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대인가
시대인식의 차이를 지적하셨습니다. 동감합니다. 서로 간의 시대인식의 낙차가 뚜렷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낡음'을 고수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태도를 높이 사셨죠. 그는 "시대가 변했다"는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인간 유형이었다고요. 바깥에서 들여온 새로운 말과 진검승부하면서 사유의 날을 벼려갔던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러한 태도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사상의 기개, 근성(根性)이 완연한 탓입니다. 그는 진정 일본 사회의 심층에 뿌리를 내리고 사유를 개진했던 일급의 사상가입니다.
'낡음'을 고수하는 루쉰과 다케우치를 마음에 새기다, 문득 올해가 소련 해체 20주년임을 의식케 됩니다. 어떤 이가 '역사의 종언'을 호언했을 만큼 '시대가 변했다'는 실감이 정점을 쳤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에도 탈민족주의, 탈근대주의, 탈구조주의 등 온갖 포스트 담론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었지요.
허나 그 포스트 담론들은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세계 체제에 어떠한 균열도 가하지 못한 채 안분자족했습니다.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재탈영토화의 끝없는 탈주야말로 진정 변혁적이라 소리쳤건만, 그러한 허위의식으로 적색 유토피아의 해체 이후를 위무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 위로의 공간을 너끈히 품어줄 만큼 자본주의의 영토는 큰 아량으로 넉넉했습니다. 물론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소수 인문학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팬덤이 생겼지요.
그에 반해 동아시아론은 남달랐다고 여겨집니다. 민족문학론의 자기반성이 제3세계론의 지평을 열고, 그 제3세계론의 관념성에 대한 성찰이 재차 동아시아론으로 심화된 것이었으니, 족보 없는 포스트 담론들과는 격을 달리 합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궤적을 같이하며 진화해 왔고, 소련 해체(1991년)와 한국-중국, 한국-베트남 수교(1992년)라는 세계사의 격변과도 호흡을 같이하며 갱신을 거듭했습니다. 한반도의 장소성에 착근된 논의였기에 유독 지식과 사상의 지정학에 예민했다고도 하겠습니다.
기실 사회주의와 포스트 담론은 그 내면에서 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첫 번째의 탈근대 기획이 사회주의라면, 두 번째의 탈근대 기획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허나 양자 모두 서구발 탈근대 기획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서구주의가 '지금 여기'의 감각이 부재하다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면, 그에 반하는 민족주의는 '지금 여기'로의 함몰이라는 편집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지금, 여기'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에서 동아시아론은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시대의 변함없음도 간과하지 않는, '때를 맞춤한(時中)' 논의였던 것입니다. 시대의 정곡을 얻었기에 한때나마 국가적 의제로 격상되는 등 '풍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터이고요.
반면 우리들의 시대인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작금의 변화를 인식하는 지평의 차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다시금 근대에 대한 상이한 독법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서구화'와 등치하고 있는 '근대화'란 18세기 후반 이래 유럽 패권의 여러 현상을 말할 뿐입니다. 그것도 동아시아로 좁히자면 고작 19세기 후반부터의 일이지요.
여기에서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 감각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서세동점'이라고 표현된 이 기간은 기실 몽골 세계 제국 이후부터 개시된 '역사적 근대'의 극히 말단에 불과함을 자각하게 된 까닭입니다. 다만 이 기억이 워낙 최근이자 최신의 것이기에 우리의 의식을 압도적으로 사로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동과 서의 괴리를 실재보다 크게 생각하는 것도 이런 기억과 감각의 편향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실제로 아편 전쟁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동아시아에 도래했던 전국시대(戰國時代)(1842~1979년)는 몽골 세계 제국의 지속 기간(1271~1368년)과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인류사의 실재를 한층 균형감 있게 바로 잡는 인식의 구조 조정은 '반전시대'를 맞이하는 기초 공사라 하겠습니다.
저는 '사건은 먼지다'라는 브로델의 시적 통찰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만사에 새로움을 찾는 후진성에 대한 일급의 비수라고 하겠지요. 허나 변화를 변화로 자각하지 못하는 타성 또한 지적 나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브로델은 대작 <물질 문명과 자본주의>를 탈고하면서 그 서장에서 '내기걸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뼛속까지 사가(史家)임에 틀림없는 브로델이 견자(見者)로서의 내기걸기가 가능했던 것은 어째서일까요. '장기 지속(longue duree)'입니다. 사건은 먼지이지만, 그 먼지가 누적되고 축적되는 역사의 지층, 그 거대한 뿌리의 장기 지속을 꿰뚫었던 것입니다.
2008년 이래 '현재 진행형'인 금융 공황이 유독 엄중한 것은 이것이 10년, 30년 단위로 반복되는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세기의 터울을 두고 이뤄지는 패권 이행의 전환기와 긴밀히 맞물려 있는 것이지요. 기실 금융 자본주의의 융성이 패권국의 쇠퇴를 알리는 '가을의 표지'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헤게모니 국가가 쇠퇴할 때의 공통적 현상을 미국 또한 착실히 밟아가는 과정입니다.
허나 작금의 변화가 '전환시대'를 능가하는 '반전시대'라는 것은 새로운 패권으로의 이행을 쉬이 예상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 탓입니다. 세계 체제의 구조적 전환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는 체제 자체의 말기 국면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즉, 체제 유지의 기회비용을 외부화 할 공간(식민지, 자연 등)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자체의 활력이 남아 있다면 패권국 교체를 통해서 세계 체제는 지속가능하겠지요. 허나 지금은 그 여력 자체가 소진되고 만 역사적 체제의 끝물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과 서의 반전이라 함은 패권의 이행이 아니라, 체제의 이행으로 접수할 일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안에서 중국으로의 패권 교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전성기 때 인구가 2000만이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최전성기였던 20세기의 중엽에도 2억이 채 되지 못했지요. 허나 중국은 지금만 해도 13억이 넘는 인구를 안고 있는 문자 그대로의 대국(大國)입니다. 인도는 또 어떠한가요. 인도가 19세기의 영국을, 중국이 20세기의 미국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굴기(13억)와 인도의 부상(11억)과 이슬람의 각성(13억)으로 상징되는 21세기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는 다른 삶의 방식과 사회조직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세계 질서가 어떠하리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파국의 도래를 점쳐 볼 수도 있고, 질적으로 더 나쁜 세계 체제로 전환될 수도 있겠지요.
허나 그 아득한 절망감에 대한 거절이야말로 '저항'의 정수가 아니던가요.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땅 위의 길과 같습니다"(루쉰) 그래서 미래(未來)는 늘 미지(未知)입니다. 그 미지를 탐구하는 동방의 길로 동아시아론을 정성껏 자리매김 합시다.
비서구의 초기 근대를 복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초기 근대'는 '근대의 초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근대'의 탈주술화(the disenchantment of the Modern)를 겨냥합니다. 그래서 '초기 근대'는 '근대'와 대립적이기까지 합니다. 그간의 근대란 세계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럽의 특수한 경험인 탓입니다.
그 유럽의 근대가 초기 근대의 복수성을 지워가며 단수의 근대, 즉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이 지난 500년의 세계사입니다.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는 전면적인 식민화가 이루어졌지요. 영어와 스페인어가 통용되는 대륙이 되었을 만큼 인류 생태계의 일대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신대륙'의 독점을 통해 근대의 '단종 재배(monoculture)'는 아프리카로, 서아시아로, 남아시아로 확대 재생산 되었습니다. 그 정점이 동아시아가 경험했던 지난 150년의 전국시대(戰國時代)이고요. 그러나 20세기를 통하여 근대의 약속은 실현된 바 없습니다.
자유의 약속은 폭력의 증가로, 평등의 약속은 억압의 심화로, 우애의 약속은 끝없는 전쟁으로, 과학의 약속은 생태계의 파괴로 귀결되었음을 비통하게 접수할 일입니다. 1억의 인류가 전쟁으로 죽어간 '극단의 20세기'가 세계를 단작 경영했던 근대의 최종 성적표입니다.
신해 혁명을 복기한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모든 인류의 정치 체제가 '국민 국가'가 되어야 하고, 그 국민 국가는 다당제 의회제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맹목을 걷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와는 상이한 또 다른 경로의 역사 운동이 도처에서 역력했습니다. 가령 전 지구적 교역을 통해 지방과 민간에 자율적인 역량이 누적되고, 그로 말미암아 다양성과 복합성이 확대되는 정치 체제의 요구로 등장한 것이 신해 혁명입니다. 각 성의 개별성에 기반을 둔 다양한 정치 제도와 사회 제도를 포함하는 유연하고 복합적인 체제를 요청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초기 근대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억누르고 등장한 것이 (소련을 모방한) 중앙 집권적 당국(party-state) 체제입니다. 중국에서도 사회주의 근대의 단종 재배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허나 '장기 지속'의 역사 운동은 그 이면에서 복류하고 있었습니다. 개혁 개방과 더불어 (재)등장한 '일국양제'가 그것입니다. 홍콩과 마카오 등 개별 지역은 그 나름의 독자적 법체계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타이완과의 재결합은 일국양제의 수준을 한층 넘어서는 '일국다제(一國多制, one state, multi-system)'로의 질적 전환을 동반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방의 자율성이 증대되고, 그 지방에서 살아가는 민간의 역량이 확대되는 '민주'야말로 본디 신해 혁명을 추동했던 공화의 가치에 가깝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아름답게 재회하는 최적의 방법일뿐더러, 동아시아의 새 틀 짜기에도 유력한 참조점이 되어 줍니다.
마침 2011년 서울에서는 기존 정당과는 무관한 시민 사회 기반의 인물이 시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오사카에서도 '오사카'에 터한 지방 정당 후보가 기성의 전국 정당을 누르고 선거에서 승리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자본주의 천국' 홍콩에서는 친공산당 계열의 후보들이 대거 약진하기도 했지요. 국경을 가로질러 약동하고 있는 지방들의 현재에 주목하게 됩니다.
'반전시대'의 조짐은 이미 여실하지 않은지요. 이처럼 21세기의 (동)아시아를 실사구시적으로 전망할 때, 그 복합적 질서는 근대의 국가 간 체제보다는 과거의 중층적 구조와 흡사할 가능성이 한층 농후합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사고한다면, 그 아시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었는지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통이니 봉건이니 하는 근대의 주술로 매도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잠시 청조의 정치 체제도 복기해 볼까 합니다. 청조는 번부와 조공, 호시의 서로 다른 체제를 통하여 중국의 안과 밖을 아울렀습니다. 번부는 몽골, 티베트, 신장 등 내륙 아시아를 관할했으며, 조공은 조선과 류큐, 베트남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지칭합니다. 호시는 무역 네트워크의 일환으로 일본과 동남아, 서구 등 조공의 외부에 있는 국가들과의 관계를 말하지요.
특히 번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화 질서와 무연한 이질적인 문화권과의 소통을 위한 기구였지요. 실제로 청조는 다양한 민족, 종교, 문화를 포괄한 연합 정권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청의 황제는 한인의 천자였을 뿐 아니라 만주족의 족장이자 몽골의 대 칸이며, 티베트불교의 후원자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하나의 이념과 체제를 요구했던 20세기의 국민 국가와는 판이했던 것이지요.
국가와 문화의 민족주의적 접합이야말로 서구 근대가 강제한 '장기 20세기'의 특징입니다. 오늘날 티베트와 신장에서 불거지는 갈등과 모순 또한 '중국'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대'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정체성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동반하지 않으며 문화의 순환을 가능케 했던 초기 근대의 역동성을 복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대와 사소도 낡은 유습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실로 간단치 않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인 대국과 다양한 소국이 존재하는 물리적 현실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입니다. 국가 간 체제라는 형식적 평등의 도입이 150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산출했던 것과는 달리, 대소와 상하의 분화로 다양한 민족-국가가 공존하는 결과를 낳았던 과거의 실상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특히 대소와 상하 간의 역동성은 퍽이나 흥미롭습니다. 소국의 사대를 무시하면 대국은 상국으로서 윤리적 정당성을 잃고 맙니다. 대국(大國)이되 상국(上國)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요. 덕이 결여된 하국(下國)에 그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국의 행동을 규제하는 소국의 열린 공간이 생깁니다.
반면 대국 또한 소국을 섬기면 다른 소국의 자발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으므로 수월하게 상국의 위상을 획득하게 됩니다. 물리적 격차와 도덕적 권위의 상호 작용으로 아스라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태평성세란 결코 정태적이지 않습니다. 이질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매우 동태적인 질서였던 것이지요. '부국강병'만이 곧 선(善)이었던 근대의 약육강식과는 판이합니다.
물론 과거의 동아시아를 미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유독 한반도를 고리삼아 분쟁에 휩싸인 사례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150년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노정한 것처럼 항상적인 전시 체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기실 동아시아의 근대란 온통 '선군(先軍) 정치'였지요. 도조 히데키, 마오쩌둥, 장개석, 김일성, 박정희, 호치민 등등등. 북조선만 유별난 게 아닌 셈입니다. 그만큼 동아시아의 골격에 들어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까닭에 부정교합과 불협화음이 유독 번다했음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안적 국가 형태를 모색했던 동아시아의 다채로운 사상적 자원을 재결집하는 작업이 긴요합니다.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 등 관념적 급진성으로 질주할 것이 아니라, 지방 자치의 충실과 지역 건설의 확충으로 국가와 민족의 상대화를 실천하는 편이 한결 지혜롭습니다. 이를 통해 대국과 소국, 나아가 비국가적 정치 공동체의 차이가 폭력적 위계로 전락하지 않고 화이부동하는 협동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쁜 일입니다.
東과 西의 반전과 新과 舊의 반전이 겹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동방의 구질서로부터 대안적 세계를 전망하는 새로운 영감을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과거는 정녕 미래의 보고(寶庫)입니다. '방법으로서의 과거'라고나 할까요.
어떻게 호흡할 것인가
우리 간에는 시대인식의 차이 못지않게 태도의 차이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어떤 시대인가와 더불어 그 시대와 어떻게 호흡할 것인가도 따져봐야 하겠지요. 지난 글에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게는 한국의 좌/우를 넘어서고, 크게는 한반도의 남/북을 아우르며, 좁게는 중/일의 공존을 도모하고, 넓게는 미/중의 협동을 촉진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동과 서가 회통하는 큰 뜻을 실천하는 현장으로 한반도를 되새길 일"이라고요. 하지만 문장의 매 쉼표마다 파열음이 들리며, 저 지난한 과정들은 연속적이지도 순차적이지도 포함 관계에 있지도 않다고 되받으셨죠.
맞습니다. 매 쉼표마다 지뢰밭이 한 가득입니다. 허나 그 파열음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 사상이 사상으로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요. 그 파열음을 산출하는 조건과 구조에 창조적으로 응전해 가는 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뿌리내린 담론이 아닐 런지요. 저는 한국의 좌/우와 한반도의 남/북과 동아시아의 중/일과 세계의 미/중은 긴밀하게 얽혀 있는 복합 과제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지난 150년의 근대 경험이 착종되어 있는 엄연한 현실이자 현장인 까닭입니다. 그 누적된 과제의 실효적인 타개책 없이 어떠한 탈식민이 가능하며, 탈냉전은 또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 과제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과제도 온전히 풀릴 수 없는 엄혹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할 일입니다.
환태평양 경제 협정(TPP)에 참여하려는 일본을 거론하셨습니다. 맞습니다. '20세기의 관성'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역사의 경로 의존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요. 허나 그 일본에서 '55년 체제'를 허물고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 첫 국정 기조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내세웠다는 점 또한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그것이 TPP로 굴절되어 가는 지난 2년여의 과정은 노무현 정부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내걸었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역주하는 과정과도 판박이입니다. 여기에는 미국이라는 상수와 북조선이라는 또 다른 상수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일본이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탈아입미'로 가는 과정에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은 결정적이었습니다.
후텐마 기지 이전을 촉구하던 오키나와의 사회 운동에도 찬물을 끼얹고 말았지요. 오키나와의 오랜 염원과 일본의 동아시아 귀환에 한반도의 불안정이 일격을 가한 꼴입니다. 부시의 막장과 고이즈미의 어깃장이 한국의 동북아 시대를 지체시켰다면, 김정일과 이명박의 '남북합작'은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일거에 날려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긴밀히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남북 관계의 답보로 북조선의 중국 의존도는 우려할 만큼 더없이 깊어지고, 그 마주 편에서 한국은 속병으로 곪아가는 미국과의 FTA로 내달리는 형국입니다. 그와 보조를 맞추어 미중 간의 동아시아 쟁패전은 한층 거세지고 있지요. 따라서 복합 과제를 실천하는 현장으로 한반도를 되새기는 일은 자가당착이나 과대망상이 아닙니다. 엄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고, 그 현실을 타개해 가겠다는 책임감의 발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나름의 소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이웃나라를 태평양으로 등 떠밀고 동아시아의 신냉전 구도에 일조하고 말았음을 통렬하게 반성할 일입니다. 남 탓 전에 우리부터 '내 큰 탓'을 탓합시다.
저로서는 작금 동아시아에 드리우는 천하대란의 먹구름을 목도하며 동아시아론이 '사상'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절박한 이유를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등 현실적 영역에서도 실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담론으로 부단히 단련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일본이 여전히 탈아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면, 이제야말로 그 '사상'이라는 것의 존재 형식을 심각하게 되물어 봐야 할 것입니다.
다케우치 사상의 유효함이란 기실 일본의 '노예 상태'의 지속에 기거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즉, 지금껏 '국체'를 바꾸는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고 만 사상(지식인)의 역할에 냉정한 평가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인용하고 각주를 달고 말을 보태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그 동어반복을 지속적으로 산출하는 국가와 사회를 개조하는 일대 사업(治國)에 (우리도 함께) 매진할 일입니다.
본디 동방의 지식인들, 즉 "士"는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치국과 평천하를 탐구하는 대학(大學)은 그 출발부터 철저한 실학(實學)입니다. 국가 권력에 대한 과도한 결벽증이야말로 독재와 파시즘의 낡은 잔재입니다. 그 빈틈을 비집고 신자유주의가 '악의 꽃(La Fleur du mal)'을 피웠습니다.
국가 권력의 주인이 바로 우리라는 점이야말로 근대가 선사한 최고의 축복이 아니던가요? '우리가 99퍼센트이며', 권력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동방지사(東方之士)"의 기개 또한 복구되어야 하겠습니다. 동방에서는 인텔리겐차니 유기적 지식인이니 하는 별도의 개념이 애초 필요치 않았습니다.
조선의 건국 정신이 담겨진 정도전의 <경국대전>을 보십시오. 유교의 경법주의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실현코자 한 조숙한 '입헌군주제'의 표상입니다. 조선은 지식인들이 왕권을 통제하는 '선비의 나라'입니다. 그들이 "공자 왈, 맹자 왈"을 읊은 것도 그저 고루해서가 아닙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군왕에 맞서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붓의 노래'를 부른 것이지요. 그 공적 소명을 다하는 자세야말로 대학이며, 실학이고, 동학입니다. 드높은 문(文)의 힘으로 무(武)를 다스리고야 말겠다는 동방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전통이 루쉰에게도 맥맥하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속에 칼을 품었던 비수의 문장들이 그러하지요. 그의 직언(直言)에는 현대판 사(士)의 풍모가 여실합니다. 그 루쉰이 자신의 문집을 항상 마오쩌둥에게 헌정했음도 의미심장합니다. 골방의 지식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마오쩌둥은 대장정의 와중에도, 연안의 토굴에서도 루쉰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혁명의 모태가 된 연안은 매일같이 <루쉰 독본>을 읽는 메아리로 가득 했습니다. 그 집합적 독서는 러시아 혁명의 '전위'와는 상이한 중국 혁명의 '군중 노선'과도 상통합니다. 즉, 그들은 다케우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루쉰을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루쉰을 얻은 것입니다. 그 차이를 날카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차이야말로 일본과 중국의 역사가 노정한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다케우치는 '사상'을 건져냈지만, 마오는 그로부터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동아시아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무릇 동아시아에서는 사상이 정치와 무연했던 적이 없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 이래로 사상가는 곧 치세(治世)가입니다. 절치부심 지식을 갈고 닦는 것도 그 사회와 국가를 올바르게 이끌기 위한 도덕적 자각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나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적 심성과도 사뭇 다릅니다. 상아탑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연구자들과도 판이하고요.
하여 '반전시대'에 부합하는 사(士)의 창조적 복권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거품이라 평가하셨던 동아시아의 정책 구상들도 더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사상과 정책을 별개인양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근대적'이지요.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딱 부합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노무현 정부에서 시도되었던 '동북아위원회'는 한층 심화되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사회과학자들만이 아니라 문, 사, 철을 공부하는 일급의 인문학자도 삼고초려를 통해서라도 모셔가 지식을 나누고 지혜를 모으는 일대 향연을 펼칠 일입니다. 그래야 동아시아론과 동아시아학의 선순환도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경국대전>에 버금갈 만한 21세기의 사상적 이정표를 세울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 기개와 기백으로 충만해야 '반전시대'를 감당해갈 호연지기도 다져집니다.
당장 1월의 타이완 총통 선거를 기폭제로 동아시아의 축을 다시 짤 2012년이 열리게 됩니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는 대륙에서는 '한국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발언한 쉬진핑 시대가 개막하겠지요. 북에서는 '강성대국' 원년을 선포할 것이고, 러시아에서는 푸틴의 복귀가 점쳐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 또한 큰 선거를 앞두고 있지요.
이 격동하는 동시대의 현장이야말로 동아시아론이 거처해야 할 사상의 터전이고 실천의 근거지입니다. '동아시아에 내재하기 위한' 지름길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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