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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외로운 미국'을 품을 때!"

[동아시아를 묻다·16] '태평양의 세기'를 환영한다

2011년과 2012년

태평양이 술렁입니다. 출발은 미국이었습니다. 이라크에서 불명예 철수(당)한 미국이 '태평양의 세기'를 선언한 것입니다. 동아시아로의 귀환을 천명한 것이지요.

오바마도 힐러리도 미국의 미래는 아시아에 있다며 합창합니다. 11월 하와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발리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정상 회의는 미국의 귀환을 알리는 신고 무대였습니다. 미국, 중국 간의 신경전이 치열했다지요. 중국 부상을 아시아 개입의 명분으로 삼은 탓입니다. '선제 외교'(preventative diplomacy)라고도 하더군요.

허나 외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와이에서 발리로 가는 길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들린 것입니다. 다윈의 공군 기지에 미국 해병대를 주둔시킨다고요. 250명에서 시작해, 2500명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달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역시 오키나와입니다. <오키나와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군사 확대의 발소리가 들려온다"며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지켜볼 일입니다. 심각한 재정 적자로 나라살림이 거덜 난 미국입니다.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기도 했고요. 무력시위를 계속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2012년 대선을 겨냥한 '내수용' 발언일 공산이 큽니다. 공화당의 파상 공세에 대비한 '선제 공격'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 허장성세에 비하자면, 정작 큰 사태는 북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김정일이 급사한 것입니다. 하루 빨리 '강성대국'의 초석을 닦아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그의 목숨부터 앗아간 꼴입니다. 설왕설래가 난무하지만, 북조선이 건국 이래 최대의 시험대에 들어섰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울먹이는 20대 청년의 앳된 얼굴에서 '마지막 황제' 푸이의 곤혹이 묻어납니다. 그 깊은 고뇌가 그들만의 것은 아니겠지요.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체가 중차대한 기로에 섰습니다. 돌아보면 동아시아론이 미국과 북조선을 정면으로 감당해 왔다고는 말하기 어렵지 싶습니다. 아무래도 한-중-일 삼국지가 도드라졌지요. 미국에는 비판적 거리를 취하고, 북조선은 애써 외면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참에 미국의 귀환과 북조선의 변고를 동아시아론을 쇄신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일입니다. 도리어 김정일의 죽음으로 새 시대의 기운은 한층 완연해졌습니다. 그의 죽음이 마오쩌둥의 죽음과 겹쳐 보이는 까닭입니다. 개혁 개방과 탈냉전에 버금가는 '신시기'를 예감해 봅니다.

급격한 변화는 지양하되, 근본적 변화는 지향할 일입니다. 과연 1910년과 1950년에 필적할 2012년이 도래했습니다. 게다가 '임진년'이라지요.

항산(恒産)과 항심(恒心)

일각에선 동아시아에 신냉전의 전운이 감돈다고 합니다. 일견 그럴싸합니다. 오바마가 호주에서 해병대 주둔의 논리를 설파하는 동안, 힐러리는 태국과 필리핀을 누비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환태평양 경제 협정(TPP) 참여 의사를 표명했고, 한국에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통과되었습니다. 군사와 경제 양면에서 중국 포위망이 구축되는 형세입니다.

왕년의 동맹국들이 소환되어 대륙 봉쇄라는 낡은 논리가 재가동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착오가 실현될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합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살림살이를 좌우하는 최대의 교역국이 중국인 까닭입니다. 아시아의 활력은 중국의 개혁 개방과 한 몸으로 엮여 있습니다. '자력갱생'을 고수하며 '고난의 행군'을 자처했던 기왕의 중국이 아닌 것이지요. 신냉전은 한낱 망상입니다.

무릇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을 낳습니다. 지난 세기 아시아가 태평양 건너 미국을 해바라기했던 것도 아시아-태평양(Asia-Pacific)이라는 물적 토대가 튼튼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원조로 경제의 기틀을 닦고, 그 방대한 시장과의 연계로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세기'는 '일본의 기적'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온갖 병폐와 부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상호 이익이 분명했던 호시절이었지요. 허나 항산의 근거가 바뀐 지 이미 오래입니다. 아시아-태평양의 원조는 미국이지만, 그 아시아-태평양은 이제 중국이라는 심장을 달고 약동합니다. 몸 가는데 마음 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과거를 고수하는 것은 '지체 장애'이거나 '허위의식'입니다.

아직도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쪽이 어디인지를 냉철하게 따져볼 일입니다. 세계화에 가장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가 미국이라는 통렬한 비판은, 미국을 가장 사랑하는 <뉴욕 타임스>의 논객 토머스 프리드먼의 진단입니다.

지난 연말 중국, 일본 정상 회담은 그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역력하게 증언했습니다. 세계 2, 3위의 경제 대국이자 세계 1, 2위의 달러 보유국인 양국이 엔과 위안의 직접 거래를 약속한 것입니다. 달러 의존에서 점진적으로 탈피하겠다는 것이지요. 양국의 통화 교역으로 거래 비용을 줄이겠다는 뜻입니다.

그 첫 조치로 일본은 5억 달러의 중국 국채를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경제의 기축이 아시아로 기우는 한 이 '합리적인' 흐름이 꺾일 수는 없습니다. 대세를 역전시킬 역량이 미국에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중국 봉쇄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유일한 방안은 옛 동맹국들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허나 그럴수록 구조 변동과 세력 전이는 촉진될 것입니다. 역사는 단 한 번도 특정 국가를 편애한 적이 없습니다. '미국 예외주의'가 허용될 리 만무하지요. 그저 무심히 흐르고 또 흐를 뿐입니다.

미국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의 세기'를 선언한 것이겠지요. 미국이 "탈구입아"(脫歐入亞)하고 있습니다. 대서양 국가에서 태평양 국가로 변신 중입니다. 오바마가 외쳤던 구호가 'CHANGE' 아니던가요. 그래서 저는 '태평양의 세기'를 높이 삽니다. 네오콘의 '새로운 미국의 세기'에 비하자면 얼마나 진일보한 것입니까.

텍사스 카우보이의 그 대책 없는 안하무인과는 수준을 달리합니다. 이 자기 교정 능력이야말로 미국이 축적한 실력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치러야 했던 각성의 대가는 혹독했지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미국을 도와야 할 때입니다. 그 변화의 몸짓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북돋아 줍시다. 중동에서의 패착을 태평양에서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환대할 일입니다.

즉, 미국을 태평양으로 감싸 안아 동아시아에서부터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주객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동아시아 정상 회의도, ASEAN+3도 아시아가 주인이고, 미국이 손님입니다. 만사에 미국이 앞장섰던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19세기의 '흑선'도, 20세기의 '점령군'도 아닌 것이지요.

이 또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반전 시대'의 조짐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이 미국으로 하여금 리더십만이 아니라 파트너십도 배울 수 있는 훈련장이 되도록 협조합시다. 상부상조의 협동 정신으로 신태평양을 건설해갈 막중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서양과 태평양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미국은 누가 뭐라 해도 근대 최초의 탈식민 독립 국가입니다. 유럽의 식민주의로부터 가장 먼저 벗어난 자유의 등불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의 독립 선언서는 두고두고 자부할 만한 도덕성의 원천입니다. 허나 태평양에서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서양에서 배운 식민주의의 못된 습성을 답습하는 작태를 부렸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맺어진 미국과 아시아의 악연이 그러합니다.

아편 전쟁을 기폭제로 열강들의 동아시아 쟁탈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미국 또한 태평양에 이르는 바닷길을 개척했습니다.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를 빼앗아 자국의 영토로 삼고 태평양 연안까지 가닿은 것입니다.

그리고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를 건설합니다. 이 대사업에 중국 노동자들이 대거 동원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노예 해방이라는 빛나는 성취가 무색하리만큼 쿨리에 대한 박해는 야박하고 가혹했습니다.

아시아로 가는 길목에는 하와이도 있었습니다. 하와이 왕국을 지키려는 토착 지배자들의 분투는 눈물겨웠습니다. 일본을 방문해 국책 이민을 요청하여 미국의 인구 잠식에 맞서고자 했고, 중국에서는 이홍장을 만나 아시아의 연대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중국, 일본 협력을 강조한 것이니, 하와이발 아시아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 모든 시도들은 물거품이 됩니다. 하와이가 미국에 최종 합병된 것은 1898년이지요. 같은 해 쿠바와 필리핀도 미국에 병합되었습니다. 대서양 건너 최초의 독립국이 태평양 너머에서는 이러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류큐를 처분하고, 타이완에 출병하고, 조선에 진출한 것과 동일한 사태라 하겠습니다. 그 최종 산물이 일본이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취하기로 한 가쓰라-테프트 밀약(1905년)입니다. 20세기의 아시아-태평양은 이렇게 미국-일본 합작으로 태동한 것입니다.

미국 서부와 아시아의 고약한 인연은 냉전기에도 여전했습니다. 아니 '냉전'이야말로 대서양의 용어입니다. 미국-서유럽, 소련-동유럽은 말 그대로 냉전이었지요. 하지만 태평양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제1, 2차 세계 대전을 능가하는 열전이 장장 30년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국공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이 그러합니다.

이 세 전쟁에 미국은 깊이 개입했습니다. 아니 진주만까지 고려하면 동아시아와 미국 간의 전쟁은 40년이나 지속된 셈입니다. 그 결과 미국의 서부가 전면적으로 재탄생합니다. 군수 산업과 미디어 산업이 일대 번영을 구가하게 되지요.

로스엔젤래스에서 차를 타고 잉글우드-토렌스-롱비치-오렌지카운티를 달리다 보면, 록히드 마틴을 필두로 즐비하게 늘어선 군산복합체의 총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냉전기 국방비 증대와 연구 개발 확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캘리포니아이지요. 그래서 보잉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등 첨단 산업의 메카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실리콘벨리가 공산권 연구의 거점인 스탠포드 대학의 지척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우연의 소치가 아닙니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장구한 전시 체제로 미국의 서부는 부흥했던 것입니다. 1966년 '마마스 앤 파파스(The mamas & the papas)'가 노래했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의 이면에 아시아의 절규가 있었습니다. 할리우드의 서부극과 전쟁 영화에는 어두운 역사의 무의식이 깊게 새겨져 있지요.

미국이 일본, 중국, 북조선, 베트남을 상대로 40년에 걸친 전쟁을 마무리한 1980년대. 캘리포니아는 역설적으로 그 교역의 80퍼센트를 아시아에서 충당하게 됩니다. 미국의 한 주(州)라기보다는, 동아시아의 한 국가(國)에 가깝게 변모한 것입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인구 이동의 가교였습니다. 코리아타운, 차이나타운, 리틀 도쿄, 리틀 사이공 등 동아시아의 축도를 방불케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들에도 아시아계 학생들의 약진은 두드러지지요. 실리콘벨리도 인도계와 중국계가 과반을 점하고 있습니다. 냉전을 거치며 캘리포니아와 (동)아시아는 하나의 생활권이 된 것입니다. 흡사 대동아 공영권에서 만주국을 대신하여 캘리포니아가 편입된 꼴이라고나 할까요?

그로부터 30년. 이제는 미국 전체가 캘리포니아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태평양의 세기' 선언은 그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하겠습니다. 허나 21세기의 태평양이 20세기를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서부 출신의 대통령들, 닉슨과 레이건과 부시를 보노라면 한층 그러합니다. 태평양은 영어로 'Pacific', 한자로는 '太平洋'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평화의 바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대서양에서 미국의 지상 과제가 탈식민이었다면, 태평양에서는 응당 탈제국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탈제국은 동아시아의 탈식민, 탈냉전과도 깊이 연동합니다. 그래서 '제국의 슬픔'도 걷어내고, '마지막 18세기 국가'라는 오명도 떨쳐내게 합시다. 그 막대한 군사 비용을 국민 복지와 삶의 질 증진에 투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줍시다. '태평양의 세기'를 두 손 들어 환영하는 까닭입니다.

ⓒ연합뉴스

AP(Asia-Pacific)와 AA(Afro-Asian)

미국의 명예로운 철수를 위해서는 동아시아 내부의 균열과 적대를 청산해야 합니다. 여일 씨가 거듭 강조하는 바로 그 지점이지요. 그래야 역내 분열을 고리삼아 이곳에 눌러 앉으려는 헛된 미망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 숱한 내부 모순 가운데, 지금껏 거론되지 않았던 한 가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로 AP(아시아-태평양)와 AA(아시아-아프리카)의 균열입니다. 냉전기에 아시아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남북한과 남북중국, 남북베트남의 분열을 반영이라도 하듯 아시아 또한 AP와 AA로 분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깊이 반목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AP와 AA의 일대 격전장이었습니다. 중국의 대규모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북조선도 공군을 파병했음이 최근에 밝혀졌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국공 내전의 지속이자 한국 전쟁의 연장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른 아시아를 건설해갔던 AA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심했습니다. '죽의 장막' 너머에서 약동했던 또 하나의 아시아에 대해서는 지의 공백 상태가 여전합니다. 가령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앞서 1963년 자카르타에서는 대안적 올림픽 GANEFO(신흥국 경기 대회)가 개최되었고, 1966년 방콕 아시안 게임 때는 프놈펜에서 아시안 가네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규모와 세력을 따져보아도 AA는 결코 AP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들에 도무지 까막눈인지라 한국의 동아시아론이 한반도 주변만을 배회하는 것입니다. AP와 AA를 아우르는 사유 지평의 확장과 심화가 요청되는 것이지요. 우리 세대가 감당해야할 숙제라고 하겠습니다.

흔히 미국-일본-아시아로 형성된 수직적 분업 체제를 '아시아주의의 독소를 뺀' 대동아 공영권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대동아의 이념만 제거하고 그 뼈대는 재활용했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그러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 '독소의 이념'의 행방에만 주목해 보겠습니다.

서구 주도의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 너머의 세계사를 열겠다는 대동아의 이념은 원폭의 버섯구름과 함께 사라졌던 것일까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아시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죽의 장막 너머 중국이 주도했던 AA가 그것입니다. 일본에서 발신했던 근대 초극의 상상력이 마오쩌둥 사상과 문화 대혁명과 제3세계론에 여실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1950~60년대의 중국은, 그들이 맞서 싸웠던 1930~40년대의 일본을 사상적으로 계승한 셈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적색 아시아 공영권'라고도 했었지요.

즉, 대동아는 두 개의 유산을 낳았습니다. 그 정신은 중국발 AA로, 그 몸통은 미국발 AP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간의 냉전 연구는 AP에 집중되었으니, 이제는 AA를 보탬으로써 완결판을 선보여야 합니다. 언급하신 타이완과 몽골과 싱가포르를 제대로 아우르기 위한 첩경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AA에 중화주의의 유산과 대동아의 이념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지 않았나 추적 중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주도했던 AP만큼이나 중국이 이끌었던 AA에도 비판적 긴장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 AA의 후신이 대중화라면, AP의 연장은 태평양이 아닐지요. 대중화와 태평양 사이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궁리할 일입니다.

AA에 참여했던 북조선과 AP에 깊숙했던 한국의 재회를 염두에 둔다면 매우 현실적인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북조선의 아시아 감각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무지합니까. 몽골도 싱가포르도 좋습니다. 하지만 먼 곳으로 이월하기 전에 주변부터 살펴 내실을 다집시다. 실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입니다.

실험과 실용

AA는 좌초했지만, AP는 성공했습니다. AA를 이끌었던 중국이 AP로 투신했음은 상징적입니다. 동남부 연해의 특구를 AP와 접속시킨 것이 바로 개혁 개방입니다. 그리고 불과 30년 만에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했습니다. 일본과 네 마리 용과 중국까지. 그만큼 AP의 토대는 견고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AA는 그 이념을 뒷받침할 뼈대가 없었습니다. 구호만이 나부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명무실 와해된 것입니다.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에 우선합니다. 맹자의 빼어난 통찰은 이토록 무섭습니다.

양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을 두고 '실험적 공간'과 '실용적 공간'을 분별하는 논법이 책상물림의 투정 같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현장은 살균된 실험실이 아닙니다. 숭고한 사상과 이념이 실제에선 재앙과 파국을 낳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현실 감각과 균형 감각이 절실합니다.

기실 노무현 정부가 구상했던 동아시아에도 '실험'의 계기가 없지 않았습니다. 동북아 위원회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로드맵에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이 우선했었지요. 그 다음은 중국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확보하는 동아시아형 지역 경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국 내 계급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 내 국가 격차도 완화하려 했습니다. 이는 실험이 아닌가요? 경제 성장은 곧 실용입니까? 그런 이분법이 탁상공론의 맹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FTA이고, 어떤 경제 통합이며, 어떤 시장 체제인지를 구체적으로 따지고 검토해야 합니다.

적어도 초기 동북아 위원회는 신자유주의가 대세라며 한미 FTA에 투항했던 재정경제부 관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위원회의 일부는 사퇴하고 정부와도 척을 졌던 것입니다. 그 차이를 소홀히 여기지 맙시다. 실험과 실용이 본디 하나임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참뜻입니다.

정책적 동아시아 구상이 장기적 모색보다 단기적 과제에 치중했다는 지적도 십분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위적 비판으로 그치고 마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정책으로부터 사상을 구하고 나면, 그 사상의 실험은 어디에서 실천할 것인가요? 저도 민간과 지방이 주도하는 새로운 경로의 동아시아를 탐구하고, 비판적 지식인들의 연대에도 관심이 큽니다.

하지만 그 최종심급에 국가가 버티고 있음을 한 순간도 잊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지난 정부의 과오를 좀 더 끈질기게 따져 묻고, 두 번 세 번 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의 자산이 불어납니다. 그러하다면 단기 과제에 치중하는 폐단이 단지 동아시아 정책만의 문제가 아님도 자명해질 터입니다.

즉, 현재의 정치 제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모순이 큽니다. 소선거구제가 민심을 왜곡하고, 5년 단임의 권력 구조가 백년대계를 어렵게 하는 것이지요. 근시안적 정책을 양산하는 구조적 제약이 뚜렷한 것입니다. 이 한계 지점을 돌파해 가야 합니다. 여일 씨가 꿈꾸는 동아시아의 실험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매우 실용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일국의 정치 개혁이 동아시아론과 무연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남쪽은 물론이요, 이행기에 접어든 북쪽에서는 한층 더 그러합니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남과 북의 실험과 실용이 합류하여 무사태평의 큰 복이 가득하기를 성심껏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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