 스승 루카치가 인민교육부 장관을 맡았다.

그러나 곧 소련군이 들이닥쳤다. '사회주의 형제국'의 탱크가 헝가리 민중을 짓밟았다. 소련군은 헝가리 정부 각료들을 마치 전쟁 포로처럼 어딘가로 끌고 갔고, 그 행렬에는 루카치 인민교육부 장관도 끼어 있었다. 비록 너지 총리처럼 총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후 꼬박 1년 동안 루마니아에 유폐돼 소식이 끊겼다.

갓 스물여섯 살이었던 그에게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혁명의 격랑, 나치의 박해에도 살아남은 스승이 다름 아닌 자신의 필생의 이상 '사회주의'를 내건 강대국에 의해 사선(死線)에 섰다. 그리고 수많은 동포들은 사선 저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조국에서 그의 미래는 사라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다른 1956년의 투사들과 함께 서유럽(그의 경우는 결국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당시 서방 정부들이 헝가리 혁명을 두고 떠들던 것처럼 '반공'이 그의 새로운 깃발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승 루카치가 부여잡고 있던 깃발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아닌 사회주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이상이었다.

구사일생으로 고국에 돌아온 스승도, '철의 장막' 너머로 피신한 제자도 이 이상 아래서 철학적 사유를 계속 이어갔다. 사람들은 이들을 '부다페스트 학파'라 부르곤 했다.

한 동안 부다페스트 학파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비견되는 반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한 줄기였다. 하지만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1956년의 목표가 뒤늦게 실현된 것처럼 보였을 때, 부다페스트 학파가 대표하던 이상은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소련이 이식한 일당 독재 대신 들어선 것은 서방으로부터 이식된 시장 전제(專制)였다.

1956년 당시의 지배자들에게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금지된 이상이었던 것처럼,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백일몽일 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30여 년 전, 스탈린주의에 맞섰다가 조국에서 쫓겨나야 했던 그 사람, 이슈트반 메사로스(István Mészáros, 1930~)는 이번에도 단호히 반란자의 대열을 선택했다.

1995년, 신자유주의의 기세가 하늘을 찔러 누구(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루카치의 정신적 스승 헤겔을 빌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부다페스트 학파의 옛 동료 누구(아그네스 헬러)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로 전향할 때, 메사로스는 헤겔-마르크스주의의 파괴력이 여전함을 과시하는 1000여 쪽의 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 제목은 <자본을 넘어(Beyond Capital)>. 제목부터 시대에 맞선 역류 그 자체인 이 저작을 통해, 과거 국가 사회주의의 젊은 이단아였던 그는 시장 자본주의의 절정기에 그 극복을 촉구한 첫 번째 예언자가 되었다.

어려운 헤겔-마르크스주의의 문장들

▲ <21세기 사회주의>(이스트번 메자로스 지음, 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동연구소 옮김, 한울 펴냄). ⓒ한울
지금 내 책꽂이 한 귀퉁이에는 위압적인 두께의 <자본을 넘어> 영어판이 꽂혀 있다. 아니, 잠자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난 이 책을 사놓고 한 번도 정독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 엄청난 분량이 책을 손에 들 엄두가 나지 않게 한다. 누가 우리말로 번역해서 내주면 좋겠는데, 아직은 그런 소식이 없다.

그런데 비록 <자본을 넘어>는 아니지만, 메사로스의 다른 책 한 권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사실은 책 한 권이 아니라 한 권의 일부라고 해야 더 맞겠다. <21세기 사회주의>(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동연구소 옮김, 한울 펴냄)는 본래 2008년 저작 <역사적 시간의 도전과 책무(The Challenge and Burden of Historical Time)> 제9장을 따로 떼서 번역한 것이다.

책의 일부만 번역한 것이기에 분량은 그리 길지 않다. 200쪽 조금 넘는다. <자본을 넘어>의 빽빽한 영문 1000여 쪽과는 견줄 게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자본을 넘어>의 주요 주제를 발전적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표제에 어울리게 탈자본 사회의 지향 원리들, 가령 참여, 평등, 계획 등을 테제 식으로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이들을 관통하는 게 다름 아닌 <자본을 넘어>의 철학적 사유다. 말하자면, 이 책은 메사로스 다이제스트의 성격을 지닌다.

다만 주의할 게 있다. 요약본이 꼭 정본보다 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정본이 읽기는 더 수월할 수 있다. 분량은 길어도 저자의 사유 과정을 상세히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약본에는 이런 과정 없이 결론만 제시돼 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더라도 정본으로 보는 것보다 요약본 쪽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내가 보기에 <21세기 사회주의>가 그런 경우였다. 이 책에는 <자본을 넘어>의 사유가 밑바탕에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시간의 도전과 책무>의 다른 장들이 테제로 압축되어 있다. <역사적 시간의 도전과 책무>의 나머지 장들을 먼저 읽고서 접했다면 좀 더 쉽게 읽혔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21세기 사회주의>만 먼저 읽는 것은 결코 만만한 독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두 번 이상은 읽어야 그 깊은 뜻이 와 닿았다.

다행히도 번역자인 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동연구소는 <역사적 시간의 도전과 책무> 나머지 장들까지 모두 번역해서 새로 낼 계획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21세기 사회주의>만 놓고 몇 번을 반복해야 읽어야 하는 일은 없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어려움은 그대로 남는다. 그것은 헤겔-마르크스주의 특유의 난해함이다. 주로 독일 쪽 좌파 저작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이 난해함은 프랑스 쪽 저자들의 그것과는 색깔이 전혀 다르다. 프랑스 저자들이 현학적 인용과 새로운 개념어를 남발하는 멋 부린 장광설로 독자를 골탕 먹인다면, 독일의 경우는 헤겔로부터 비롯된 길고 복잡한 변증법적 문장으로 독서를 힘들게 한다.

부다페스트 학파의 태두인 루카치야말로 헤겔-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다. 어쩌면 그야말로 독일 좌파의 난해한 문풍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제자 메사로스 역시 이러한 문풍에서 예외가 아니다. 한 문장 안에서 복수의 명제들이 서로를 한정해 새로운 의미 층을 형성하며 복잡한 복문 구조를 이루는 변증법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21세기 사회주의>는 원문을 충실히 직역하고 있어서 이런 분위기를 우리말로 그대로 전달한다.

이런 난점들을 뚫고 서너 번의 반복 독서를 통해 이 책을 샅샅이 훑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21세기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원리들의 확인이다. 어떤 모델이나 상세한 지침은 아니다. 단지 원리들이다. 가령 21세기 사회주의가 추구해야 할 참여의 원칙에 대해서는 더없이 강력한 철학적, 역사적 논거를 제시하지만, 그 참여가 앞으로 어떤 모양새로 실현될지 손에 잡히는 뭔가를 던져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좀 불만스럽기도 하다.

영국이나 미국 쪽 저자가 썼다면, 이와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미국의 시장 사회주의자 존 로머 같은 사람은 주류 경제학자마냥 수식과 도표를 동원해서 자신의 대안 사회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꼭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구체적인 제안들을 담은, 미래 사회주의에 대한 다른 저작들과 비교하면, 메사로스의 책이 특히 더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고 그러한 밑그림에 꼼꼼히 색을 칠해 넣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전자에게 꼼꼼한 색칠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후자에게 큰 그림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후자에 비해 전자가 너무나 희귀하다. 메사로스는 21세기 사회주의의 모색에서 바로 이러한 큰 밑그림을 제대로 그려주고 있다.

극복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자본 시스템

메사로스가 <21세기 사회주의>에서 제시하는 미래 사회주의의 지향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불가역성, 참여, 실질적 평등, 계획, 이용에서의 질적 성장,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의 변증법, 의회주의에 대한 대안, 교육. 얼핏 봐서는 몇 가지 독립적 쟁점들의 나열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통일된 문제의식이 이들을 꿰뚫고 있다. 그것은 '자본 시스템(capital system)'의 극복이라는 근본 과제다.

현실 사회주의의 뼈아픈 경험에 대한 메사로스의 성찰의 결과가 바로 이 '자본 시스템' 개념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와 실패는 단지 '자본주의'를 형식적으로 폐지했을 뿐 '자본 시스템'을 그 뿌리부터 극복하지는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4년 만에 낸 저작의 제목 "자본을 넘어"는 곧 '자본 시스템'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다.

'자본 시스템'이라니,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잘 와 닿지 않는다. 도대체 '자본주의'와 '자본 시스템'이 어떻게 서로 다르다는 말인가? 이것을 <역사적 시간의 도전과 책무>의 '서문'을 쓴 존 벨라미 포스터는 이렇게 요약한다.

"자본 시스템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결합된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제도 질서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노동력의 착취에 근거한 자본 체제(regime of capital)를 말한다." (12~13쪽)

나 자신 메사로스의 '자본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자본을 넘어>를 정독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대강 그 대의는 알 만하다.

일단,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중요한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이것은 지난 두 세기간 좌파가 상식적으로 사용한 '자본주의'의 의미, 그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분명 이런 의미의 자본주의를 폐지했다. 주요 생산 수단은 사적 소유에서 국가 소유로 전환되었다. 전통적 공식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 해방의 결정적 돌파구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메사로스는 위와 같은 의미의 '자본주의'가 폐지되더라도 '자본 시스템'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자본 소유자가 자본가에서 국가로 바뀌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노동력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력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 전반의 불평등과 지배, 억압 역시 계속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과거 소련, 동유럽 그리고 현재 한반도 북쪽의 모습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모든 기업이 국가 소유이거나 협동조합인 어떤 사회가 있다. 이 사회는 분명 자본주의는 아니다. 그런데 이들 기업이 자본주의 사기업과 마찬가지로 시장 경쟁 안에 있으며 경쟁의 척도가 오직 수익성 하나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 사회는 메사로스적 의미의 자본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노동자들은 경쟁 기업에 대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여전히 경영진의 명령에 따라 노동을 하거나 '자발적인' 노력 경쟁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 기구의 중앙 집권 형 계획에 따라 생산이 이뤄진 스탈린 시기의 소련은 어떠한가? 이 사회도 분명 자본주의는 아니었다. 더구나 여기에서는 기업 간 경쟁도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사로스적 맥락에서는 이 경우도 자본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의 한 유형일 뿐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적 경제 계획의 목표는 급속한 수량적 성장에 있었고 노동자들은 이러한 계획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경영진의 명령에 따른 노력 경쟁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노동력 착취의 사령탑이 국가 기구로 이전 혹은 확산되었을 뿐 착취 자체는 의연히 관철되었던 것이다.

메사로스의 '자본 시스템' 개념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메사로스의 문제 설정이 적어도 트로츠키주의자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스콜라적 논쟁보다는 훨씬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고 나서 수십 년 동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현실 사회주의를 과연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번잡한 논쟁을 계속해왔다. 지금도 이들 사이에서는 과거 소련 사회를 자본주의 아닌 어떤 사회로 봐야 한다는 입장과 국가 '자본주의'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다.

이런 불모의 논란에 비하면, 메사로스의 문제 틀은 분명 생산적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통상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어떤 사회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본 시스템 자체의 극복은 국유화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트로츠키 사후 트로츠키주의를 늪에 빠뜨린 소련 사회 성격론에 비하면 훨씬 깔끔한 정리다. 게다가 교조화된 레닌주의적 '혁명'관으로 환원될 수 없는 더 근본적이고 다양한 과제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도 아주 유용하다.

노동 시간이 아니라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되는 사회

따라서 메사로스가 강조하는 대안 사회의 지향 원리들은 몇 가지 덕목이나 과제를 즉흥적으로 나열한 것이 결코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따위의 상투적인 영역 구분에 따라 구색을 맞춘 것도 아니다. <21세기 사회주의>의 제8장 "교육"이 그런 의미의 '교육 정책'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읽는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메사로스가 제시하는 원리들은 어쩌면 동일한 과제의 서로 다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본 시스템의 극복이라는 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여러 노력들이다. '사회주의' 하면 '국유화', '중앙 집권 형 계획', '일당 독재' 등을 떠올리는 기존 상식에 맞서 메사로스는 '참여', '실질적 평등', '이용에서의 질적 성장' 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상식을 바꿔나가길 원한다.

많은 흥미로운 통찰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카를 마르크스의 '가처분 시간(disposal time)' 개념을 재발굴해 강조하는 대목이다.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같이 쓴 <철학의 빈곤>과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른바 '그룬트리세')>에서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시간의 문제 설정, 즉 노동 시간과 자유 시간의 관계로 접근한다(물론 <자본>에서도 이 논의는 계속 이어지지만). 그러면서 이 '가처분 시간' 개념을 제시한다.

가처분 시간은 간단히 말해 자유 시간이다. 자본주의 발전이 수반하는 필요 노동 시간 단축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확보되는 자유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새로운 사회의 척도는 가처분 시간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실질적 부는 모든 개인의 발달한 생산력이다. 그러면 부의 척도는 어쨌든 이제(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재인용자) 노동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가처분 시간이다." (97쪽에서 재인용)

메사로스는 이 논의를 이어받아, 21세기 사회주의는 가처분 시간을 척도로 한 새로운 회계 원리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러한 회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잘 상상이 안 된다. 아쉽게도 메사로스 자신은 철학적 수준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학문 분과에 걸쳐 풍요로운 결실을 낳을 광맥을 제대로 짚은 것만은 틀림없다.

치열한 논쟁도 예상된다. 가령 이제까지는 마르크스주의 내에서도, <고타 강령 비판>에서의 마르크스의 또 다른 언급을 바탕으로, 대안 사회의 회계 원리를 노동 시간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되는 새로운 사회주의상은 이런 관성과의 대결 혹은 단절을 예고한다.

자본이야말로 초의회적 세력, 그렇다면 탈자본 정치는?

또 다른 흥미로운 통찰은 제7장 "의회주의에 대한 대안 : 물질적 재생산 영역과 정치 영역의 통일"의 논의다.

이 장에서 메사로스는 짧지만 아주 인상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자본은 우리 사회 질서에서 최고의 초(超)의회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졸저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책세상 펴냄)의 핵심 주장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1976년 영국 외환 위기 당시 노동당 정부의 선택 그리고 1981~83년 사이 프랑스의 반복적 외환 위기 상황에서 당시 미테랑 좌파 연합 정부가 보인 대응을 분석했다. 이 두 사례는 단순히 좁은 의미의 경제적 위기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방향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해가던 초국적 자본 세력과 이에 대해 걸림돌 역할을 하던 좌파 정부 사이의 정치적 대립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단지 제도 정치 내의 우파 정당들을 통해서만 좌파 정부에 맞섰던 것이 아니다. 자본은 결코 의회 안에, 좀 더 일반화해서 대의 정치의 룰 안에 자신을 가둬본 적이 없다. 오히려 자본은 좁은 의미의 정치 바깥에서 주요 전장(戰場)을 찾았다. 자본에게 가장 유리한 지형, 즉 이 무렵 막 떠오르고 있던 초국적 금융 시장이 이들이 선택한 전장이었다. 이 지형 안에서 좌파 정부는 처음부터 자본에 포위된 형국이었다.

자본이 이렇게 초의회적인 정치 행위를 펼친다면, 좌파 역시 마땅히 전 방위적인 정치 전략을 구사했어야 했다. 하지만 주류 좌파는 좀처럼 제도 정치 바깥으로 행동반경을 넓히지 못했다. 좌파에게 유리한 의회 밖 지형, 가령 노동 현장이나 지역 사회의 대중 운동과 접속하려는 기획이 거의 없었다. 나는 한 세대 전 좌파가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막을 수 없었던 근본 원인을 여기에서 찾았다.

메사로스는 이러한 진단을 "자본이야말로 초의회 세력"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더없이 명쾌한 진단이다. 그러면서 21세기에 필요한 좌파 정치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사회주의 운동이 지방적, 전국적, 전 지구적/국제적인 모든 정치적, 사회적 투쟁 형태에서 의식적으로 능동적인 혁명적 대중 운동으로, 즉 한계가 있겠지만 활용 가능할 때에는 의회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무엇보다도 대담한 초의회적 행동이라는 필수적 요구를 주장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대중 운동으로 다시 표출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 시스템의 주요 세력들의 적의에 직면하여 성공할 수 없다." (162쪽)

나는 이와 비슷한 주장을 <신자유주의의 탄생>에서 좀 다르게 표현한 바 있다. 이 책은 한 동안 좌파 정치의 거의 유일한 무대였던 국민 국가 수준의 정치를 생활 세계의 정치, 지구 질서의 정치와 (재)접속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끝맺는다. 옥중의 안토니오 그람시가 당대의 전 지구적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정치'를 재사고하는 데서 찾았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위기에 대한 대응 역시 생활 세계, 국민 국가, 지구 질서를 교차하는 새로운 '정치'를 발명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요점은 우리가 주어진 정치 지형(정치 제도일 수도 있고 정당 구도일 수도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정치 자체가 사회에 끼워 맞춰진 방식일 수도 있다) 안에서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정치 지형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자본에 맞서는 정치는 항상 새롭게 (재)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메사로스가 이 과제에 대해 덧붙이는 힌트는 "물질적 재생산 영역과 정치 영역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을 영원히 역사적으로 실행 가능하게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149쪽)이다. 이것 역시 그다지 구체적인 지침은 아니다. 하지만 80여 년의 굴곡 많은 생을 배경으로 한,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훈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단서에 살을 붙이는 일은 이제 20세기의 이 치열하고 정직한 생존자가 아니라 '21세기 사회주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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