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규의 <천하국가>(소나무 펴냄)는 동아시아 역사 공동체의 성격 분석에 탁월한 성과를 보여준다. 토머스 바필드의 <위태로운 변경(The Perilous Frontier : Nomadic Empires and Chian, 221 BC to AD 1757)>이 중국과 변경 지역 유목 민족의 관계를 다루었다면, 이 책은 중국의 천하에 대한 개념과 책봉 조공 체제의 특성에 대해 매우 선명하게 접근해나갔다.
두 책이 서로 다룬 내용의 유사성이 보이면서도, 김한규는 동아시아 세계의 기본 구조를 해명하는 작업에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룩해 놓았다. 중국이라고 하면 흔히 한(漢) 민족을 중심으로 사고하기 십상이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토머스 바필드는 이들과 변경 유목 민족과의 관계가 언제나 대립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서로 상호 침투하고 보완하는 역할도 했다고 보았다.
김한규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는 출발점을 보이고 있는 듯하지만, 토머스 바필드가 파악하지 못한 중국의 세계관과 그에 기초한 화이(華夷) 질서의 의미를 정리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는 동아시아는 중국만이 아니라 중국과 별개의 독자성을 가진 나라와 민족들이 함께 이루어낸 역사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전통 시대에 동아시아에서 유기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던 주요 성분으로는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베트남(南越), 초원 유목 공동체(蒙古), 티베트(吐藩), 요동(遼東/滿洲), 일본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들 나라들은 각각 별개의 역사 공동체를 형성하여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하면서, 동시에 다른 나라들과 더불어 동아시아 세계라는 한 차원 높은 역사 공동체를 형성하여 공동의 운명과 문화를 서로 나누었다."
이러한 공동의 질서는 중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책봉의 관계를, 그리고 그 나라들은 중국과 관련해서 조공의 관계를 가지면서도 서로 독자적 개별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책봉 조공 체제의 성격
▲ <천하국가>(김한규 지음, 소나무 펴냄). ⓒ소나무 |
한편, 비 중국 국가들은 중국 국가가 제시한 관계의 한 유형을 선택하여 동아시아 세계 질서 안에서 안정된 위상을 확보함으로써 국가적 안보를 보증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역과 문화 교류 및 국내 정치에서의 정권 안정이라는 부수적이나 매우 중요한 소득까지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전통 시대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질서는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라 외교적 이익의 일치에 따른 상호 합의에 의해 형성되었으니…."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중국과 우리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 논쟁도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정리될 수 있다.
고구려 그리고 요동사
"역사가 사물을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였음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 만약 고구려가 어느 역사 공동체에서 건립한 국가인지 혹은 어느 역사 공동체를 지배한 국가인지 하는 문제를 설정한다면, 그 답의 대체는 고구려가 한국의 국가도 아니고 중국의 국가도 아닌, 제 3의 요동 국가라는 것이다.
보다 엄격하게 표현한다면, 고구려가 요동의 동부에서 건립되어 요동의 중심부로 발전해나간 전기에는 순수한 요동 국가였다고 해야 할 것이고, 고구려가 그 발전의 방향을 남쪽으로 선회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강 일대를 점령하는 후기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한국 일부를 아울러 지배한 통합 국가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 인식에 근거해서 김한규는 "고구려사는 한국사나 중국사상에서는 주변적 요소에 지나지 않은데 반해 요동사상에서는 핵심적인 가치와 위상을 갖는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과 주장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일방의 입장에서 어떤 특정한 역사 공동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위상과 의미를 짚어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변화의 과정을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가를 보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역사 공동체 인식은 서양사에서는 이미 정리된 문제이기도 하다. 로마사는 로마의 역사로 그치지 않고 유럽사 형성의 기본이 되고, 비잔틴 역사는 오스만 역사와 겹치면서 각기의 독자성과 함께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역사 공동체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각 개별 역사 공동체의 특수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 공동체 밑바닥에 깔린 문명사적 기초와, 그걸 바탕으로 전개되는 보다 큰 차원의 역사 공동체의 성격을 아울러 해명하게 해준다.
변경이 아닌 주체
그래서 김한규의 <천하국가>는 중국적 세계 질서의 역사적 전개 양상만 아니라 각 역사 공동체로서 초원 유목, 요동, 서역, 티베트, 강저, 만월, 대만 등을 모두 포괄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은 토머스 바필드가 "변경"이라고 규정한 위치로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 공동체를 구성하는 당당한 주체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조금 더 본질적으로 중국의 세계관을 논해보자면, 김한규는 "천하(天下)가 하늘의 뜻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질서로 이해하고 국(國)은 제후, 가(家)는 경대부가 책임지는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정리한다. 이러한 큰 틀 안에서 중국(中國)이란 4방에 존재하는 4국의 중심에 있는 국(國)이며, 따라서 이와 같은 인식은 주변 4국, 또는 사이(四夷)와 유기적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리고 이 4국과 중국의 관계는 예(禮)로 그 질서가 유지되면서 안정과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전통 시대의 관념이며, 근대 이후 중국이란 역사 공동체와 국가 개념이 혼합되어 나타나고 이것이 근대적 국제 관계의 질서로 편입되면서 여러 가지 변용을 겪게 된다. 책봉과 조공이라는 관계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 국제 정치학이 놓치고 있는 것들
그러나 이러한 천하국가의 개념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도 착시 현상이다. 중국이 동아시아의 거대 제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미국의 자본주의 제국과 중국의 전통적 중화 체제로의 복귀가 서로 맞물려 대립과 긴장 그리고 일시적 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전통 시대의 천하국가의 질서라는 관점으로 보지 않는 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이 발생한다.
과거의 역사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파악하는 역사학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동아시아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걸 재편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중국의 천하국가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임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중국은 지난 2000년 동안 동아시아의 중심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을 발휘해온 실체다. 따라서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만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분석하고 그걸 기본 구성 요소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단견이다.
김한규의 저작은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동아시아의 역사 공동체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김한규의 책과 함께 신채식의 <동양사 개론>을 함께 읽어본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신채식의 책은 독보적이다.
김한규와 같은 학문적 성실성과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현대 국제 정치학이 간과하고 있는 지점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보다 거대한 문명사의 관점과 역사 공동체의 실체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절실한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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