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부산시당 공동위원장인 김 교수는 부산시장, 국회의원 등에 네 차례 출마해 네 차례 모두 장렬하게 떨어졌던 인물이다. 과거 그는 부산 지역 진보의 명맥을 알리고 세를 불리기 위해 떨어질 줄 알면서도 그저 '선전'을 목표로 나갔다. 그래서 부산의 진보는 그에게 진 빚이 꽤 크다. 이번에 그러나 그는 선전이 아니라 승리를 목표로 해운대·기장(을)에 출마한다.
20년을 기다렸다
2012년 총선은 이제까지 지리멸렬했던 부산·경남(PK)의 야권에겐 다시없는 기회다. 사람들의 몸속에 '푸른 피'가 흐른다는 이곳에서는 한나라당이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1당 독재가 20년간 이어져왔다.
부산은 오랜 세월 야도였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무너뜨린 부마 항쟁의 '장본인'이다. 그런 부산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정의당(민정당)과의 3당 야합을 하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하면서부터 보수화됐다. 특히 부산의 진보는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사하(을)의 조경태 의원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전패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사실 그동안 부산 시민들은 지역구보다는 공천에 매달리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에게 '몰빵'을 해주었다. 그 결과는 2000년대 들어 16개 광역 자치 단체 중 저 밑바닥에 처박힌 경제 지표와 전국 7대 도시 최고의 자살률이다. 그러나 부산 시민들은 부패한 정치인들, 무능한 부산시에 익숙해져 버렸고 가난과 이 살기 힘든 세상에 순응해 버렸다. '삶의 고통' 그리고 '추락하는 부산'에 무감각해진 것이다. 그동안 부산 시민은 너무 착했다.
이제 진보 진영에게 이명박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으로 다가왔다. 이 정부는 무능과 부패에 더해 사실상 '서울 정부'였고 동남권신공항도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많은 부산 시민들을 피눈물 나게 한 저축 은행 사태에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이 연루되어 처벌까지 받고 있다.
부산의 민심이 심상치 않게 되자 많은 이들이 부산이 내년 정국의 핵으로 부상할 거라 예측하고 있다. 조국 교수는 "부산은 YS 이후 거의 일당독재 상황이다. 이를 깨뜨리지 않고는 부산 발전은 없다. 또 부산이 바뀌어야 전국이 바뀐다"고 말했다. 정말 내년 봄바람이 부산을 다시 회춘시키고 부활시키는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내년 못 이기면 앞으로 30년은 못 이긴다
조국 교수는 이 봄바람을 '동남풍'이라 불렀다. 그는 "삼국지에 보면 공명이 동남풍을 빌어 적벽에서 승리했다. 동남풍은 부산에서 시작된다. 동남풍이 분다면 디빌(뒤집을) 수 있다"고 했다. 이날 그는 "총선에 출마하지는 않지만, 판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라며 "당이 나뉘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공동선거대책본부가 만들어져야 역할을 할 것이다. 김여진 씨도 마산 사람이다. 내년에도 '공중전을 할 것"이라며 대략의 방향도 제시했다.
드디어 지난 26일 문재인, 문성근, 김정길이 함께 부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김영춘 전 의원도 이미 출마를 결정한 상태다. 이쯤 되면 역대 부산 야권 후보 최강 라인업이다. '낙동강 전투'는 시작됐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3석이면 기적' '운 좋으면 5석'이라던 예상이 있었는데 지금 내심 그 이상을 바라는 분위기다. 부산이 내년 총선의 '태풍의 눈'이자 '최대 승부처'로 부상했다. 민주통합당은 부산이 '내년 총선 승리의 진원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단한 기세다. 부글부글한 부산의 민심이 서울을 무너뜨릴 기세다. 그러나 한편 걱정도 앞선다. 이런 분위기인데도 내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부산은 30년은 포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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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만으론 불안하다
지금 진보 진영의 많은 이들은 한나라당과 '일대일' 구도만 만들면, 즉 '단일화' 하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원순 드라마'에 취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2012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 수도권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부산은? 부산이 단일화만으로 진보의 수중에 떨어질까. 섣부른 판단이다. 민주통합당 등 진보의 낙관이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우선 진보가 주야장천 단일화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반해 한나라당은 지금 한 마디로 '별 짓'을 다 하고 있다. 박근혜 위원장은 4대강 사업, 보수 언론, BBK는 물론이고 내곡동 사저 논란을 탄핵 사유라며 이명박 정부를 맹공하는 이상돈 중앙대학교 교수와, 강력한 재벌 개혁론자로 민주당 의원을 지낸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비상대책위원으로 내정했다. 대변인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날치기 통과 때 한나라당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초선의 황영철 의원이 내정됐다.
여기저기서 불출마 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만 이제까지 7명이고 탈당 의원도 2명이다. 홍정욱, 현기환처럼 젊은 초선 의원도 있고, 박진 같은 중진 의원, 그리고 김형오, 이상득 같은 원로급도 있다. 특히 이유야 어쨌든 이상득의 불출마는 한나라당 입장에선 일단 10석은 건진 셈이다. 혹시 아는가. 정 급하면 박근혜 위원장이 대권 불출마 선언이라도 할지. 그러나 '불안함'에는 이러한 '정치적 요인' 외에 대단히 '부산적 요인'도 있다.
'푸른 피'가 흐르는 땅 부산
그날 두 교수와의 대담에서 듣게 된 한 대학생의 발언은 의미심장했다. 부산의 대학생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 대부분은 한나라당 지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 대학생과 젊은 층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가 대부분이 반 이명박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박원순 시장의 탄생을 보게 됐지만 부산은 수도권의 풍향이 별로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학생이 그랬다. "박원순이 여잔줄 알아요."
단일화 못지않게 진보 진영이 희망을 거는 것이 바로 젊은 세대인데 부산에서는 그게 잘 먹히지 않을 듯하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요즘 젊은이들은 신문을 보지 않는다. 내가 거의 매학기 확인을 하는데 학생 50명 중 집에서 신문을 구독하는 집이 7~8명이고 그 중 그 신문을 보는 학생은 그 반쯤 될 듯하다. 이는 서울의 학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부산의 젊은이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낮기도 하지만 아예 진보에 대해 시큰둥하다. 물론 이는 지역 정서나 부모의 영향, 그리고 지역 언론 등의 환경적 요인과 이로 인한 무기력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날 행사 시작할 때 참석한 대학생, 그리고 대학원생들을 파악해 보니 400여 명 청중의 10분의 1인 40명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았다. 부산엔 아직 '2040'이 보이지 않는다.
또 올해 들어 그 영향력을 엄청나게 키워가고 있는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도 큰 차이를 만드는 듯하다. 그래도 서울 또는 수도권의 젊은이들에게는 정치, 사회, 경제 쪽 뉴스가 트위터 등을 통해 빨리,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데 반해 부산의 경우는 전파의 속도나 범위에서 이보다 처지는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파워 트위터리안은 모두 서울에 몰려 있지 않은가. 따라서 박원순 시장을 가능케 했던 '젊은 세대'와 'SNS'는 부산에서 그대로 적용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젊은 층으로의 '확장성'이 관건
기성 세대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얼마 전부터 이런 저런 행사의 진행을 맡게 됐다. 11월엔 어제 구속된 정봉주 전 의원도 불러서 토크 콘서트도 했었고 얼마 전엔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을 부르기도 했다. 이번 김석준, 조국 교수와의 대담도 그 중 하나였다. 부산에서 400명 청중이 모이기는 흔치 않다. 분위기도 좋다.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이다. 그런데 몇 번 해보고 드는 느낌으로 이런 게 있었다. "지난번에 왔던 사람들이네."
그렇다. '이 행사'에 가서 보는 사람을 '저 행사'에서도 보게 되는데 이들은 또 '그 행사'에서 봤던 사람들인 게 대부분의 경우다. 그래서 부산의 진보의 결정적 약점은 바로 '확장성의 결여'로 수렴된다. 이들은 절대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다. 그러나 부산의 진보는 자기들끼리 모여 자위하는 데 너무 익숙해진 것 아닌가 싶다.
사실 이들은 대단히 순수하다. 그러나 그만큼 그들은 '운동권적'이다. 나는 서울에서도 이른바 가장 좌파적이라 불리는 시민 단체에서 10여 년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음에도 부산의 시민 단체 또는 시민 사회에 적응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느꼈었다. 특히 결정적으로 젊은 세대가 보이지 않고 기존 세대가 이들과 소통하려는 노력도 찾기 힘들다.
부산이 내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려면, 아니 '선전'이 아닌 '승리'하려면 엄청난 바람이 불어야 한다. 지금의 바람 정도로는 딱 '선전'까지만 가능하다.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처럼 0.6퍼센트 차이로 석패하고 또 '사실상의 승리', '집권 여당의 실질적 패배'라고 자위할 건가. 지면 그냥 진거다. 이기기 전엔 아무 의미 없다.
젊은 세대를 향한 교두보가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부산은 시민 사회나 진보 진영이 젊은 층과의 소통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고 기성세대의 보수화가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진보가 포위당한 꼴인데다가 또 신진 세대마저 사회 문제에 냉담한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부산은 내년 '동남풍'은커녕 스스로의 노쇠함만 뼈저리게 느끼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부산에게 있어서 2012년은 '총선 승리', '정권 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부산의 미래', '부산의 부활'이 걸린 해이다. 내년에도 실패하면 지난 20년 같은 30년이 부산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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