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이 내게 맡겨진 책을 읽는 일이라면, 서평은 맡겨진 책 이상을 읽는 일이다. 서평은 해당된 책을, 그 책을 쓴 사람이 이루어놓은 그 동안의 작업 속에, 또 그 책이 다룬 주제를 다른 지은이의 입장이나 그들이 성취한 수준과 비교할 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서평은 한 분야에서 오래 훈련받은 사람이나 그 주제에 정통한 사람이 잘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정리하자면, 독후감은 문리가 트인 사람이면 분야와 상관없이 쓸 수 있는 글이고, 서평은 한 분야의 전문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내 한해를 돌아보니, 올해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것이 모두 서평이 되지는 못했고, 대부분 독후감에 낙착했다. 굳이 전공을 따지라면, 나의 전공은 문학이다. 그러니까 내게도 서평을 잘 쓸 수 있는 '나와바리'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오래 전부터 한사코, 내 전공 구역을 버리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문리가 트인 것도 아니면서, 광역 지역을 뛰어 다니며 독후감을 쓰고자 했다. 이 글은 올해 나온 책을 대상으로 내가 썼던 독후감을 뒤돌아보는 극히 개인적인 기록이지, 여기에 언급되는 책들이 올해의 추천서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힌다.
책에 대한 연재를 맡은 이들이 늘 당면하는 것이지만,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책을 고르는 일이다. 이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게 직업인지라, 임무만 떨어지면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보다는 어떤 책을 고르느냐가 더 어렵다. 나의 경우 여러 지면에 글을 연재하면서, ① 올해의 신간(경우에 따라 작년의 책까지 포함) ② 비문학(문학 작품이 아닐 것) ③ 작은 출판사(대형 출판사 기피), 라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위의 세 원칙을 통과하고 나면, 그 책의 주제가, 현재의 사회적 관심사나 공시적 맥락과 맞아 떨어져야 했다. ①, ②, ③도 까다롭지만, 마지막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화룡점정하는 일이나 같다.
올 초에는 지난 해 연말에 이어,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 열악해진 인권과 도시 빈민 문제에 대한 해답을 책 속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강현수의 <도시에 대한 권리>(책세상 펴냄), 서보혁의 <코리아 인권>(책세상 펴냄), 마이크 데이비스가 엮은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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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을 멈춰라>(히로세 다카시 지음, 김원식 옮김, 이음 펴냄). ⓒ이음 |
위의 책들은 모두 '사회적 독서'와 관련 되는데, 차례대로 이은용의 <미디어 카르텔>(마티 펴냄), 클라이드 바로우의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박거용 옮김, 문화과학사 펴냄), 서보명의 <대학의 몰락>(동연 펴냄), 제니퍼 워시번의 <대학 주식회사>(김주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존 티한의 <신의 이름으로>(박희태 옮김, 이음 펴냄), 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김한영 옮김, 아카이브 펴냄), 데이비드 프리드먼의<거짓말을 파는 스페셜리스트>(안종희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 빌 코바치·톰 로젠스틸의 <텍스트 읽기 혁명>(김원옥 옮김, 다산초당 펴냄), 에이미 굿맨·데이비드 굿맨의 <미친 세상에서 저항하기>(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미키 맥기의 <자기 계발의 덫>(김상화 옮김, 모요사 펴냄) 등도 여기 속한다.
마감은 코앞인데, 아직 책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북 칼럼니스트는 가벼운 공황에 빠진다. 신간이 흔전만전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이런 사태를 겪게 되는 까닭은 뻔하다. 공공연하지만, 여전히 대외비(對外秘)로 남아 있어야 할 사항으로, '이 책은 지은이와 말싸움을 벌인 적이 있거나, 그냥 밉거나, 잘 나가는 게 배 아파서', '저 책은 출판사가 마뜩찮거나, 보태 주기 싫어서', 또 '이 책은 분명 훌륭할 것이지만, 너무 두껍거나 주제가 만만치 않아, 독후감이나 서평, 어느 쪽도 자신이 없어서' 쓰지 않거나, 쓰지 못한다. 신간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읽고 쓸 책만 변변찮아지는 게 아니라,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시간마저 동나 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때마다 북 칼럼니스트를 구해주는 것은 평전·역사서·문화(풍속) 연구다. 이 분야의 책들은, 그저 잡기만 하면 독후감이나 서평 어느 형식으로든 흉내를 낼 수 있다. 황재문의 <안중근 평전>(한겨레출판 펴냄), 류시현의 <최남선 평전>(한겨레출판 펴냄),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한겨레출판 펴냄), 김원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현실문화 펴냄),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푸른역사 펴냄), 전인권·정선태·이승원의 <1898, 문명의 전환>(이학사 펴냄), 전우용의 <현대인의 탄생>(이순 펴냄), 패트릭 스미스의 <다른 누군가의 세기>(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나이토 치즈코의 <암살이라는 스캔들>(고영란 옮김, 역사비평서 펴냄) 등은, 나를 공황에서 구해준 고마운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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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마늄 라디오>(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이상북스 펴냄). ⓒ이상북스 |
(이런 반헌법적인 반관(半官) 단체가 버젓이 연명하고 있는 것도 납득 되지 않지만, 이런 단체의 위촉을 받아 '이 달의 책'을 선정하는 위원으로 활약하시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작자들은 더 우습다. 그들은 책을 금지시킬 수 있는 간행물윤리위원회 고유의 잘못을 '세탁'해 주는 똑같은 반헌법 범죄자들이 아닌가?)
내가 발문을 쓴 작품이 법적인 곤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 손을 쓰지 않는다면, 내 발문이 '주례사'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래서 그 작품을 옹호하는 글을 따로 써서, 한 주간지에 실었다.
똑같은 문학이지만, 소설과 달리 희곡은 될수록 지면에 소개하고자 노력한다. 최창근의 <봄날은 간다>(이매진 펴냄)와 김은성의 <시동라사>(지안 펴냄)가 그런 경우다. 소설은 서평의 대상이 되지만 희곡집은 외면 받는 게 우리나라 실정인데, 이론서의 경우도 사정은 같다. 미술이나 영화 관련 평론서나 이론서가 자주 서평에 오르내리는 반면, 연극 평론서나 이론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새해에는 올해 끝내 쓰지 못했던 안치운의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독백과 운문의 귀향>(문학과지성사 펴냄)과, 한무의 <아르토와 잔혹 연극>(지만지 펴냄)을 꼭 쓸 작정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난장이 펴냄)·<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현우·김희진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허경 옮김, 인간사랑 펴냄),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이민아 옮김, 궁리 펴냄),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이은정 옮김, 동녘 펴냄), 랍 벨의 <사랑이 이긴다>(양혜원 옮김, 포이에마 펴냄) 같은 책은, 지은이들의 철학이나 주장 가운데서, 현재의 사회적 관심사나 공시적 맥락을 금방 포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책들이다. 내용 자체가 시사적이고 평이한데다가 얇기까지 한 이런 책은, 북 칼럼니스트들의 'SOS 비품'이다.
모두들 알다시피, 북 칼럼니스트가 글을 싣는 지면은 학술 전문지도 아니고 대학원의 학보도 아니다. 이를테면, 북 칼럼니스트는 자신이 읽고 소개하고 싶은 책이나 주제를, 어느 특정한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위한 '읽을거리'로 변용하는 일을 한다. 올해 나를 가장 애먹였던 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오르트망 옮김, 난장 펴냄)와 이현우의 <애도와 우울증 :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그린비 펴냄)은, 불특정 다수와 책을 잇는 '어댑터(adaptor)'의 능력을 시험하는 책이다. 읽을거리를 만들거나 중계자의 자질을 갖추고 나서야, 서평이나 독후감을 가지고, 정치 투쟁을 하거나, 진지전을 벌일 수 있다.
사족 : 이 글에 나오는 책들은, 내가 2011년 동안 종이 지면에 소개한 책들의 일부며, '프레시안 books'에 연재했던 것들은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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