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이 작가는 나의 쿨한 '섹스 파트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이 작가는 나의 쿨한 '섹스 파트너'!

[이명현이 사랑하는 저자] 안톤 체호프

'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신년호를 '내가 사랑하는 저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사랑하는 저자와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저자와 만나는 기쁨을 누리길 기대합니다.

내게 안톤 체호프는 함께 늙어가는 만감이 교차하는 오래된 애인 같은 존재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소설과 희곡을 모두 다 빠뜨리지 않고 읽은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만 반복해서 읽어왔으니 작품 편식증에 걸렸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는 내 삶의 교차로에서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내 마음속으로 밀물처럼 몰아치며 찾아와서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고는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곤 하는 야속한 소녀 나그네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학교를 대표해서 종로도서관에서 열렸던 독서 캠프에 참가했었는데 두어 주 동안 매일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일이 반복되었다. 캠프가 끝나갈 무렵 학교 대항 문학 퀴즈 대회가 열렸다. 나는 3학년 선배와 함께 짝을 이루어서 우리 학교 대표로 참가했다. 우리는 무적이었다. 그 선배가 워낙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터라 우리는 아주 쉽게 상대방을 제압하고 우승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답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 선배의 입에서 먼저 정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기여한 것은 단 두 문제였다. 그 선배가 <주홍글씨>의 여주인공이 가슴에 새기고 다녔던 글자 'A'의 스펠링을 말하다가 헛갈리고 있을 때 내가 정확한 스펠링을 말했었다. 그리고 안톤 체호프의 <바냐 외삼촌>에 나오는 바냐 외삼촌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라고 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내 입에서 먼저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날 문득 체호프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승부욕에 불타서 TV 퀴즈 프로그램 참가자를 위한 책을 구해서는 달달 외운 다음 문학 퀴즈 대회에 참가했었다. 비록 그 선배의 기세에 눌려서 외운 것을 제대로 한번 써먹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고비에서 두 문제를 맞힐 수 있었다. 그렇게 체호프를 처음 만났다. 물론 그의 작품은 단 한편도 읽지 않았다. 하지만 퀴즈 책을 통해서 작품 제목과 줄거리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특성을 모두 외우고 있던 탓에 마치 내가 그의 작품을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던 체호프의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안톤 체호프 희곡집> 정도의 제목이 붙은 책을 찾아냈다. 뒤적거리다가 '바냐 외삼촌'을 읽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퀴즈 문제집을 통해서 내가 멋대로 생각해서 만들어놓은 '그'는 체호프가 아니었다. 내가 상상해서 머릿속으로 써놓은 '바냐 외삼촌'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단숨에 희곡집을 읽어 버렸다. 내친김에 체호프의 소설도 찾아서 읽었다.

물론 그 나이에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가슴을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소년이 그 자신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겪을 수도 있는 분노, 절망, 시기심, 위로, 꿈, 이런 것들이 체호프의 작품 곳곳에서 사실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울면서 체호프를 읽었다. '바냐 외삼촌'을 읽을 때는 작게 소리 내면서 울면서 읽고 또 읽었다. 고단한 등장인물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동감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측은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독선적인 퇴직 교수 세레브라코프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를 정말 미워했다. 저주했다. 27살에 불과한 그의 젊은 아내 엘레나 안드레예브나가 불쌍했다. 그녀를 향한 연민이 넘쳐났고 일기장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급기야는 '바냐 외삼촌'을 고쳐서 다시 썼다. 블라디미로비치를 죽이고 그의 젊은 아내를 구출해내는 유치한 작품을 만들었다. 물론 주인공은 나였다. '바냐 외삼촌'의 다른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이 작품을 편식하면서 내 멋대로 그렇게 읽고 있었다.

유학 시절에 체호프를 다시 만났다. 벼룩시장에서 영문판 체호프 희곡집을 싼값에 샀다. 이번에는 읽는 속도가 느렸다. 영어로 읽어야 하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내마음속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냐 외삼촌인 보이니스키 이반 페트로비치가 눈에 잠깐 들어오긴 했지만 내 마음은 주로 의사인 아스트로프 미하일 리보비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퇴직 교수의 전처의 어머니인 보이니스카야 마리아 바실리예브나와 유모인 마리나의 고단한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바냐 외삼촌'을 만약 그때 다시 고쳐 썼다면 아스트로프 미하일 리보비치와 엘레나 안드레예브나가 열정적인 사랑에 못 이겨 같이 도망치는 식으로 결말을 맺었을 것이다. 여전히 퇴직 교수를 미워했지만 그의 삶의 피곤한 일상과 얼마 넘지 않은 생애를 잘 마무리했으면 하는 연민도 생겼었다.

연구실을 같이 쓰던 러시아인 친구에게 체호프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발음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튀어나오는 그 이름들은 이국적이면서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당시 내겐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나는 그 러시아 발음으로 듣는 이름들을 통해서 또 다른 '바냐 외삼촌'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그 친구가 러시아어로 된 체호프 희곡집을 갖고 와서 내게 읽어준 적이 있었다. 그의 낭독과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싱크 시키면서 나만의 황홀한 '바냐 외삼촌' 공연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바냐 외삼촌인 보이니스키 이반 페트로비치와 같은 나이가 되면 '바냐 외삼촌'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흔 일곱 살 그 나이가 되었다. 마침 친한 선배가 체호프 희곡집을 다시 번역하고 있었다. 그 책이 나오면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출간 예정일이 두해나 지났는데 아직 그 책을 출간되지 않고 있다. 늘 '조만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대기 중이었다.

▲ <체호프 희곡 전집>(안톤 체호프 지음, 김규종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마흔 일곱 살을 한두 해 넘겼지만 드디어 다시 '바냐 외삼촌'을 읽었다. 그 선배가 추천해 준 <체호프 희곡 전집>(김규종 옮김, 시공사 펴냄)으로 체호프의 희곡들과 '바냐 외삼촌'을 다시 읽었다. 먼저 조용히 마음속으로 한번 읽은 다음 소리 내어 낭독하면서 다시 한 번 읽었다. 마음속으로 읽으면서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낭독하면서는 눈물이 오히려 속으로만 흘렀다.

이번에는 모든 것들이 연민으로만 읽혔다. 퇴직 교수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고 그를 용서했다. 아니 내 마음속의 분노를 연민으로 돌렸다. 엘레나 안드레예브나의 욕정과 체념에 같이 울었다. 아스트로프 미하일 리보비치를 극단으로 내몰지도 않았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서 내 그림자를 보았다. 몰락한 지주인 텔레긴 일리야 일리치의 힘 빠진 투덜거림에서 친구들의 얼굴을 보았다. '바냐 외삼촌'을 읽으면서 내가 그들 속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들 모두가 되어 '바냐 외삼촌'을 읽었다.

나 자신을 보이니스키 이반 페트로비치(바냐)와 동일시하면서 '바냐 와삼촌'을 읽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의 눈으로 다른 등장인물들을 만났고 그의 처지가 되어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의 귀를 통해서 조카인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소냐)의 위로를 들었다. 바냐가 되어 절망하다가 소냐가 되어 희망을 품는 이중 경험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고단하지만 살아 내야만 하는 그들의 현실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서글펐고 황홀했다. 지금 '바냐 외삼촌'을 다시 쓰라면 나는 체호프가 썼던 그 내용 그 템포 그대로 쓰고야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톤 체호프는 내겐 거울 같은 작가다. 내 삶의 여정의 교차로에서 늘 내 자신의 모습을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비춰서 보여주곤 했다. 안톤 체호프는 내겐 디스코장 같은 존재다.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서 맘껏 내 자신의 정신을 흔들어 볼 수 있었으니까. 안톤체호프는 내겐 쿨한 섹스 파트너 같은 작가다.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서 나는 등장인물들과 온갖 욕망과 분노와 열정을 공유하며 섹스를 즐겼다. 작품 밖으로 나오면 우리는 쿨하게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선배의 체호프 희곡집 번역본이 나오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때 나는 과연 새로운 '바냐 외삼촌'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